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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68화 (68/293)

68화. 감금 ― 싸우자는 겁니까 (2)

일해야 될 시간이라는 천무진의 말에 단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곳까지 끌려온 지금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단엽이 자신을 가리키며 작게 물었다.

"지금?"

"여기서 백날 있을 거야? 어서 나가야지."

"아니, 그거야 당연한데 나한테 뭘……."

그걸 왜 자신한테 말하냐는 듯한 단엽의 반응.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백아린과 한천은 천무진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했다.

백아린이 곧장 벽에서 몸을 떼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갑자기 휙 가 버리는 백아린의 뒷모습을 단엽이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듯 슬쩍 단엽을 스쳐 지나가던 한천이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이내 오른손을 세워 보이며 짧게 말을 건넸다.

"수고."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의 행동에 단엽이 당황스러움을 채 감추지 못할 때였다.

그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만 모르는 거 같은 이 분위기는 뭐냐?’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지 단엽이 제 자리에 멀뚱히 서 있을 때였다.

이제부터는 주변으로 흘러 들어가면 안 될 말이었기에 천무진은 전음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왜 이렇게 서 있어? 시작하라니까.』

『아니 뭘 시작하라는 건데?』

『여기서 나가려면 네가 움직여야 할 거 아냐.』

『나?』

『여기가 어딘지 몰라?』

같이 끌려왔는데 이곳이 구천회의 분타인 걸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전혀 감도 못 잡겠다는 표정인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결국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사파인 구천회야. 여기서 누구의 말이 가장 먹히겠어?』

그 말을 듣고서야 단엽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무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고, 무림맹 무인들의 말이 이곳에서 제대로 먹힐 리는 만무하다.

허나 단엽은 다르다.

그가 누구인가?

사파를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인 대홍련의 부련주다.

단엽이 사파 쪽에서 지니는 위치나 힘은 상상 이상이었고, 천무진은 그걸 이용할 생각인 것이다.

사실 이 같은 계획을 오늘 바로 생각해 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목적지인 광서성으로 가는 길 인근의 세력들은 정파가 아닌 사파와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경우 단엽의 힘을 이용하고자 미리부터 계획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단엽이 속한 대홍련과 구천회의 사이는 썩 좋지 못했다.

허나 그랬기에 박대하기에는 더 어려운 사이라고 봐야 옳았다.

무림맹과는 무조건적인 적대 관계라 봐야 했지만 대홍련이라면 상황에 따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비록 어쩌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구천회의 무인들이 대홍련 부련주 단엽을 잡아 가둔 것으로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그들로서도 무척이나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대홍련의 입장에서도 결코 그냥 좌시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물론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단엽이 무림맹과 어떤 일을 함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실종된 고아들을 찾는다는 대의명분이 있다.

사파인 단엽이 도왔다고 해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명분이 서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임무를 끝낸 이후에나 알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전까지는 별동대의 진짜 임무 자체가 비밀이었으니까.

단엽이 물었다.

『나보고 지금 그들과 교섭이라도 하라는 거야?』

『이 상황을 가장 간단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건 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데. 더 좋은 다른 방법 있어? 그러면 이야기하고.』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천무진의 말을 들으니 분명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엽이 이렇게 머뭇거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뭔가 모양새가 나지 않았으니까.

대홍련의 부련주이자 엄청난 무위로 위명이 쟁쟁한 자신이 무림맹의 길 안내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구천회의 후계자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이게 무슨 웃음거리란 말인가.

그렇다고 천룡성의 무인에게 져서 그의 부하로 들어가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무인들의 세상.

그중에서도 유독 자존심이 강한 단엽이었기에 선택은 쉽지 않았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이었기에 단엽은 그저 낮은 신음만 토해 낼 뿐이었다.

"끄응."

신음 소리를 내는 그에게 천무진이 재차 전음을 날렸다.

『시간 없어. 바로 네 정체를 밝혀도 그걸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고, 또 상부에서 답변도 들어야 할 테니 서둘러야 그나마…….』

『신분 확인은 안 해도 될 거야.』

『왜?』

『이미 아는 얼굴이 하나 있어서. 방금 봤지? 그 심방이라는 영감.』

별동대를 잡아 온 고루혈괴 심방과 단엽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듯싶었다.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면인가 보군.』

『맞아.』

『다행이네. 시간이 꽤나 단축되겠어.』

『……다행인지는 모르겠네.』

『무슨 뜻이야?』

『사이가 안 좋거든.』

사실이기도 했지만 이걸 핑계 삼아 슬쩍 넘기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담아 던진 한마디. 그렇지만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전혀 거리낌 없이 전음을 날렸다.

『상관없어. 어차피 개인적인 일이 아닌 단체 대 단체로 얽힌 일이니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리될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천무진의 말에 단엽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단엽이다.

그랬기에 지금 이렇게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단엽이 투덜거렸다.

『젠장, 날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주인이 시키는 거니까 해 볼게.』

불편한 얼굴로 그가 연무장의 입구 쪽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단엽이 입구를 향해 나아가자 뒤편에 있던 다른 별동대 무인들이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곳은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마음대로 드나들어선 안 된다는 소리다.

이 조를 이끄는 아미파의 혜정이 서둘러 단엽을 막으려 하는 그때였다.

"내버려 두시오."

이지강이 그녀를 제지했다.

"허나……."

놀란 혜정이 이지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지강이 걱정 말라는 듯 말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갈 비책이 있어 움직이는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별문제 없을 터이니 그냥 두고 봅시다."

