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구천회(九天會) ― 그들의 세력권이야 (2)
자신의 말을 자르는 백아린의 행동에 당자윤은 잠시 불쾌함이 치밀었지만, 이내 그는 천무진의 어깨에 두른 손을 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실례했군요. 좀 아팠나?"
당자윤의 질문에 천무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다지."
손 치우라는 백아린의 한마디 덕분에 천무진의 표정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제대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당자윤의 얼굴을 보며 그나마 마음이 후련했고, 덕분에 감정을 추스를 여유가 생겼다.
천무진에게로 잠시 향했던 당자윤의 시선이 백아린에게로 움직였다.
"며칠 사이에 꽤나 친해지신 것 같군요."
"네, 맞아요."
백아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당자윤이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홍천관 소속이신 건 아시죠?"
"알아요. 그런데 그게 뭐 문제라도 되나요?"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백아린이 되묻자 당자윤은 함께 자리하고 있던 다른 이들을 향해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천무진과 백아린을 제외하고 같은 탁자에 자리하고 있던 세 사람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움직였다.
성격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당자윤과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을 주변에서 물린 이후에 당자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줄을 잘 서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드리려는 겁니다. 무림이라는 곳이 그렇거든요."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고 한들 코앞에서 내뱉은 소리, 무인이라면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애초에 이 말 자체가 백아린에게 한 것이면서도 천무진을 향한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너와 난 다르다.
당자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아린은 자신의 앞에서 한껏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무척이나 가소로웠다.
사천당문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 당자윤이라는 인물 자체가 무림에서 해낸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모든 원동력은 사천당문의 힘이었다.
물론 잠룡대 내에서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재능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허나 그건 그들 사이에서다.
무림은 넓고, 그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괴물들이 존재하곤 한다.
지금 당자윤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처럼.
자신이 옆에 있는 상대에게 십초지적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지금 저 자신감 가득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백아린은 내심 궁금했다.
백아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어느 줄에 설지 걱정하기 전에 눈치부터 좀 키워야겠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아린의 환한 미소에 잠시 넋을 잃었던 당자윤이었지만 이내 그녀의 뜻 모를 한마디가 신경이 쓰였는지 또렷한 눈빛을 되찾고 되물었다.
그리고 때마침 백아린의 시선에 뒤편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는 삼 조를 이끄는 조장 남궁격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녀가 그걸 이용해 말을 돌렸다.
"저희 조장님이 오셨거든요. 그쪽 자리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제야 뒤편으로 고개를 돌린 당자윤은 막 아래로 내려선 남궁격을 발견했다. 조금 더 이곳에서 백아린과 마주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다소 불쾌한 듯 짧게 혀를 찼다.
"쯧."
하지만 더는 이곳에서 자신의 힘자랑을 하고 있기엔 애매해졌다 여겼는지 당자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백아린을 향해 먼저 인사를 던졌다.
"그럼 소저 나중에 또 뵙지요."
백아린은 괜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댄 채로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당자윤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인의 이런 행동 하나에 기분 나쁜 티를 냈다가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속 좁은 사내로 보일 수도 있다 여긴 탓이다.
막 몸을 돌리던 당자윤이 이내 몸을 굽혀 천무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속삭였다.
"넌 이번 별동대 여정을 잘 즐기도록 하고. 임무를 나와 사고를 치고 싶진 않아서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지만…… 맹에 돌아가면 그때 두고 보자고."
말을 마친 그가 천무진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천무진은 곧바로 당자윤이 두드렸던 어깨를 마치 더러운 게 묻기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때 백아린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괜찮아요?』
『짜증은 좀 나지만 기분이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아.』
자신을 비웃던 상대.
하지만 그 상대와 수준 차이가 나도 너무 나 버리니 불쾌함이 밀려들 이유가 없었다.
그저 겁도 없이 까부는 하룻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은 가소로운 기분이었다.
허나 확실한 것 하나.
이번에 시비를 거는 건 막 홍천관에 들어갔던 당시 방건에게 당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거였다.
그래서 방건의 경우엔 오히려 천무진이 그를 도와주고 넘어가 주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천무진이 자신에게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며 덤덤하게 전음을 날렸다.
『아무래도 저놈은 그냥 못 넘어가겠네.』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인 천무진은 이내 백아린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마찬가지로 천무진을 바라봐 눈빛을 맞출 때였다.
천무진의 전음이 이어졌다.
『저 자식 당황하게 한마디 날려 준 거 고마워. 덕분에 기분을 좀 추슬렀거든.』
생각지도 못한 고맙다는 말에 백아린은 놀란 듯 천무진을 바라봤다.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 한마디는 뭔가 그 길을 벗어나 한 걸음 자신에게 다가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인지 백아린은 왠지 모를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감 가득한 어조로 전음을 보냈다.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계속해서 저 자식 속을 박박 긁어 줄 테니까. 저 그런 거 하나는 엄청 자신 있거든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백아린을 보며 천무진이 장난스럽게 전음을 날렸다.
