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실력 발휘 ― 뭐 하는 사람이야 (2)
사천당문의 금지인 금장전에 드나든 이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
몇 권이나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봐야 할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수십 년 전부터의 기록이니 예전 건 넘어가고 가장 최근의 걸 살폈다.
대략 백 일 가까운 시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금장전에 들어왔던 이는 단둘뿐이었다.
사천당문의 가주 당세종.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숙부이자 현재 당소련과 대립 중인 당문추였다.
물론 그 이전으로 시간을 넓힌다면 드나든 이는 더 있긴 했지만 그래 봤자 고작 한 명이 더 추가되는 것뿐이고, 그자가 금장전에 다녀간 건 무려 일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용의자는 한 명으로 압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문추, 바로 그자다.
병세가 약해져 누워 있는 당세종이 일을 꾸민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현재 당문추는 사천당문에 욕심을 내고 있는 상황, 당연히 외부의 누군가와 손을 잡았다면 오늘내일하는 당세종보다는 그가 범인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장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당소련이 화를 참기 힘들었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가문의 사람들을 죽인 것이 숙부님이었다니……."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당문추의 욕심 많은 성정을 알기에 이전에도 아주 잠깐 의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당소련은 그건 아닐 거라며 애써 생각을 돌렸다.
제아무리 욕심 많은 숙부라도 가문의 사람들까지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믿음이 있어서였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혈린만혼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의뢰를 맡겼던 당백은 당문추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친형제와도 같은 자였다.
그런 당백을 당문추가 죽였을 리는 없다 여겼거늘…….
함께 장부를 살펴보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이 장부의 내용대로라면 범인으로 의심되는 이는 당문추 하나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당소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숙부를 막아야겠어요. 더 이상 가문에 피해가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으니까요."
애초부터 반대편에 있었고, 계속해서 서로를 견제해 오던 관계. 허나 가족이었기에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켰고, 또한 최대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허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더는 예전처럼 무르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적의를 드러내는 당소련을 향해 백아린이 말했다.
"섣부르게 움직여선 안 돼요. 아쉽지만 이 정도로는 이 모든 일의 뒤에 그자가 있다는 걸 밝히기 어려워요."
당문추가 직접 혈린만혼산과 망혼초를 빼내 가는 걸 본 것도 아니고, 그 독을 이용해 뭔가를 했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다.
확실하지 않은 물증과,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심증. 이것만으로 무너트리기에는 당문추가 지금 사천당문 내에서 가진 힘이 너무도 컸다.
보다 확실하게 그가 범인이라는 걸 확인해야 했고, 그걸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도 얻어야만 했다.
당소련이 백아린을 향해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단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면 숙부는 한동안 몸을 사릴 거예요. 그럼 꼬리를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걱정스러운 그녀의 말투를 듣고만 있던 백아린이 말을 받았다.
"이번 기회에 몸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당장 숙부를 움직이게 할 방도가 없잖아요."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함정을 파는 거죠."
"함정?"
둘의 이야기를 한쪽에 서서 듣고만 있던 천무진이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백아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을 받았다.
"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백아린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 장부가 있는 비밀 장소를 가르쳐 주고는 곧바로 숨을 거둔 당율의 시체가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시신의 얼굴이 필요해요."
천무진은 곧바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인피면구를 말하는 거야?"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본떠서 만드는 가면. 그것이 바로 인피면구다.
개중 일부는 정말 가족조차도 판별해 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인피면구를 만들어 내는 장인도 있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큰 부상은 당했지만 살아 있다고 소문을 내는 거예요. 그럼 저분을 죽이려 했던 자는 또 다시금 움직일 수밖에 없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입을 열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 생각할 테니까."
"그럼 저희 중 한 명이 인피면구를 쓰고 상대를 유인하는 거죠. 만약 정말로 저희가 지금 의심하고 있는 당문추가 범인이라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아직 정확하게 작전을 구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상대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수가 바로 죽어 버린 당율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가 살아 있는 것만큼 이번 사건을 일으킨 자가 곤란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거기다가 죽이려 했던 당소련도 살아 있으니…….
백아린이 당소련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저 시신 가져가도 될까요? 시신을 훼손할 생각은 없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의 질문에 당소련은 잠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문 사람의 시신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 맘에 걸렸지만, 시신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말에 빠르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당소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릴게요."
* * *
결론을 내린 천무진과 백아린은 당율의 시신을 챙겨서 빠르게 이동했다. 늦은 밤이기도 했고,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움직였기에 두 사람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약속한 대로 당소련이 사천당문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걸 알리고, 당율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로 의식을 잃은 상태라는 헛소문도 낼 것이다.
이 모든 건 사전에 정해진 일들이었다.
거기다 백아린은 당소련에게 하나를 더 부탁했다.
금장전에서 사라졌던 독과 당문추와 뭔가 관계가 있을지에 대해 조금 더 조사를 해 달라 청한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일을 정한 채로 돌아온 거처.
시체를 비어 있는 창고에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오던 천무진과 백아린을 향해 누군가가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남윤이었다.
"작은 주인님!"
"무슨 일이야 영감."
다급해 보이는 표정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 걸 눈치챈 천무진이 물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윤이 상황을 설명했다.
"단 소협이 독에 당하신 모양입니다."
"독?"
"예, 그런데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해독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지라……."
