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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49화 (49/293)

49화. 인피면구 ― 도와줘 (1)

방에 홀로 자리한 천무진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쫓고 있는 그들과 연관된 자들이 단엽을 노렸다. 아직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단엽을 찾아낸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양휴를 잡아 온 그 일이다.

그게 아니고서는 단엽이 자신을 위해 나선 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관주 여청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그때 단엽의 존재가 드러났을 것 같진 않았다.

확률적으로 양휴의 일에서 그가 드러났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의 존재는? 그리고 자신이 천룡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고민이 길어졌고, 그만큼 천무진의 표정 또한 어두워져 갔다.

다시 주어진 한 번의 삶.

그랬기에 어떻게든 바꾸려고 했다. 그때의 지옥과도 같았던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처럼 움직이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참으로 우습다.

자신은 아직도 그들이 누군지 모르거늘, 오히려 그자들은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듯싶었다.

"하아."

깊어지는 한숨, 덩달아 지독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탁이 있어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고, 천무진의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 끝에 작은 경련과도 같은 움직임만이 천무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싶더니 이내 점점 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진은 눈동자를 돌려 그쪽에서 다가오는 이의 모습을 살폈다.

사라락.

흩날리는 옷자락, 그리고 조금씩 보이는 새하얀 턱.

그런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건 짙은 검은 안개였다.

천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꿈인 것인가, 아니면 환상이라도 보는 것일까?

허나 이내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꿈이면 어떻고, 환상이면 어떻단 말인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그토록 기억해 내고자 했던 그녀가 있는데.

봐야 한다.

저 얼굴을 봐야 했고, 기억해 내야 한다.

다가오는 새카만 어둠, 그리고 그 어둠에 휩싸인 한 여인의 입꼬리.

쇠사슬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천무진에게 그녀의 손이 다가왔다.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차가운 손과 함께 다시금 목소리가 울려왔다.

―부탁이 있어요. 해 줄 수 있죠?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검은 안개가 뒤덮여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천무진의 전신에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이 칼로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십수 년이 넘는 시간 겪어 왔던 모든 고통들이 한 번에 그를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신체의 모든 감각은 천무진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천무진은 가까스로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도…… 와줘."

진심이 담긴 그 중얼거림.

그때였다.

천무진의 세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요? 이봐요."

가볍게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천무진의 정신이 돌아왔다.

번쩍.

눈을 치켜뜨는 것과 동시에 천무진은 눈앞에 어떤 여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천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손은 천무진의 의지대로 정확하게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다.

파악!

매서울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손.

그렇지만 천무진의 손은 상대방의 손바닥에 의해 가까스로 막혔다. 천무진의 손에서 터져 나온 내력 때문인지 상대방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펄럭.

동시에 눈에 들어온 상대방의 얼굴.

여인의 정체는 백아린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천무진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막아 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꽤나 큰 부상을 입혔을 공격이었다.

허나 그런 그를 향해 오히려 백아린이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미안."

천무진이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말과 함께 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숨이 좀 쉬어졌다.

천무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이 땀 좀 봐."

백아린이 땀으로 범벅인 천무진의 얼굴에 자신의 소매를 가져다 댔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화들짝 놀란 듯 천무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백아린이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과 함께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녀가 말을 돌렸다.

"뭐 이렇게 식은땀을 많이 흘렸어요?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조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라 버렸네."

"그래도 잠꼬대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저 죽을 뻔했다고요."

붉게 변한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 주며 백아린이 괜히 엄살을 부렸다.

천무진은 무안했는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쪽이 왜 내 방에 있어? 들어오라고 한 기억이 없는데."

그의 물음에 백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마침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도와 달라고 했잖아요."

"……내가?"

"네, 잠꼬대긴 했지만 도와 달라고 너무 간절히 중얼거려서요.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제야 천무진은 자신이 꿈속에서 도와 달라고 중얼거리던 걸 기억해 냈다. 아마도 그 목소리를 듣고 백아린이 방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아, 할 말이 있어서 왔다며. 뭔데?"

"인피면구의 준비가 끝났어요. 움직여야죠."

적화신루의 도움으로 밤이 채 가기 전에 사천당문 당율의 인피면구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이걸 이용해 의심하고 있는 당문추를 끌어들이는 일만 남았다.

천무진이 말했다.

"무림맹 일은 어쩌지?"

"그쪽은 제가 가서 말할게요. 오늘부터 며칠 동안 나가지 않으셔도 되게요. 거기다가 저희 거처에 처분해야 할 놈들도 있고요."

백아린을 납치했던 사공량 패거리의 뒤처리도 부탁해야 했기에 그녀는 오늘 총군사와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그쪽은 부탁할게."