물론 이지강 또한 단엽이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무진이 방도가 있다 말했었고, 이곳 연무장 안에서 길 안내를 하던 단엽을 은밀히 부르는 것까지 확인했다.

이지강은 단엽의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천무진이 그를 따로 불렀고, 그 직후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걸 보아하니 천무진이 그에게 뭔가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뒤쪽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단엽이 입구로 다가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바로 바깥에 서 있던 무인들이 갑자기 문을 연 단엽을 매섭게 쏘아보며 들고 있던 창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차앙!

두 개의 창이 정확하게 길을 막았고, 다른 무인 몇몇이 이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그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오."

예의를 갖춘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강압적이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집어넣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단엽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슥 둘러봤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단엽을 향해 사내가 이를 갈며 재차 경고했다.

"내 말 안 들리시오? 분명 들어가라고……."

"아아, 됐고."

자신의 말을 자르는 단엽의 행동에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큰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최대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건 목숨에 관련해서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손을 봐 주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내가 이죽거렸다.

"여기가 무림맹인 걸로 착각하나 본데 이곳은 구천회고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길게 이야기할 기분 아니니까 빨리 가서 영감 좀 불러와."

"이 새끼가!"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창을 휘두르려 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단엽의 움직임이 빨랐다.

단엽의 손이 막 움직이려는 사내의 창을 움켜잡았다.

콰드득.

너무도 빠른 움직임.

놀란 사내가 서둘러 창을 빼내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이익!"

온 힘을 다 쏟아부은 탓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 정도였지만 놀랍게도 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내가 놀란 눈으로 단엽을 바라봤다.

죽립을 써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였지만, 창을 움켜쥐는 그 움직임 하나만으로 이미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신이 온 힘을 다 쏟아붓는데도 불구하고 창은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반대편에서 창을 움켜쥔 상대는 너무도 멀쩡했다.

‘이놈…… 엄청난 실력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변해 가는 순간, 단엽이 말을 이었다.

"내 말 못 들었어? 방금 여기서 나간 심 영감 불러오라고. 너희 지금 보고 안 하고 나한테 이러다가 나중에 윗선한테 된통 깨진다?"

단엽이 내뱉은 그 말에 사내는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맹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실력 또한 허투루 볼 수 없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자다.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물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자신은 심방에게 엄청 혼쭐이 나겠지만, 그냥 넘겼다가는 뭔가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에 사내가 결국 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사내가 물었다.

"뭐라고 전달드리면 되겠소? 아니면 당신 이름이라도 말해 주면 보고하겠소."

"……이름은 알려 주기 어렵고 그냥 내 얼굴 보면 알 테니까 그렇게 전달하면 될 거야."

이름도 알려 주지 못하겠다는 말에 사내는 다시금 고민했다.

허나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내는 경고 또한 잊지 않았다.

"당신의 부탁대로 해 드리겠소. 다만 그쪽이 지금 이 모든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자라면……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오."

"잔소리는 됐고 시키는 대로나 해."

가뜩이나 내키지 않는 일에 나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단엽은 짜증 난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휘 저었다.

사내가 옆에 있는 수하에게 가볍게 손짓했고, 이내 그에게 심방을 모셔 오라는 말을 전달했다.

명령을 받은 이가 헐레벌떡 사라진 직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연스레 연무장 안쪽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은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그렇게 단엽만이 홀로 연무장 입구에 선 채로 포위 된 상황에서 심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자 단엽은 지루한지 애꿎은 땅만 발로 푹푹 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약 이 각 정도가 흐른 후에야 멀리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엽이 기다리고 있던 상대, 심방이었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진득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걸 본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의 수장인 사내가 안색을 굳혔다.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인데…….’

뭔가 자신이 괜한 일을 벌인 건 아닌가 후회가 밀려드는 그 찰나, 마침내 심방이 지척에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기다렸던 상대가 온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땅만 툭툭 차 대고 있는 단엽을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

"날 보자고 한 것이 네놈이냐?"

심방은 자신을 오라 가라 한 상대를 보며 기가 차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갑작스러운 수하의 말에 무슨 헛소리냐 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선 이곳까지 걸음 한 그다. 그렇지만 멀리에서 입구 앞에 있는 상대를 보는 순간 절로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부른 그 상대가 무림맹의 길잡이나 하던 놈이라는 걸 눈치챘으니까.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심방이 평소 성격대로 막 폭발하려는 그 찰나, 단엽이 고개를 치켜들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을 슬쩍 들어 올렸다.

손까지 치켜 올렸던 심방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문까지 막혔다.

"……."

"오랜만이야 영감. 나 기억하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싶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재수 없는 얼굴을.

정말 꿈에서조차 잊어 본 적 없는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아직까지도 비만 오면 저자에게 당했던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린다.

구천회의 본거지가 있는 귀주성을 쩌렁쩌렁 울리던 고수 심방. 그런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것이 바로 저 사내였다.

대홍련의 부련주.

젊은 괴물 단엽.

생각지도 못하게 단엽과 마주한 심방은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과거 둘 사이의 개인적 일도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가 결국 어렵사리 첫 마디를 꺼냈다.

"왜…… 여기 계십니까?"

무림맹의 별동대를 잡아 왔는데, 그 안에 대홍련의 후계자가 있다니…… 실로 경악할 노릇이었다.

헌데 자신을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게 만든 당사자는 지금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단엽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쩌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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