45화. 위험 ― 이미 늦었어 (1)
천무진이 멀리에 있는 백아린을 향해 말했다.
"바깥쪽에 있는 놈들 좀 맡아 줘. 가능하지?"
"지금 저한테 가능하냐고 묻는 거예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백아린은 자신의 대검을 붕붕 휘둘렀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세에 눌렸는지 마주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부서진 벽 너머로 확인한 당소련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 백아린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당소련이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웃돌았다.
저 바깥에 있는 이들과는 손을 섞어 보지 않았지만 우두머리 흑의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며 이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 자들을 기세만으로 압도하는 상황이라니…….
그 순간 그녀를 이렇게 만든 흑의인과 마주한 천무진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당소련이 배 부분을 움켜쥔 채로 천무진을 향해 소리쳤다.
"그자 생각보다 강해요! 조심해요!"
천무진은 그녀를 향해 슬쩍 시선을 줬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당소련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자신이 눈앞에 있는 흑의인을 향해 던져야 할 말이었다.
천무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조심해야 할 게 난가? 아니면…… 겁을 먹고 있는 넌가."
"겁을 먹긴 누가 겁을 먹었다는 게냐."
흑의인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을 했지만 목소리 끝이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직접 실력을 보지 못했음에도 이미 상대가 위험한 자라는 걸 체감하고 있었던 탓이다.
천무진은 뽑아 든 검으로 그를 겨누며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내지. 당문의 사람들이 몰려들면 귀찮은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지금 천무진의 입장에선 이곳에 있는 흑의인들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밤이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 아닌 저기 쓰러져 있는 당율이라는 노인의 거처이긴 하지만 소란이 길어지면 이곳으로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금방 몰려올 것이다.
검을 든 천무진을 향해 흑의인 또한 양손에 비수를 든 채로 자세를 잡았다.
둘 사이에 찾아온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바깥에서 울려오는 백아린의 대검이 만들어 낸 충격음이었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흑의인들의 중앙을 갈라 버리는 그녀의 움직임. 그리고 그 소리와 모습에 움찔하는 흑의인을 향해 천무진이 달려들었다.
촤악.
검이 사선으로 치고 들어가자 상대는 황급히 뒤로 몸을 젖히며 몸을 회전시켰다. 아슬아슬하게 피함과 동시에 회전력을 이용해 안쪽으로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은 꽤나 기민했다.
흑의인이 사용하는 비수의 간격은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짧았고,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혀야 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상대의 모습에 천무진의 눈꺼풀이 꿈틀했다.
예상대로 무척이나 잘 훈련된 실력자였다.
허나 아쉽게도 그 움직임은 천무진에게 이미 읽히고 있었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비수를 가볍게 옆으로 흘려 낸 천무진의 주먹이 곧장 비어 있는 상대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빠앙!
가까스로 반대편 팔을 들어 올리며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흑의인의 몸이 밀려 나갔다. 막은 팔로 전해진 충격이 머리까지 흔들어 버린 그 순간, 천무진은 이미 그에게로 다가와 있었다.
촤악!
복부를 베기 위해 날아드는 검을 확인한 흑의인은 직감했다.
‘늦었어. 이건 못 피한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당하는 만큼 상대에게 갚아 주는 일뿐.
허리를 최대한 옆으로 움직여 거리는 좁히지만, 반대로 검에 당할 면적은 최소화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동시에 좁혀진 거리를 이용해 천무진의 어깨를 향해 비수를 꽂아 내렸다.
순간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한 감각이 허리에 느껴졌다.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정도는 각오한 상황, 처음 예정대로 그는 천무진의 비어 있는 어깨를 향해 비수를 내리찍었다.
운만 좋다면 어깨에 일격을 날리고, 곧바로 반대편 손에 들린 비수로 목을 관통하며 싸움을 끝낼 수도 있다 판단했다.
하지만…….
덥석.
비수를 쥐고 내치려던 손의 손목을 천무진이 허공에서 잡아 버렸다.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이 씨익 웃었다.
마치 이런 움직임을 보일 거라는 걸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익!"
흑의인이 당황하며 곧바로 반대편 손을 움직였다.
재차 찍어 오는 공격, 천무진은 이번에도 손을 움직였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었던 탓에 이번엔 잡아채기보다는 주먹으로 대응했다.
빠앙!
주먹이 날아드는 손의 팔꿈치를 강하게 후려쳤다.
팔목이 잡힌 상황에서 반대편 팔꿈치를 가격당하자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억."
얼굴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복면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토해 낸 그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허리를 베인 것보다 지금 이 일격이 훨씬 더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 줬다.
팔꿈치 뼈가 박살이 나면서 왼손이 곧바로 툭 떨어져 내렸다. 덩달아 손에 들려 있던 비수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힘을 줘도 손을 들어 올리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 지금 흑의인은 천무진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꽉 잡혀 있는 팔목.
이걸 벗어나지 않고서야 이 싸움에 승산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통을 참으며 어떻게든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팔목을 비틀었다.
황급히 뒤편으로 팔을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어딜."
몸을 앞으로 잡아당기며 천무진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이내 흑의인의 상체가 뒤로 밀려 나가는 그 찰나였다.
거리가 벌려지자 천무진은 지체 없이 검을 움직였다.
스윽 슥.
동시에 양쪽 허벅지를 베어 버리자 흑의인의 하체가 무너졌다.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은 그의 눈가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빠악!
