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59화 (59/293)

59화. 적화신루 ― 루주님을 뵙습니다 (3)

어교연은 총회의 흘러가는 이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아린의 부탁대로 주기적으로 열리는 총회가 그녀의 일정에 맞춰 진행된다는 것이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총회의 대부분은 모두가 오고 가기 편하도록 중원의 중심 지역에서 열리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곳을 관리하는 것이 백아린이었으니 실질적으로 큰 변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지금 적화신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천룡성과 관련된 의뢰다. 어쩌면 백아린의 말대로 그것에 맞춰 일정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다.

허나 어교연에겐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루주가 백아린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사실만이 기분 나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적화신루 내에서 내 지위가 점점 더 흔들릴 텐데…….’

현재 어교연이 가장 욕심을 내고 있는 건 몇 년 안에 공석이 될 삼총관의 자리였다. 현재 삼총관의 자리에 있는 이는 서원(徐洹)이라는 인물로, 어느덧 팔십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은퇴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흘러나왔고, 당연히 지위 상승을 노리는 어교연으로서는 가장 노리고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은퇴 얘기와 함께 추후 삼총관의 자리에 앉을 자들로 거론되는 이들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 바로 다음 순위인 백아린과 오총관인 조광건(趙廣建), 육총관인 어교연 정도가 손꼽히고 있었다.

허나 조광건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지 딱히 삼총관의 자리에 큰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교연으로서는 계속해서 백아린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빼어난 능력을 선보이며 신루 내에서 점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데, 루주의 신뢰까지 강하게 받고 있으니 어교연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삼총관이 되고 운이 좋다면 지금 있는 변방이 아닌 중앙 지역의 관리를 맡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자신의 힘이 적화신루 내에서 더욱 강해질 거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맞은편에 위치한 백아린을 조용히 노려봤다.

‘사사건건 내 앞길을 막는구나, 백아린.’

참기 힘들 정도의 불쾌함이 치밀었다.

허나 총관의 직책을 맡았을 정도로 어교연은 영특한 여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그 속내를 내비칠 정도로 어수룩한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열로도 그렇고, 인지도적인 부분에서 백아린이 한참 앞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삼총관의 자리가 백아린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

일발 역전을 할 힘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내 편을 만들어서 이 분위기를 역전시켜야 할 텐데.’

역시나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일총관인 진자양이다. 허나 그는 결코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진자양은 루주의 사람이고, 그 외에는 결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 중립적인 인물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한 사람.

바로 이총관 황균(黃鈞)이다.

일총관인 진자양에게 크게 밀리긴 하지만 실질적인 그다음 권력자. 꽤나 오랜 시간 적화신루에 몸담기도 했고, 세력 또한 제법 커서 같은 편이 된다면 엄청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다만 조심성이 많아 섣부르게 뭔가를 계획하고 주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황균을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를 움직일만한 타당한 뭔가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저 도와 달라는 어교연의 부탁 정도로 움직여 줄 인물은 분명 아니었다.

허나 어교연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이번 집회에 오기 전에 모든 계획들을 준비해 둔 탓이다.

삼총관이 물러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미적거리다가는 그나마 남은 기회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확실한 쐐기를 박아 둬야만 했다.

어교연이 총회가 언제 끝나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와중 일총관의 보고를 전부 전해 들은 루주가 자그마한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긴 보고에 모두가 지쳐 갈 그 무렵 들려온 종소리에 회의실 안에 자리한 이들의 시선이 휘장에 감춰져 있는 루주의 그림자로 향했다.

루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총회는 여기까지 하지. 먼 길 오느라 고생들 했어. 각자 일정들에 맞춰 조금 쉬다 갈 이들은 그렇게 하고, 아닌 이들은 바로 떠나도 좋아. 그럼 다음 총회에서 만나지. 일총관과 사총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도록 해."

루주의 명이 떨어지자 모두 동시에 포권을 취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이내 그들은 문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일총관뿐만이 아니라 사총관인 백아린까지 남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그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는 없었다.

이 같은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거의 매번 총회가 끝나면 루주는 진자양과 백아린에게 남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 또한 그때와 같았을 뿐이다.

