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교섭 ― 어쩌시겠습니까 (2)
잠시 동안 구천회 분타에 갇혔던 무림맹 별동대는 단엽의 활약 덕분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빠르게 구천회의 지역을 벗어나는 조건으로 무림맹이 있는 사천으로 쫓겨나는 상황 또한 피할 수 있었다. 덕분에 별동대는 큰 시간 낭비 없이 다시금 예정된 목적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수월하게 그곳을 빠져나온 사실에 이 조를 이끄는 혜정과, 삼 조의 남궁격이 궁금하다는 듯 방법을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 없는 단엽은 애매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다행히 옆에서 이지강이 단엽을 도운 덕분에 혜정과 남궁격은 결국 그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겨 둬야만 했다.
그렇게 별동대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지를 운남성 쪽으로 알고 있는 상황,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어느새 운남성과는 조금 틀어져 있다는 사실을.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난 후라면 뭔가 이상하다 느끼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그때면 자신들의 진짜 목적지인 광서성에 들어서고도 한참은 지난 후일 게다.
점점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지금.
무림맹에서 나온 지도 제법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흐르는 지금 별동대 내부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 노릇을 하려는 이가 생기고 있다는 거다.
나이가 많은 이들로 구성된 일 조와는 달리 이 조와, 삼 조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레 그 안에서 몇몇 이들이 두각을 드러냈고, 또한 그런 모습을 기반으로 점점 발언권을 높여 갔다.
그리고 당연히 그 선두에 있는 인물은 사천당문의 당자윤이었다.
사천당문이라는 든든한 배경과 잠룡대에 들어갈 정도의 재능을 지닌 그는 자연스레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처럼 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당자윤을 받쳐 주는 것이 바로 같은 잠룡대 소속인 단목운뢰였다.
당자윤이나 단목운뢰 모두 이 조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삼 조에 있는 젊은 무인들에게까지 닿고 있었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당자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많은 이들이 그의 눈치를 봤고, 자연스레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허나 당자윤은 이 같은 상황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무림맹 잠룡대에서도 언제나 이처럼 사람을 몰고 다녔던 그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위에 서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당자윤이다. 당연히 지금 별동대 내에서 흐르는 이 기류를 모를 리가 없다.
분명 그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저 새끼가 자꾸 눈에 걸린단 말이지.’
당자윤의 시선에 들어오는 건 천무진이었다.
밤이 늦었고 별동대의 인원들은 쉬기 위해 야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바삐 천막을 치고 있는 천무진을 바라보는 당자윤의 시선은 차가웠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고작 홍천관 소속 무인이다. 거기다 가문 또한 제대로 들어 본 기억조차 없는 그런 하찮은 곳이었다.
그에게 느끼는 게 싫은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고작 저딴 놈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평소 당자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하찮은 놈들은 그저 가볍게 한번 짓밟아 주고 그 이후로는 쉽사리 기억에서 지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저놈은 아니다.
별거 아닌 놈인데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고, 눈에 들어온다.
왤까? 도대체 왜 자꾸 자신은 저놈을 바라보게 되는 걸까?
그때 천무진의 옆으로 백아린이 다가갔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춘 채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 사실 사내라면 누구도 혹할 정도의 저런 미녀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당자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저 여인과 친해 보여서 싫은 걸까?
아니, 분명 그건 아니었다.
백아린에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건 사내로서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뒀을 때 가지는 정도였을 뿐, 집착을 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 있지는 않았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천무진이 눈에 걸리기 시작한 건 두 사람이 어울리기도 전이었다. 그 말은 곧 적어도 자신이 저놈을 싫어하게 된 이유가 백아린이라는 여인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서 있던 당자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천무진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힐끔 당자윤을 바라본 천무진은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이 하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당자윤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군."
며칠 동안 했던 고민의 답.
시선을 마주하는 그 순간 알았다.
왜 저놈이 계속 걸렸었는지를.
저 눈빛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전혀 굽히지 않는 저 눈빛. 저것이 여태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기분을 건드렸던 것이 분명했다.
당자윤과 마주한 사람들이 가지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맞추는 이들, 빠르게 굽히고 들어오는 이들.
시선을 맞추는 이들은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명문정파의 무인이거나, 높은 위치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실력을 인정받은 무인들도 이곳에 포함된다.
반면 그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은 모두 당자윤 앞에서 본인을 낮추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헌데 천무진은 아니었다.
분명 자격이 없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똑바로 마주한다. 당자윤은 여태까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불쾌했던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그 기분을 풀 일만 남았다.
이제는 잦은 야영으로 인해 익숙해진 탓인지,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밤을 보낼 간단한 천막들이 곳곳에 자리했고, 식사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되어졌다.
천막은 비바람이나 가릴 정도로 간단하게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자리했다.
천무진 또한 삼 조에 속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천막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라고 해서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고, 고깃덩어리들이 들어 있는 국에 주먹만 한 감자를 하나씩 받아서 먹는 정도였다.
막 천무진이 속한 천막 내부에서 식사가 시작되었을 무렵 입구를 통해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당자윤과, 항상 그의 옆에 붙어 다니는 단목운뢰였다.
두 사람의 등장에 밥을 먹던 세 명의 사내들이 황급히 젓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윤아 여긴 왜……."
당자윤과 조금의 인연이 있는 사내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낼 때였다. 당자윤이 세 사람에게 가볍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저기 있는 저 녀석한테 용무가 있어서 온 거니까 나머지는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주지."