주먹이 정확하게 안면에 꽂혔고, 그는 그대로 피를 뿌리며 나자빠졌다.
천무진은 힘을 잃고 덜렁거리는 흑의인의 팔목을 툭 놓아 버렸다. 그는 곧바로 뒤로 벌렁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흑의인을 제압한 천무진은 서둘러 한편에 주저앉아 있는 당소련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보다 한결 나아진 상태인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당신들 덕분에 간신히요.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이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당소련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신은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문제는 당율의 상태였다.
"저 좀 부축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소련의 어깨를 들어 줬고,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쓰러져 있는 당율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 당소련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숨이 끊기려 했던 그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히 상태는 이미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이었다.
당소련과 함께 당율에게 다가간 천무진이 먼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이내 천무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늦었습니다."
숨은 아직 붙어 있었지만 이건 살아 있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이 이미 장기 곳곳에 스며들어 모든 걸 망가트렸다.
거의 감은 두 눈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입 주변은 아까부터 흘러내린 피로 엉망이다.
쾅.
당소련이 분하다는 듯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당백에 이어 금장전의 관리자인 당율까지.
가문의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은 지켜 내지 못했다.
천무진이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어요. 최근 금장전에 드나들었던 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사숙을 찾았는데, 제가 왔을 때는 이미……."
말을 채 잇기 힘들었는지 당소련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금장전에 드나든 이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는 말은 저희가 의뢰한 독이 혈린만혼산이 맞다는 소립니까?"
"혈린만혼산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거든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더 큰 문제가 뭡니까?"
"누군가가 망혼초에도 손을 댔어요."
"망혼초……?"
"혈린만혼산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이에요. 절정고수조차도 죽일 수 있는 독이죠."
독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개중에서 절정고수 정도 되는 이들을 위협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독이 비밀스럽게 사천당문에서 빠져나갔다.
그 말은 곧 또 어딘가에서 망혼초라는 독으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소리인데…….
천무진이 뒤편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을 향해 말했다.
"어이, 이봐. 아는 거 없어?"
"크윽, 큭큭큭……."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대답 대신 웃음을 토해 냈다. 그 모습이 자신이 그걸 대답할 이유가 없지 않냐고 말하는 듯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들부들 떨면서 당율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당소련이 그 손을 잡아 주기 위해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미미하게 흔들리는 그의 머리를 본 천무진이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천무진의 행동에 당소련이 고개를 돌려 바라볼 때였다.
천무진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하지만 사숙이 절……."
"그게 아닌 걸로 보입니다."
천무진의 말에 당소련이 당율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당소련을 향해 힘겹게 올라가던 손.
하지만 천무진의 말대로 당율의 손이 향하는 곳은 그녀의 팔이 아니었다.
당소련의 상체를 지나 어깨 위까지 향하는 그 순간 그가 천천히 검지를 치켜세웠다.
당율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커다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천무진이 곧바로 그쪽으로 움직여서 그림을 치웠고, 그 뒤편에는 자그마한 문이 하나 감춰져 있었다.
천무진은 곧바로 문을 옆으로 밀었고, 이내 비밀 공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몇 권의 서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소련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설마 그건……?"
서책을 펼쳐서 안의 내용을 살핀 천무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금장전의 출입 명부군요."
대답을 듣는 순간 당소련이 놀란 듯 시선을 돌려 당율을 바라봤다.
눈조차 뜨지 못한 채로 죽어 가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금장전의 출입 명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사숙……."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당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는 이내 어렵사리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마침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툭.
그렇게 떨어져 내린 손을 당소련은 양손으로 꽉 감싸 안았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더욱 아려 왔다.
그렇게 당율의 손을 쥔 채로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이 천무진은 쓰러져 있는 흑의인을 향해 다가갔다.
걸어가는 도중 힐끔 쳐다본 바깥의 상황, 백아린 또한 이미 모두를 때려눕힌 채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흑의인의 바로 옆에 도착한 천무진이 엉망이 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대답해. 넌 알 거 아냐. 망혼초를 어디다가 쓰려고 한 건지."
"……그 독이 어디에 쓰일지 궁금한가? 하지만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늦었다고?"
"그래. 지금쯤이면 이미 망혼초가 우리의 목표물을 중독시켰을 거거든."
* * *
단엽은 오늘도 혼자였다.
최근의 일상처럼 그는 천룡성의 장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장소에서 혼자 무공 훈련에 열중했다.
이전에 한천이 준 조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단엽은 맨주먹으로 집채만 한 바위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쾅쾅!
쩍쩍 갈라졌던 바위들은 연달아 몰아치는 단엽의 주먹을 버텨 내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참 화풀이를 해 대던 단엽은 이내 주먹질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도 인근에 있는 바위들을 모두 박살 내 버린 상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걸음을 옮겼다.
흥분해서 날뛰다 보니 짐을 내려놓은 장소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반 각가량을 걸어서야 마침내 짐을 풀어 놓은 장소에 도착한 그가 옆에 있는 평평한 돌 위에 걸터앉았다.
단엽은 아무렇지 않게 옆에 놓인 수통을 들어 올렸다. 막힌 뚜껑을 뽑아 든 그가 수통을 입에 가져다 댔다.
벌컥벌컥.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던 단엽이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다 멈칫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입을 열었다.
"……물맛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