어교연은 내심 그 사실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둘러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리번거리던 어교연의 눈에 황균의 모습이 잡혔다.

그의 나이는 오십 대 중반 정도였고, 외모는 가볍게 스쳐 지나가면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평범함 그 자체였다.

보통 키에 결코 두드러지지 않는 얼굴.

허나 이 사내가 어교연이 백아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할 존재였다.

그녀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총관님."

먼저 나섰던 황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쩍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 어교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균 또한 그녀를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맞았다.

"이게 누구시오. 육총관 아니십니까. 어찌 뵐 때마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과찬이세요."

말과 함께 황균에게 다가간 그녀가 슬쩍 뒤편에 있는 자신의 부총관인 경패에게 눈짓을 했다.

사전에 이야기를 해 둔 것이 있어서인지 성큼 다가온 경패가 황균의 아래에서 부총관 직을 맡고 있는 사내를 가볍게 잡아끌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황균의 부총관은 둘 사이에 뭔가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곧바로 경패를 따라 움직였다.

두 명의 부총관이 사라지는 걸 보며 황균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과 어교연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수하들을 물리면서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속내를 궁금해하던 찰나 어교연이 입을 열었다.

"혹 지금 시간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허어, 육총관님의 청인데 시간이 없더라도 만들어야지요."

넉살 좋게 대답한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가볍게 손짓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리로 가실까요?"

"안내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어제 일찍 도착한 탓에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던 황균이다. 그 때문에 총회가 열린 이곳 금황상단에서 방 하나를 배정받았었고, 그곳만큼 은밀히 대화를 나누기 좋은 장소도 없었다.

황균은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어교연과 함께 배정받았던 자신의 방으로 갔다.

적화신루 인물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마련된 방이었기에 비밀리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최적의 요소를 갖춘 곳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직후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 앉았다. 아쉽게도 뜨거운 차는 없었고, 식은 차만이 탁자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찻잔에 찻물을 따르던 황균이 물었다.

"혹 미지근한 차라도 괜찮다면 한잔하시겠습니까?"

"네, 마침 목이 탔는데 잘됐네요. 총회가 워낙 길잖아요."

"허허, 저희 적화신루가 요새 일복이 넘치지 않습니까. 다들 고생이지요."

적화신루가 원래 그리 작은 정보 단체는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욱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커 가고 있었다.

당연히 총회에서 주고받을 중요한 이야기들 또한 많아지고 있는 상황.

말을 끝내며 황균은 찻물을 가득 채운 찻잔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찻잔을 받아 든 어교연이 웃으며 말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총관님."

가볍게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던 그녀가 슬쩍 황균의 눈치를 살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교연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판단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삼총관님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으신 걸 잘 알고 계시지요?"

"허허, 벌써 그리되었나 봅니다. 거참, 정정하신 분인데 뭐 그리 빨리 손을 놓고 물러나시려는지, 원."

아쉽다는 듯 말을 하면서도 황균은 찻잔으로 슬쩍 입을 가렸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뭘 말하려고 하나 했더니…… 겨우 그 이야기였군.’

뭔가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자 하기에 그게 뭔지 내심 궁금했거늘 고작 삼총관에 관련된 이야기라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 또한 컸다.

사실 지금 어교연이 삼총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황균 정도 되는 인물이 모를 리가 없었다.

허나 그것은 어교연과 관련된 일일 뿐이다.

자신은 그 자리에 누가 앉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어교연의 말이 황균의 구미를 당기게 할 리가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시시한 이야기에 급속도로 관심이 식어 버린 황균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쉬시겠다는 분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든 건 순리대로 흐르겠지요. 그러니……."

"그냥 보고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십니까?"

도움을 청할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애초에 그럴 만한 분위기도 만들지 않으려 했고, 부탁을 해 온다 해도 정중하게 거절하려 했던 황균이다.

그런데 오히려 어교연이 자신에게 묻는다.

괜찮겠냐고.

어차피 삼총관의 자리를 놓고 벌어질 싸움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리가 없지 않은가.

황균의 물음에 이번에도 어교연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삼총관 자리에 오를 가장 유력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죠?"