부탁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그런 말투에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자는 아쉽게도 이 안에 없었다. 세 사람은 식사하던 걸 멈춘 채로 허겁지겁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그렇게 원래 이곳에 있던 다른 이들을 내보낸 당자윤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함께 동행한 단목운뢰는 천막의 입구 쪽에 선 채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당자윤이 천무진의 맞은편에 소리 나게 주저앉았다.
털썩.
그가 입을 열었다.
"무진."
관심 없다는 듯 식사를 하던 천무진은 그제야 당자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시선으로 쥐고 있던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모습에 당자윤은 왈칵 화가 치솟았다.
팍!
휘두른 그의 손이 천무진이 쥐고 있던 감자를 쳐 냈다.
천무진이 말했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알고 있습니다. 듣고 있었으니까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하는 천무진의 말투에 당자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입을 열었다.
"너 뭘 믿고 이렇게 건방져?"
"건방진 건 제가 아닌 거 같은데……."
말을 하며 천무진은 한쪽에 나뒹굴고 있는 감자를 힐끔 바라봤다.
딱히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타나서 행패를 부려 대는 그가 더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걸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전혀 굽히지 않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당자윤이 결국 앉은 자세로 천무진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덥석.
뻗어진 당자윤의 손이 천무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너와 내 입장이 같다 생각해? 난 당자윤이고, 넌 아무것도 아닌 놈이야."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을 불어넣으며 당자윤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찮은 놈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뭔지 알아? 넙죽 엎드리는 거야. 능력도 배경도 없는 놈이 살아가는 방법은 그거뿐이거든."
천무진은 숨기지 않고 적의를 드러내는 당자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특유의 아집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사내다.
얼굴로 향했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으로 움직였다.
숨도 못 쉬게 만들겠다는 듯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지만…….
당자윤은 몰랐다.
천무진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이 손 하나 영영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다급한 단목운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 자윤아!"
허나 그의 다급한 부름에 응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어이! 뭣들 하는 거야?"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나타난 건 죽립을 눌러쓴 단엽이었다.
단엽의 등장에 천무진의 멱살을 쥐고 있던 당자윤은 이를 부득 갈며 손을 풀었다.
저번엔 백아린이 막아 주더니, 이번에도 또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다.
‘망할, 이번엔 고작 길 안내나 하는 놈이 날 방해하고 있군.’
이번 별동대 임무를 위해 특별히 선별된 자라 들었다. 분명 그 신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항상 별동대를 이끄는 수장인 이지강과 붙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이지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던 당자윤이 천무진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항상 운이 좋네. 하지만 운이라는 건 결국 언젠가 다하기 마련이지. 그 건방진 낯짝 오래가긴 힘들 거라는 건 알아 두라고."
말을 마친 당자윤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아무렇지 않게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단엽이 성큼 다가왔다.
"주인. 뭐야 저 새낀?"
물어보는 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천무진은 방금 전까지 멱살을 잡혔던 옷깃의 주름을 풀며 대답했다.
"뭐긴. 호랑이 앞에서 짖는 개지."
애초에 천무진의 천막 인근에 있었던 단엽이다. 자연스레 안에서 주고받았던 모든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거기다 직접 눈으로 본 멱살을 쥔 상황까지.
"망할 새끼가 어디서 까불고 있어. 확 담가 버릴까 보다."
단엽이 이를 갈았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 줬던 천무진이다.
그런 그에게 함부로 대하는 놈이 고작 저런 자라는 사실에 단엽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화를 토해 내는 단엽과 달리 천무진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냉정한 눈빛.
허나 그랬기에 오히려 더욱 섬뜩했다.
마치 마음속으로 한 자루의 칼을 가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둬. 저놈은 내가 손봐 줄 생각이거든."
* * *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났다.
별동대 무인들 중에서 제법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하나둘씩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귀주성을 뚫고 오는 길을 탔으니 결국 운남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가 지는 서쪽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런데 별동대는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남쪽으로만 움직였다.
심지어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방향을 튼 기색까지 보이고 있었다. 운남성과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내부에서 뭔가 조금씩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걸 눈치챈 이지강은 결국 쉬기 위해 말을 멈춘 사이 모두를 소집시켰다.
육십 명에 달하는 별동대 무인들이 모두 모였고, 이지강이 앞으로 나섰다.
"할 말들이 있으니 다들 집중하도록."
갑작스러운 소집에 무슨 일이냐며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적막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이지강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모두 우리가 지금까지 운남성으로 향하고 있다 알고들 있었을 거다."
너무도 당연한 말에 별동대 무인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감도 오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순간 이지강이 별동대 무인들이 놀라 당황할 만큼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허나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운남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이 조의 조장 역할을 맡고 있는 아미파의 혜정조차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지금 자신이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닫았다.
"이유가 있어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기에 모두를 속였다. 이 부분은 맹주님을 대신하여 별동대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내가 사과의 뜻을 전한다."
이지강은 말과 함께 깊게 포권을 취했다.
맹주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애초부터 별동대의 목적지는 새외 세력과의 마찰이 있는 운남이 아니었던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혜정이 물었다.
"새외 세력과의 문제를 알아보러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번 임무는 전혀 다른 일일세. 그랬기에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고."
"그럼 저희의 진짜 목적지는 어딥니까?"
혜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그건 다른 별동대의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수십 쌍의 시선을 느끼며 이지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 광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