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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78화 (78/293)

78화. 춘몽(春夢) ― 다행이네 (2)

계약은 없던 걸로 하자는 천무진의 말에 두예진이 이를 갈며 답했다.

"계약이고 나발이고, 손에 든 그 물건부터 내놔. 찢어 죽여 버리기 전에."

"말투가 왜 그래? 어제랑 완전히 다른데."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웠던 어제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머리끝까지 한껏 화가 치밀어 오른 독사 한 마리가 이곳에 있었다.

놀리는 듯한 천무진의 말투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를 갈던 두예진은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얼굴에 더욱 짙은 분노가 감돌았다.

"그래, 네놈이었구나. 이 모든 일의 원흉."

"뭐야 이제 안 건가? 그 정도는 나를 보자마자 눈치챘어야지. 머리가 좀 별론가 봐."

"닥쳐! 어디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 네놈이 어떻게 우리를 알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하게 해 주마."

말과 함께 두예진이 수하들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했다. 애초에 일대일 대결 따위 해 줄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상대는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고수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런 자와 굳이 싸워 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적은 하나였고, 이쪽은 열 명이 넘었다.

합공으로 서둘러 끝내고, 장부를 회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슬슬 옆으로 움직이며 포위해 오는 상대방의 모습에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협공을 할 생각인가 보군."

"그럼 친절하게 포권부터 취하면서 비무라도 해 줄 줄 알았어?"

이죽거리는 두예진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벌였다.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갑자기 위쪽으로 휙 집어 던진 것이다.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나무 상자를 보며 두예진과 그녀의 수하들이 다급히 자리를 잡았다. 떨어지는 그 나무 상자를 받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탁.

나무 사이에서 뻗어져 나온 누군가의 손이 허공을 날고 있는 상자를 잡아챘다.

엉거주춤 자세를 잡고 있던 두예진은 얼결에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리고야 말았다.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돌려주는 줄 알았나 봐? 꿈도 크네."

"이 새끼가 정말!"

바로 그때였다.

투두둑.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몇 개의 신형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곳에 있는 것은 천무진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편으로 백아린과 단엽, 한천 세 사람 모두가 가볍게 착지해 섰다.

나무 상자를 들고 있던 단엽이 툴툴거렸다.

"이봐 주인. 이런 거 던질 거면 미리 신호라도 주라고. 멋없이 놓칠 뻔했잖아."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 대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두예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뭐지 이놈들?’

이렇게 지척에 다른 이들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천무진이 나타나던 그 순간에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의 존재를 몰랐던 그녀다.

‘설마…….’

뭔가를 깨닫는 순간 두예진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일부러 우릴 놔준 거였어?"

무림맹의 무인들이 모르는 뒷길로 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오히려 숨기고 있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길을 열어 두었던 것이다. 함정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가장 치부가 담겨 있는 장부가 있는 이곳까지 스스로 오게 된 꼴이 돼 버렸다.

두예진의 질문에 숨길 이유가 없다 생각한 천무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일부러 열어 놓은 길인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도망치던데. 우리는 조용히 그 뒤를 쫓았고, 그 결과 이런 선물을 내 손에 안겨 주더군."

단엽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나무 상자를 휙 하고 천무진에게 던졌다.

탁.

가볍게 나무 상자를 돌려받은 천무진이 비웃듯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무진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예진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천무진이 말했다.

"자, 그럼 받을 것도 받았으니 슬슬 정리해 볼까? 별동대가 오기까지 그리 긴 여유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천무진의 말이 끝나자 백아린이 기다렸다는 듯 옆에 봇짐을 내려놓았다.

쿵.

커다란 봇짐을 바닥에 세운 그녀가 그사이에서 삐죽하게 튀어나온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스윽.

백아린이 오랜만에 뽑아 든 대검을 어깨 위에 가볍게 짊어진 채로 말했다.

"좋아요. 오랜만에 칼춤 한 번 추죠 뭐."