"그거야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백아린이라는 이름을 내뱉으려던 황균이 잠시 입을 닫았다. 그 대답이 앞에 있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거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어교연 또한 황균이 방금 전에 말하려고 했던 이름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이미 짐작한 상황이었다.

분하지만 열에 아홉은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불리했기에 지금 어교연이 황균을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어교연이 그 답을 대신 말했다.

"아마도 백아린 총관이겠죠."

덤덤하니 말하는 어교연을 향해 황균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 총관께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뭡니까? 그녀가 삼총관이 되는 것이 나한테 무슨 피해라도 줄 거라 이 말입니까?"

어교연의 사정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황균이 알고 싶은 건 하나.

왜 그 일에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가 거론되냐는 거다.

그의 속내를 알기에 어교연은 천천히 준비해 두었던 패를 꺼내기 시작했다.

"삼총관의 자리만 놓고 본다면 분명 백 총관이 되든 말든 큰 상관이 없으시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녀의 욕심이 거기서 끝날까요?"

"끝이 아니라면 뭡니까?"

황균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지 제대로 말하라는 듯 따져 물었다. 다소 조급하게 변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준비해 온 말을 던졌다.

"삼총관의 자리에 오르면 그녀는 더 높은 자리를 노릴 테죠. 거기서 더 위면 뭐겠어요? 신루의 일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바로…… 일총관의 자리를 노리게 될 거예요."

"……뭐요?"

일총관의 자리를 노린다는 말에 황균의 표정이 처음으로 매섭게 변했다.

허나 그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황균이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백 총관의 능력이 뛰어난다 한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요. 당연히 진자양 일총관이 물러나시면 그 자리는 제게 와야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루주님의 생각 또한 같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애써 밀려드는 의심을 부정하려는 찰나, 어떻게든 그를 흔들어야 하는 어교연이 다시금 준비해 뒀던 말을 꺼냈다.

"물론 저야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이 분위기를 보세요."

어교연은 방금 전 자신이 들어온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루주님과 함께 있는 게 누구죠?"

"……."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황균은 움찔하고야 말았다.

말문이 막혔고,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어교연이 말했다.

"일총관님은 그렇다고 쳐요. 그렇지만 다른 한 명이 더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건 황균 총관님이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거기에 지금 누가 있죠?"

"……백 총관이 있지요."

"맞아요. 그게 무슨 의민지 아세요? 이미 루주님은 일총관님과 그녀를 동일 선상에 뒀다는 말이에요. 이 상황에서 새로운 일총관을 뽑아야 한다면 그게…… 누가 될까요?"

물어 오는 어교연의 질문에 황균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창백해진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어교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말이 먹혔어!’

의심이란 것이 그렇다.

한 번 시작을 하면 마치 지독한 악귀처럼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람을 괴롭힌다.

그랬기에 어교연은 잠시 그에게 의심을 할 시간을 주며 뜸을 들였다. 그의 불신이 점점 두려움으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잠깐의 시간. 허나 그 짧은 시간 동안 황균은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수백, 수천 번 던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어교연이 해야 하는 건 단 하나. 타오르기 시작한 그 의심이 걷잡을 수 없게 되도록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총관님은 혹시 휘장 너머 루주님의 진짜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이총관님은 본 적 없는 루주님의 진짜 얼굴. 과연…… 사총관도 본 적이 없을까요?"

쾅!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황균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의 손이 있었던 곳에 자리하고 있던 찻잔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찻물 또한 쏟아져 탁자 위를 흥건하게 적셨다.

대대로 적화신루의 루주들은 얼굴을 가린다.

그런 그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총관으로 국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적화신루의 루주가 다른 누군가에게 얼굴을 보여 줬다면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다른 그 상대에게 일총관이라는 직책을 주려고 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었다.

황균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망할! 어째서 루주님께서는 나보다 백 총관을 더 신용한단 말입니까!"

"능력도 이총관님께서 훨씬 앞서시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라면 답이 뭐겠어요? 가진 거라곤 그 반반한 몸뚱이 하나밖에 없으니 그걸로 루주님을 유혹했겠죠. 사내라면 혹할 미모니까요."

어교연은 같은 여인이면서도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을 꺼냈다.