『그거 알아? 지금 그 말 성격 엄청 나빠 보이는 거.』
그 한마디에 백아린이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요?』
* * *
객잔에서 하루를 머물고 삼 일 후.
쉼 없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동대는 아직도 귀주성의 삼분지 일조차 채 지나지 못하고 있었다.
귀주성으로 들어온 이후 별동대의 이동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잦은 비와, 높은 산들이 문제였다.
귀주성은 원래부터 맑은 날씨가 얼마 없을 정도로 우기도 길고, 흐린 날이 대부분이었다.
비로 인해 질퍽거리는 땅에다가 지형까지 좋지 못하니 말이 달리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무인들의 체력 소모 또한 심했다.
잠시 나무들 아래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챙겨 온 육포로 점심 식사를 대신하고 있는 그때, 단엽을 향해 이지강이 다가왔다.
"이보게."
"무슨 일입니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마찬가지로 육포를 우적거리던 단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가까이 다가온 이지강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산길을 따라 계속 움직이는 건 무리야. 차라리 관도로 이동하는 건 어떤가?"
"……흐음."
단엽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또한 예상치 못한 빗줄기 때문에 점점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사실 산길을 탐으로 인해 꽤나 먼 거리를 돌아서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빠른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산길을 타고 움직이는 이유는 바로 구천회 때문이다.
최대한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지 않고 움직이기 위해 산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 정도로 많은 무인들이 움직이는 상황이니 이미 그들의 정보망에 들켰을 확률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관도를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산길이 그나마 안전하다 판단했다.
제아무리 구천회가 사파에서 손꼽히는 세력이라고 해도 귀주성 전체를 틀어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마 안전한 길로 가고자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돌아서 움직이던 상황, 그렇지만 이렇게 시간이 길어진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데…….’
단엽이 쓰고 있는 죽립의 앞부분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곳은 구천회의 세력권입니다. 관도를 통한다면 다소 위험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겠는가. 지금 상황에서 원래의 일정대로 산을 타고 움직이면 너무 늦어 버리고 말아. 거기다 구천회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는 못할 터, 만약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이야기로 풀어 보면 될 게야."
말을 하는 이지강을 바라보며 단엽은 죽립 속으로 손을 넣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당신이 구천회를 몰라서 하는 말이지…….’
대화로 풀어 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상대다.
허나 말대로 무림맹의 무인들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건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부분이다.
천무진에게 의중을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이미 이런 결정에 대해서는 자신이 모두 위임받은 상태다.
스스로 나은 쪽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단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곳까지 온 상황에서 관도를 타고 움직이다 구천회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한 것이다.
어찌 보면 반반의 확률.
결국 단엽이 마음을 정했다.
"그럼 관도를 타고 움직이는 걸로 정합시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말머리를 돌리도록 하지."
굳어 있던 표정을 한결 풀며 이지강이 곧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단엽은 손에 쥐고 있던 육포를 다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중얼거렸다.
"끄응, 결정을 했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한데 말이야."
하지만 단엽은 애써 그 불안을 지웠다.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에라, 모르겠다. 만난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되겠지."
단엽은 육포를 모두 입 안에 욱여넣고는 곧바로 옆에 있는 말에 올라탔다.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 속도로 가다가는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음을 알기에 내린 결정.
지금으로선 그저 운이 좋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도로 방향을 바꾸고 달린 지 대략 두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르자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일행들은 여전히 거친 땅을 밟으며 내달렸다.
그래도 산길에 비해서 훨씬 달리기 용이한 관도를 따라 움직인 덕분인지 이동 속도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려 해시(亥時)가 될 무렵이 되어서야 별동대는 움직임을 멈췄다.
나무에 둘러싸여 혹시나 비가 와도 그나마 나을 만한 장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정에 잔뜩 지친 별동대의 무인들은 서둘러 천막을 쳤고, 이내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먹은 후 불침번 몇 명만을 제외하고 다들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단엽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천막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엎어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단엽,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손가락 끝이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단엽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에 취해 있던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잠이 다소 덜 깬 듯한 멍한 얼굴로 단엽이 중얼거렸다.
"아 왠지 기분이 더럽더라니……."
뜻 모를 말을 내뱉으며 단엽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옆에 놔뒀던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천막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막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멀리에서 날아드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단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노리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쒜엑!
퍽퍽퍽!
일부러 경고의 의미로 날린 것이 분명한 화살들 수십 개가 나무에 틀어박혔다.
단엽의 시선이 자연스레 인근에 박혀 있는 화살로 향했다. 그리고 그 화살의 뒷부분에는 특이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하얀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는 묘한 깃털.
그리고 단엽은 이 깃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전 중원을 뒤져서 이 같은 장식이 달린 화살을 사용하는 건 단 한 곳이었으니까.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에 불침번을 서던 무인들이 놀라 경고의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닌 이들은 그 전에 자리를 박차고 바깥으로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뭐야?"
"적이다! 상황에 대비하라!"
놀라 소리치는 별동대의 무인들을 뒤편에서 바라보며 단엽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길한 예상은 왜 항상 들어맞는 걸까?
단엽이 나무에 박힌 화살 하나를 뽑아 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구천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