자신만만한 그녀의 목소리에 뒤이어 한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냥 항복하면 안 됩니까? 전 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허나 뱉어 내는 말과는 달리 한천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단엽이 피식 웃으며 한천의 말을 받았다.

"맘에도 없는 소리 하긴. 저런 놈들은 개박살을 내 줘야 제맛이지. 어이, 미리 말하는데 항복하지마라. 항복해도 똑같이 패 줄 거니까."

뭘 하든 박살을 내 버리겠다는 단엽의 한마디는 선전 포고였다.

"……."

그들을 바라보는 두예진의 눈빛을 싸늘했다.

뭐하는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저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

두예진의 손이 상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촤르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긴 채찍이었다. 두예진은 평소 허리춤에 이 붉은색의 채찍을 감고 다녔다.

고아원의 원장 흉내를 내느라 보이지 않게 감춰 두고 지낸 것이다.

몸이라도 푸는 것처럼 두예진이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채찍이 향하는 장소에 있던 돌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터져 나갔다.

파앙!

커다란 바위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으로 모자라 산산조각이 나는 걸 보며 한천이 무섭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으으, 맞으면 아프겠다."

"그러니까 안 맞겠다는 소리네?"

옆에서 훅 들어오는 단엽의 말에 한천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답했다.

"정답."

자신이 무기를 꺼내 들고 동시에 적당한 살기와 위력까지 뽐냈거늘 상대는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수다를 이어 가는 모습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애송이들이 감히 어디서 까불어!"

고함 소리와 함께 그녀의 내력이 채찍에 실린 채로 휘둘러졌다. 순간적으로 강기가 휩싸인 채찍이 마치 용의 꼬리가 된 것처럼 사방으로 요동쳤다.

쿠카카카캉! 콰앙!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긴 채찍에 휩싸인 강기가 휘몰아쳤다. 전방으로 십여 장 정도 되는 공간에 있던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적사편십칠로(赤蛇鞭十七路).

붉은 뱀을 연상케 하는 채찍을 휘두르는 그녀의 독문무공이었다. 순식간에 열일곱 개의 방위를 점하며 휘몰아치는 폭발적인 위력의 강기를 쏟아 내는 특징을 지녔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순식간에 변한 주변 광경.

그것만으로도 이 무공의 파괴력이 얼마나 지독한지 말해 주는 듯싶었다.

폭발적인 힘을 보여 준 우두머리의 모습에 추경과 수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대단하……."

추경이 절로 감탄성을 터트리고 있는 그때.

두예진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두예진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추경이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온다!"

버럭 소리를 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채찍이 다시금 움직였다.

휘리릭.

하지만 그사이를 뚫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단엽이 달려들고 있었다.

파앙!

어느새 권갑을 찬 그의 주먹이 얼굴을 노리고 다가왔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두예진은 채찍이 감싸여진 손등으로 날아드는 주먹을 받아 냈다.

내공으로 호신강기까지 불러일으켜 놨던 상황.

하지만 그 충격은 호신강기 너머까지 전해져 왔다.

"꺼윽."

비명과 함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밀려나는 몸을 지탱하는 그때였다.

달빛을 가르며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통을 채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서둘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한 자루의 대검.

분명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묵직한 풍압이 두예진에게 밀려들었다.

허공에서 몇 바퀴나 회전하던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무릎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두예진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편에 있던 수하들.

그들이 있던 공간이 떨어져 내리는 대검으로 인해 아예 박살이 나 버렸다. 멀쩡한 건 고작 추경을 포함해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땅에 박혀 버린 사람 크기만 한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뽑아드는 백아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막혔다.

‘생긴 거랑 다르게 뭐 이런…….’

하늘하늘하고 바람만 불어도 꺾일 것 같은 여인.

헌데 지금 상대에게서 풍겨 오는 분위기는 그런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박력이 아니었다.

놀란 건 단엽도 마찬가지였다.

백아린이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단엽이다. 그저 천무진에게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전해 들었는데…… 이건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이 아니었다.

단엽이 백아린을 향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장난 아닌데?"

