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십천야(十天夜) ― 맞구나 (2)
어딘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장소.
긴 곰방대를 물고 있는 휘장 너머의 인물은 날아든 보고를 들으며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당문추가 잡혔다고?"
"예, 일이 조금 번거로워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천무진 그놈 짓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이거 생각보다 귀찮게 하는군그래."
말을 내뱉는 정체불명 인물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들려오는 천무진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양휴를 감시하던 낙구를 죽였고, 무림맹에 심어 두었던 홍천관 관주 금호 또한 당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이번엔 사천당문까지.
거기다 천무진의 측근 중 하나인 단엽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던 구마대 또한 전멸했다.
자신의 계획대로였다면 구마대가 단엽을 제거하고, 사천당문 내 문제까지 해결한 뒤 돌아왔어야 할 터. 뭔가 계획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이내 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어느 정도의 반항은 이미 예상했던 바가 아니던가? 오히려 너무 쉽게 무너지면 그것 또한 이상할 터.
휘장 너머의 그자가 입을 열었다.
"꼴에 천룡성 놈이라고 반항이 꽤나 거세군그래."
"다행히 들통난 것이 당문추라 추가적인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꼬리야 잘라 버리면 그만이니까."
지금 입은 피해 정도야 어떻게든 메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계속해서 천무진이 날뛰며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건 분명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손을 써 둔 상태였으니까.
일전에 천무진에게 뭔가를 확인해야 한다며 언급한 십천야의 일인인 반조.
그가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테니까.
휘장 너머의 인물이 베개에 팔을 기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 * *
백아린과 한천이 떠난 거점은 무척이나 한산해졌다.
단엽은 다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까지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고, 천무진 또한 무림맹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총군사 위지겸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선적으로 사공량과 그를 도왔던 이들의 처분을 맡겼다.
창고의 한 곳에 며칠 동안 쓰러져 있던 그들을 마차에 실어서 곧바로 위지겸에게 넘겨준 것이다.
오대세가에 비해서는 많이 모자란다지만 사공량의 가문인 사공세가 또한 그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가문, 허나 이번 일은 맹주가 직접 나설 것이고 그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엄중한 처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납치하는 해선 안 될 짓을 벌인 걸로 모자라, 그 사실이 들통나자 살인까지 불사하려 했던 자.
정도의 길을 걷는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중죄를 지은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사공세가 또한 그 책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였다.
우선적으로 사공량의 처리가 끝나자 천무진은 거처에 있는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방건이 지내고 있는 방이었다.
슬쩍 방으로 들어섰거늘, 침상에 앉아 있는 방건은 멍하니 앉아 천무진이 온 것도 모르는 듯 보였다.
천무진이 벽을 손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어이."
"아,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지."
방건이 웃으며 대답했다.
금호에게 조종당하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그다.
이렇게 단기간 내에 회복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제법 좋은 약과 치료를 해 주며 회복에 신경 써 줬지만 아마도 무인으로서 회복하는 건 꽤나 긴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천무진이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지루하지?"
"어? 아, 아니. 산 것만 해도 어디냐."
아니라고 말은 해도 어찌 모를까.
몸 상태도 좋지 않긴 했지만 천룡성의 비밀 거점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방건은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바깥 공기조차 제대로 쐴 수 없으니 답답한 건 당연했다.
천무진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네가 지금 여기에 억지로 기거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특급 대우를 받고 있었어. 나머지들은 창고에 갇혀 있었거든. 막 한 무리는 처분하려 내보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던 거야?"
"두 무리가 더 있었지."
양휴, 그리고 방금 무림맹으로 보낸 사공량의 패거리까지. 이야기를 들은 방건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응? 그걸 내가 정할 수 있는 거야?"
말을 하는 방건은 슬쩍 천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 머물며 남는 건 시간뿐이었고, 덕분에 하루 종일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덩달아 방건은 많은 걸 알았다.
우선적으로 천무진이라는 사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의 아랫사람이라 여기며 대해 왔던 홍천관에서의 날들.
그렇지만 천무진은 금호를 아주 손쉽게 제압했고, 뭔가 알 수 없는 비밀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천무진 그는 자신은 알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세계, 바로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외부에 나갈 수 없게 해 둔 것 또한 이 장소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어 그럴 것이라고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토록 비밀이 많은 사내.
그런 그의 비밀 일부를 자신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별 볼 일 없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천무진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방건의 모습에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답했다.
"물론이지. 네 인생이니까."
천무진의 그 한마디에 방건은 자신도 모르게 덮고 있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천무진에게 고마운 감정이 치솟았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은 그 지하 공간이 마지막이었을 테니까.
천무진의 대답을 듣자 방건은 그간 고민해 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고향에 돌아갈까 싶다."
"산동에 있는 옥수문으로?"
"응, 아무래도 이 몸 상태로 무림맹 생활을 이어 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
눈치도 조금 없고 어수룩하기도 했지만 방건은 모자라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건 이미 충분히 알았다.
사실 오랫동안 고민했다.
무림맹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그에겐 어렵게 잡은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놓는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네 덕분이다, 무진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억해? 내 동생이랑 만났던 날."
방건의 질문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은 일인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소청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 방건과 그녀는 사이좋은 오누이었다.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방건이 말을 이었다.
"그때 내 동생이 물었잖아. 내가 훌륭한 무인이냐고. 그리고 넌 그렇다고 답해 줬지."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그 이후에 네가 나한테 해 준 말이 있었어. 소청이가 날 자랑스러워하는 건 내가 무림맹의 무인이라서가 아니라는 그 말. 자랑스러운 오라버니로 남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던 네 그 한마디 덕분에…… 난 지금 욕심을 버릴 수 있었거든."