"우선 가 보죠."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백아린이 서둘러 말했다. 그렇게 남윤의 안내를 받으며 천무진과 백아린은 곧바로 단엽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이내 단엽이 치료를 받고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 안에는 한천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나타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늦은 시간까지 두 분만 어딜 다녀오십니까?"
"놀다 왔겠어? 그나저나 단엽이 독에 당했다면서? 위독한 거야?"
백아린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방 한편에 있는 침상에 누워 있던 단엽이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나 여기 있다고."
남윤의 걱정스러웠던 말투와는 달리 단엽은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중독당한 독이 여전히 몸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천무진이 단엽을 향해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독에 중독당한 것도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싸움의 흔적들까지.
뭔가 일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했다.
천무진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여, 주인. 평소처럼 그냥 무공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가 먹을 물에 독을 탔더라고. 중독당한 상태에서 기습을 해 왔는데…… 보통 놈들은 아니었어."
"아는 놈들이야?"
"아니, 전혀.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수하들을 향해 구마대라고 외치는 걸 듣긴 했는데 전혀 본 적 없던 놈들이야."
구마대라는 이름을 듣자 천무진은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아냐는 듯한 그 눈빛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구마대라는 이름은 그녀 또한 처음이었다.
옆에 서 있던 한천이 말했다.
"저희 쪽 사람들한테 말해 놨으니 시신을 수습해 혹시나 신분을 알아낼 수 있는 자가 있는지 확인해서 연락해 올 겁니다, 대장."
"잘했어, 부총관."
두 사람이 짧게 대화를 끝내는 사이 천무진이 뒤따라 들어온 남윤에게 물었다.
"해독하기 어려워? 뭐 필요한 재료라도 있는 건가?"
"단 소협이 워낙 능력이 출중하셔서 독기를 내리누르고는 있지만 결국 해독약을 찾지 못하면 위독해지실 겁니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그런 독이 아니라서 해독약을 찾기가……."
큰일이 났다는 듯 걱정 가득한 남윤의 말을 듣고 있던 천무진은 이내 뭔가가 생각났는지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독 같은데?"
"제 생각도요."
둘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단엽이 중독당한 독이 사천당문에서 사라진 망혼초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천무진이 단엽을 향해 말했다.
"손 한번 보여 줘 봐."
"갑자기 손은 왜?"
"그냥 하라면 해 봐."
천무진의 말에 단엽은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천무진과 백아린은 내민 그의 손을 살피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큰 특이점은 없었지만 손톱 끝 아주 일부에 푸르스름한 색이 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당소련에게서 전해 들었던 망혼초에 중독당하면 생기는 현상과 같았다.
천무진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 서 있는 남윤을 향해 말했다.
"영감 걱정하지 마. 무슨 독인지 알고 있으니까. 아예 해독약을 가져다주지."
"가능하시겠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망혼초는 절정고수들조차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극독.
당한 것이 단엽이라 버티고 있는 것이지, 그처럼 뛰어난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천무진이 물었다.
"약을 가져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주인은 날 누구로 보는 거야. 나 단엽이라고. 이깟 독쯤이야 며칠은 너끈해."
단엽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한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휴, 하여튼 저놈의 자신감하고는. 곧 죽어도 괜찮다고 할 사람이라니까."
단엽이 목이 말랐는지 손으로 한쪽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천, 쫑알대지 말고 거기 있는 물이나 좀 줘. 나 환자라 움직이기 힘들어."
"으이구. 환자가 뭔 벼슬이라고……."
막 부려 먹는 단엽에게 불만스럽다는 듯 한천이 투덜거릴 때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백아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야 두 사람."
"뭐가요?"
막 물병을 가져다준 한천이 대꾸하자 백아린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을 받았다.
"아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둘 사이가 뭔가 미묘하게 달라졌는데."
누구에게나 농담을 던져 대는 한천이다.
분명 평소에도 단엽에게 되지 않는 장난을 걸어 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뭔가가 달랐다.
평상시에 단엽은 한천과 크게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말을 걸고, 서슴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왠지 둘 사이가 한층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백아린의 말에 한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희는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한천의 말투.
백아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대화가 길어지자 남윤이 방에서 나갔고, 그 이후에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백아린을 향해 다가갔다.
망혼초의 해독약을 구하기 위해서는 직접 사천당문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아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려 했던 천무진의 손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칫했다.
점점 굳어 가던 그의 표정이 이내 무섭게 돌변했다.
그런 천무진의 변화를 느껴서일까?
"왜 그래요?"
백아린이 고개를 돌려 물었을 때다.
천무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망혼초를 단엽한테 사용한 거지?"
"왜긴요. 그야 우리가……."
당연히 자신들이 거치적거리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을 이어 가려던 백아린의 입이 갑자기 닫혔다.
천무진과 같은 이유로 그녀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어 갔다.
두 사람이 이렇게 놀란 까닭은 그들이 단엽을 건드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신들은 정체를 감추기 위해 무림맹에서도 말단 무인의 신분으로 지내고 있다. 몇 가지 일을 하는 와중에 직접 움직인 적도 있지만 제대로 모습을 노출하지는 않았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단엽을 제거하려 했다.
왜 자신들이 쫓는 자들이 단엽을 제거하려 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단엽이 그들에게 방해가 됐으니까.
그들이 그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건 천무진의 명령에 따라 단엽이 벌인 일들을 알아 버렸다는 소리다.
적들이 단엽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곧…… 천무진에 대해서도 이미 알아차렸을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천무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조금씩 밀려들며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천무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찾는 그놈들이…… 우리를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