단엽의 감탄 가득한 목소리에 백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벌써 놀라기엔 좀 이른데. 아직 보여 줄 게 많거든."

"그래? 이거 기대 좀 되는데."

단엽은 문득 천무진을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지면 따르겠다는 약속을 해서이기도 했고, 강한 이들과 쉼 없이 싸우게 해 주겠다는 제안도 구미가 당겼다.

뭐 아직 그렇게 만족스러운 싸움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재미있는 녀석 둘을 발견한 것만큼은 큰 수확이었다.

무인으로 뿐만이 아니라, 대홍련의 부련주로서도.

‘적화신루라…… 주의해야겠는데.’

적화신루를 앞으로 주의 깊게 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두 사람의 무위는 단엽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때마침 뒤편에서 단엽을 감탄하게 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천이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오지 마!"

두예진이 서둘러 상대를 향해 채찍을 마구 휘둘러 댔다.

휙휙휙!

흥분하여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녀는 실력 있는 무인이었다. 당황한 와중에서도 날카롭고 정확한 공격을 펼쳤다.

슥슥.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채찍을 한천은 가볍게 상체를 움직이는 정도만으로 피해 냈다.

순간적으로 십여 회에 달하는 공격이 쏟아졌지만, 그 모든 걸 그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모두 피해 낸 것이다.

덕분에 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검집에 들어가 있던 한천의 검이 뽑혀져 나왔다.

사악!

달빛을 가르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기가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두예진은 황급히 자신의 채찍을 휘두르며 날아드는 검기를 받아쳤다.

하지만 모든 걸 막아 내기는 역부족이었는지 틈을 파고들어 간 검기가 옆구리에 긴 상처를 내고 사라졌다.

"으윽!"

그나마 그녀는 상황이 나았다.

뒤편으로 날아든 검기가 남아 있던 세 명의 수하들마저도 휩쓸어 버렸으니까.

몇 개의 검기가 갑자기 폭발하듯 늘어나며 주변에 있던 그들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추경과 나머지 수하들 모두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놀란 두예진이 더듬거렸다.

"저, 전부 피해 내다니 대체……."

"아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맞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말이죠."

한천은 맞아 주기 정말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도 다른 세 사람.

그렇지만 그 제각각이 특유의 방식으로 자신과, 수하들을 휩쓸어 버렸다.

아직 두예진이 버티고 서 있긴 했지만, 사실 이 싸움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수하들은 모두 쓰러졌고 그녀 또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자신이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그런 상대가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있으니, 이 싸움의 결과야 뻔했다.

바로 그 순간 이 싸움에 끼지 않았던 유일한 한 사람 천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장부가 든 나무 상자를 든 채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두예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천무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상자 열지 마! 안에 내용을 보는 순간 여기에 있는 모두가 죽을 거다."

"협박인가?"

"아니, 협박이 아니야. 오히려 너를 위해 해 주는 말이지."

"우리가 서로를 걱정해 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네놈이 걱정돼서 해 주는 말이 아니야. 그래야 우리도 피해가 적으니까. 그래서 하는 제안이야. 그걸 보게 되면 너희가 누구든 죽을 거다. 하지만 반대로 여기서 멈춘다면…… 모두가 살아."

단엽에게 첫 일격을 당했을 때 당했던 내상 때문인지 말을 하는 두예진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천무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두예진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그 상자 안에 있는 장부의 내용을 절대 보지 말라고.

보게 되면 결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 두예진의 눈빛을 보며 천무진이 천천히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장부를 꺼내어 들었다. 움찔하는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핀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라 이거군."

"지금도 늦지 않았어. 여기서 멈추면 돼. 그 장부에서 손 떼고……."

간절하게 말하는 두예진을 바라보던 천무진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걸렸다.

그 미소가 너무 불안했기에 그녀는 눈동자를 치켜떴다.

"너, 너 설마……."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때 천무진이 아무렇지 않게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두예진이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펼친 서책을 가볍게 쥐고 흔들며 천무진이 말했다.

"어쩌지? 이미 봐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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