무림맹의 무인으로 언제나 아끼는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오라비이고 싶었다.
하지만 천무진의 그 한마디 덕분에 이제는 안다.
진짜 자신이 자랑스러운 오라버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를.
방건이 입을 열었다.
"무진아."
"……왜?"
"동생이랑 같이 고향으로 가고 싶다. 그래도…… 되냐?"
말을 끝내고 천무진을 바라보는 방건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런 방건을 진지하게 마주하던 천무진이 이내 표정을 팍 구기며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몇 번을 말해. 네 뜻대로 하라고. 넌 이곳에 갇힌 인질이 아니라 내 손님이니까."
"자식, 고맙다."
말과 함께 방건은 주먹으로 천무진을 때리는 시늉만 하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한 대 툭 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이제 큰일 날 것 같으니 참으마."
"잘 생각했어. 방금 손을 든 순간부터 넌 죽을 위기에 처할 뻔했거든."
천무진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 방건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무진이 말했다.
"몸 관리 잘해. 네 동생한테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서 언제쯤 떠날 생각인지 확인하고, 일정에 맞춰 합류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줄 테니까."
"그래, 며칠만 더 신세지마."
대화를 끝낸 천무진이 몸을 돌려 방 밖으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무진아."
천무진은 자신을 부르는 방건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표정을 찡그리며 답했다.
"또 고맙다는 말 하면 알아서 해라."
만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해 대는 방건을 향해 천무진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 방건이 이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답했다.
"그래, 그럴게."
허나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귀에 딱지 지겠네."
천무진이 괜히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 * *
금호를 제거한 이후 무림맹에서 뭔가 얻어 낼 만한 걸 찾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홍천관에 나갔다.
홍천관의 관주였던 금호, 그리고 사천당문의 다음 가주 자리를 노렸던 당문추까지.
이 둘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찾는 그들의 힘은 이미 무림맹 곳곳에 퍼져 있을 것이 자명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뭐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낸 천무진은 사천당문과의 연락망을 가동해 당문추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 천무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었다.
무림맹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추가적으로 사천당문의 일까지 확인하니 귀가 시간은 절로 늦어졌다.
해가 지고도 한참은 지난 탓에 천무진이 걷는 길은 술에 취한 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기루와 객잔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불빛들로 가득했다. 성도와 도강언(都江堰)이라는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번화가였다.
도강언에서부터 이어진 물줄기 덕분인지 이 마을에는 커다란 배 위에서 즐기는 술자리가 유명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갔다.
어지러운 주변의 풍경 속에서 천무진은 홀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환영처럼 흩어져 갈 때였다.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형씨!"
자신을 부르는 건지 모르고 몇 걸음 더 나아가는 천무진을 향해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천룡."
이번은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 소리가 천무진의 귓가에 틀어박혔다.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는 이내 천무진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표정은 매섭게 변해 있었다.
천룡이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천무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척의 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 그 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노를 젓는 사공 하나와 자리에 앉은 채 홀로 술자리를 하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꽤나 젊었다. 기껏해야 서른 정도?
호리호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옷도 곱게 차려입은 것이 어디 서원에서 있을 법한 서생을 연상케 했다.
한 손에 든 섭선(摺扇:부채)과 술잔을 쥐고 있는 하얗고 긴 손가락까지.
허나 그런 자의 입에서…… 천룡이라는 말이 나왔다.
저자는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될 자신의 정체를.
천무진은 다리 아래쪽에 있는 배에 자리하고 있는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배 위에 자리한 사내.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다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무진을 응시했다.
씨익 웃는 그를 보며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누군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네가 타고 있는 그 배를 박살 내 버릴 테니까."
천무진이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사내가 질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아, 그건 좀 곤란한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꽤나 비싼 거거든."
"닥치고 내가 물은 질문에 답해. 너 누구냐."
천무진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했고,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사내 단 한 명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천무진의 물음에 사내가 답했다.
"어르신이 보내서 왔다."
"……어르신?"
그 말을 듣는 순간 천무진은 자신이 죽던 바로 그 순간이 기억이 났다. 그 당시 자신을 죽였던 정체불명 사내가 지껄였던 한마디가 말이다.
그는 말했었다.
"고작 이런 놈이 뭐가 무섭다고 어르신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자가 내뱉었던 단어, 어르신.
지금 그 말을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서 다시금 들었다. 물론 어르신이라는 말은 나이 있는 그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지만…….
천무진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자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그들과 관련된 자라는 걸. 거기다가 지금 나타난 이자는 여태까지 만나 왔던 그런 잔챙이와는 달랐다.
풍겨져 나오는 여유, 그리고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표정까지.
천무진이 이를 부드득 갈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찾는 그놈들이구나."
"내가 찾던……그놈들?"
이번엔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천무진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점점 환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참지 못하겠는지 그가 배를 움켜쥐고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실성을 했나."
말을 하며 천무진은 다리의 끝 부분에 가서 섰다. 당장이라도 아래에 있는 배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두를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때였다.
촤라락!
갑작스레 손에 쥔 섭선을 소리 나게 펼치는 행동에 천무진이 멈칫했다. 그 상태에서 사내가 위쪽에 있는 천무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참으로 궁금했거든. 지금의 네 삶이 몇 번째 것인지."
"……뭐?"
"그런데 이제는 알겠군."
술잔에 든 술을 탁 하고 입에 털어 넣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이번이 두 번째 목숨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