그것도 아무런 증거조차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허나 흥분해 있는 황균에게 그건 충분히 먹혀들 만한 얘기였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동조하고 나섰다.

"그렇군!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자를 어찌 믿고 총관이라는 주요 직책을 맡기는가 싶었거늘…… 루주님의 여자였던 게로군요."

"그렇지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총관님께서는 지금 이런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한 것이고요."

으드득.

황균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씩씩거리던 그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화를 삭이며 물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습니까?"

일총관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 거라는 의심과 화에 집어삼켜져 있는 와중에서도 황균은 섣부르게 어교연을 돕겠다 말하지는 않았다.

평상시 조심스러운 그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어교연은 오히려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아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전 이총관님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저도 삼총관이 되고자 도를 넘는 방법까지 쓸 생각도 없고요. 다만 나중에 정말 필요하다면 그때 아주 조금만 힘을 빌려주시면 될 거예요."

마치 아무런 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으며 어교연은 애매하게 말을 넘겼다.

당장에 큰 것을 요구한다면 그의 성격상 위험 부담을 느끼고 발을 빼려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차라리 아주 조그마한 것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발을 담그게 만들 속셈인 것이다.

이미 더럽혀진 후에는 아무리 발을 빼려 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속셈도 모르고 황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총관은 실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시군요. 좋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지요."

들려오는 황균의 확답.

어교연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천만에요. 같은 식구끼리 다…… 돕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 * *

모두가 나간 총회장의 넓은 장소.

그곳에는 다섯 명의 인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과 한천, 그리고 일총관인 진자양과 그의 부총관이었다. 유일하게 진자양에게는 부총관이 둘이 있었지만 총회나 회의에 참석하는 건 대부분 한 사람이 도맡아서 진행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네 사람과 휘장 안쪽에 있는 적화신루의 루주까지 다섯.

넓은 회의장을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내부는 갑자기 한산해져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자양이 먼저 자신의 부총관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나가 보게.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누구도 반경 삼십 장 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통처럼 경비를 강화하고."

"알겠습니다, 총관님."

중년의 부총관이 짧게 예를 갖추더니 이내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이제 남은 이는 단 넷뿐이었다.

진자양의 시선이 백아린의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한천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오늘은 저도 전할 이야기가 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가? 알겠네. 그럼 자네는 남게."

진자양과 한천이 짧은 대화를 끝내자 휘장 너머에서 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나갔는가?"

"예,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말을 하며 진자양은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회의실에는 자신들만이 있었고, 인근에 다른 누군가의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붉은 휘장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 나갔다.

스르륵.

붉은 휘장을 걷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십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준수한 것이 여인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거기다가 희고 고운 손가락은 검보다는 붓이 어울릴 것만 같아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그 사내가 안에서 걸어 나왔고, 그는 이내 손가락을 들어 안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붉은 휘장을 옆에 있는 틈에 걸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감춰져 있던 휘장 너머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크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단 하나, 붉은색의 의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금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의자는 무척이나 값비싸 보였다. 이 의자는 적화신루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으로 오직 루주만이 앉을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황금색을 띠고 있는 의자의 옆면에는 대대로 루주의 자리에 앉았던 이들의 이름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그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주 특별한 글씨였다.

그 순간 사내가 휘장을 걷고 앞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천과 진자양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백아린만은 무릎 꿇지 않고 오히려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겹치려는 그 찰나.

스윽.

내뻗은 손이 마치 백아린을 안기라도 할 것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내가 몸을 돌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이게 무슨 광경인가 하고 기겁을 할 만한 상황.

그 순간 휘장 너머에서 나타난 사내의 시선이 의자의 옆면으로 향했고, 그곳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글씨가 아주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적화신루(赤花神樓) 십이대(十二代) 루주(樓主) 백아린(白娥燐)

털썩.

의자에 앉는 소리에 사내의 시선이 그곳에 자리한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붉은 의자에 몸을 실은 건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사총관으로 자리하고 있던 백아린이었다.

의자에 앉은 그녀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세 명의 사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진짜 총회를 시작해 볼까요?"

적화신루의 상징인 붉은 의자의 진정한 주인.

백아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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