"네, 저도 뒤처리만 끝내고 곧바로 합류할게요."

"인피면구는 어디에 있어?"

"한천이 가지고 와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덕분에 인피면구도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었군. 여러모로 고마워."

"고맙긴요. 이게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백아린이 덤덤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적화신루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부분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이 여인이 있다는 것도.

사실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백아린의 도움이 컸다. 그녀의 뛰어난 머리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밝혀낸 덕분에 자신이 찾는 그들에 대해 보다 많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태가 좀 엉망이라 씻고 곧바로 갈게."

"그렇게 해요. 저는 집무실로 가 있을게요."

백아린이 답하자 천무진은 곧바로 방을 빠져나가 씻기 위해 움직였다. 홀로 남게 된 백아린의 시선이 방금 전 천무진이 앉아 있던 의자로 향했다.

이제는 기척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천무진이 멀어진 상황.

사실 천무진이 이런 이상한 모습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전에 창고로 찾아갔을 때, 그때도 천무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경련을 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돌을 찾아냈던 그날. 백아린은 천무진이 뭔가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둘러대는 그의 거짓말에 속은 척 넘어가 줬다.

그때부터 짐작했다.

이 사내가 천룡성이라는 이름을 업고 평탄하게만 자라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그녀가 빈 의자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 생각보다 아픔이 많네요."

* * *

한천이 가져다준 인피면구는 완벽했다.

인피면구를 만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이건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잘 보관된 것으로 만든 덕분에 상태도 양호했고, 제법 긴 시간 티가 나지 않는 것도 특징이었다.

열흘 정도는 너끈하게 속일 수 있을 거라는 말까지 듣고서야 천무진은 곧바로 사천당문으로 찾아갔다.

당소련이 미리 손을 써 둔 덕분에 천무진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오셨어요?"

죽립을 쓴 채로 방에 앉아 있던 천무진은 안으로 들어서는 당소련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권을 취해 보인 그를 향해 당소련이 다가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피면구는요?"

"준비됐습니다. 열흘 정도는 문제없다더군요."

말과 함께 천무진이 인피면구가 든 목각을 꺼내어 들었다.

금방 준비하겠다고는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인피면구를 가지고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당소련이다. 그랬기에 적화신루의 능력에 다시금 놀라면서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백아린을 찾는 것이었다.

"오늘은 혼자신가 봐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곧 합류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당소련이 이내 말했다.

"인피면구를 확인해 봐도 될까요?"

자신들이 속여야 할 상대는 다른 자도 아닌 당문추다. 그는 꽤나 치밀한 자로, 어쭙잖은 인피면구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천무진이 몸을 돌리고는 목각을 열었다. 안에 담긴 인피면구를 꺼내어 든 그가 천천히 그걸 얼굴에 가져다 댔다.

인피면구를 얼굴에 댄 채로 손가락을 이용해 가볍게 눌러대자 곧 딱 맞게 들러붙었다.

얼굴을 꼼꼼히 확인한 천무진이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여태까지 항상 죽립으로 감춰 뒀던 얼굴을 드러냈다.

툭.

죽립이 떨어지고 드러난 얼굴.

천무진을 마주한 상황에서 당소련이 탄성을 터트렸다.

"아……."

실로 놀라웠다.

마치 죽은 당율이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했다.

천무진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럼요.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군요."

어차피 길게 마주해야 할 상황은 없을 터.

잠깐 동안만 속여 주면 되니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인피면구를 쓴 천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사숙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말씀드렸던 대로 저희 쪽에서 잘 모시고 있습니다. 좋은 관에 모셨고, 내일쯤 원하시는 장소로 시신을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소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이번엔 천무진이 물었다.

"사천당문 내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야기된 대로 진행했어요. 누군가가 본가에 침투했고, 금장전의 관리자인 당율 사숙을 죽이려 했다고요.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하셨지만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라고도 알렸고요."

"그자가 움직일 것 같습니까?"

의심하고 있는 당문추에 대해 묻자 그녀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희의 예상이 맞다면…… 결코 그냥 있지는 못하겠죠. 당율 사숙이 어디까지 아는지도 모를 테니 아마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를 거예요."

당율이 아는 뭔가를 감추기 위해 그를 죽이려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니 그가 뭔가를 밝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다.

당소련이 재차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그냥 기다릴 생각인가요?"

"우선은 기다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자가 조심성이 커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불에 장작을 쏟아 넣을 생각입니다."

"무슨 뜻이죠?"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조급하게 만들겠다는 소립니다."

"그게 될까요?"

당소련의 물음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켕기는 게 많은 자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도 놀라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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