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사해도 ― 저 안에 숨지 (1)
금황상단은 이곳 남양 인근에서 알아주는 상단이었다. 그들은 꽤나 큰 규모를 지녔고, 특히나 수로를 통해 벌어들이는 부가 막대했다.
스무 척에 달하는 상단의 배를 통해 먼 곳까지 거래를 튼 그들은 주기적으로 거래를 하기 위해 출항했다.
특히나 비밀리에 진행하는 흑마련과의 거래는 꽤나 잦은 편이었다. 식자재와 필수품 모두를 지원하는 만큼 닷새 정도로 시간 차를 두고 주기적으로 배를 보냈다.
남양에서 흑마련이 있는 사해도까지의 거리는 배를 타고 하루하고 반나절이 조금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있는 사해도로 향하는 배편.
배를 책임지는 수장인 임우라는 사내가 수하들을 향해 빠르게 손짓했다.
"어이, 짐들 확인 끝냈어?"
"그럼요. 이미 한참 전에 끝났습니다. 이제 선적만 하면 됩니다."
금황상단은 본거지가 남양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모든 짐을 나루터와 가까운 창고에 모은다. 그리고 그 짐들을 다시금 배에 나눠서 담는 걸로 준비를 끝낸다.
선적만 하면 된다는 말에 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럼 서둘러서들 마무리하자고. 오늘은 평소보다 짐이 더 많으니 빼먹지들 말고 실어."
"알겠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명령만 내리는 임우의 모습이 불만이긴 했지만 배의 수장인 그의 지시는 절대적이었다.
결국 그렇게 짐을 나를 이들만 분주히 움직였다.
많은 배들이 움직이는 거점답게 남양의 나루터는 시끌벅적했다. 거기다 오늘 이곳에서 떠나는 금황상단의 배만 해도 무려 십여 척에 달했다.
물론 그중에 사해도로 향하는 배는 단 한 척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사해도가 아닌 다른 곳들과의 거래를 위해 움직일 예정이다.
비밀스러운 거래를 감추기 위해 사해도에 배를 보낼 때마다 다른 곳에도 함께 물건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덕분에 아직까지 금황상단이 흑마련과 거래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늘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열 척의 선박.
그 선박을 몸을 감춘 채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천무진 일행이었다.
숨어서 배를 바라보던 중 백아린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저 배가 전부 들어가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맞아. 단 한 척만 사해도로 향하지."
"겨우 한 척이요?"
그냥 아무 배에나 무턱대고 타기엔 확률이 너무 낮다.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차린 천무진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사해도에 들어가는 배에는 표식이 있거든."
"표식이요?"
"응, 아무리 금황상단의 배라고 해도 그들은 허가받은 배만을 출입시키지. 그리고 그 표식은 바로 저 돛대 끝을 보면 되고."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돛대들은 크게 특별난 건 없어 보였다. 그랬기에 뭐가 다른지 찾기 위해 하나씩 확인하던 백아린은 마침내 차이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어?"
일반적인 돛대의 모양과는 다른 배 한 척이 있었다.
그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조금 휜 정도여서, 어떻게 보면 크게 다를 거 없다 생각할 만큼 미미한 수준이다.
거기다가 그 휜 부분에는 사과만 한 크기의 붉은 무늬가 새겨져 있어, 확실히 다른 배와 구분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이 확신하듯 말했다.
"저 배군요."
"맞아."
"그럼 저희는 어떻게든 저 배에 잠입해야 한다 그 말이고요."
"그렇지. 순순히 우릴 태워 주지는 않을 테니까."
이처럼 비밀리에 흑마련과 거래를 이어오는 금황상단이다. 사해도까지 배를 태워 달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단엽이 물었다.
"주인, 잠입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 이후에는 어쩔 건데?"
사람이 없는 틈을 이용한다면 배에 숨어드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배가 바다로 출항한 이후에도 그들의 눈을 계속해서 피해야 했으니까.
도망칠 곳이 없는 배 위에서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짐 사이에 숨어 있는다 해도 결국 들통이 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해도에 도착하자마자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고 있던 흑마련과 곧바로 전면전에 들어가게 될 공산이 컸으니까.
물어 오는 단엽의 질문에 천무진이 손가락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거 뭐?"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짐을 싣고 있는 일꾼의 모습이 보였다. 단엽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설마 짐꾼이라도 되자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곧바로 외부인인 게 들통날 텐데. 그거 말고 짐 이야기야. 저 안에 숨자고."
"아, 뭐야 그 소리였어?"
그제야 단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의 말대로 배에는 꽤나 큰 나무 상자들이 잔뜩 옮겨지고 있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안에 몸을 감추는 것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천이 입을 열었다.
"괜찮은 생각 같은데요. 어차피 도착해서 옮기기 전까지는 굳이 짐 상자를 열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맞아. 우리는 눈치를 보다 중간에 빠져나오면 되고."
천무진은 배에 실리는 짐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짐들이 실리는 걸 숨어서 바라보던 천무진 일행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배에 실어야 할 짐들을 모두 옮긴 일꾼들이 수장인 임우의 명령을 듣기 위해 모두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기회를 엿보던 천무진이 빠르게 말했다.
"지금이야. 가자."
말과 함께 천무진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나머지 세 사람들 또한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휙.
순식간에 배 근처로 다가간 천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난간 너머로 날아올랐다. 먼저 배 위에 올라선 천무진은 주변을 살폈다.
이미 뛰어오르기 전부터 확인한 터라 인근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긴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뒤이어 백아린과 한천, 단엽이 배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네 사람은 곧바로 배에 있는 내부 공간으로 움직였다. 닫혀 있던 문을 조심스레 연 천무진이 안으로 들어섰다.
창 하나도 나 있지 않은 탓에 내부는 꽤나 어두웠다. 그렇지만 무인인 이들에게 이 정도 어둠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곧장 창고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쪽에 있는 상자에 몸을 감추려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만약의 상황이 벌어져도 그것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테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손질 된 고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여긴 도저히 안 되겠네."
하루가 넘는 시간을 숨어 있어야 할 장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 숨어 있기에는 비위가 상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근처의 상자를 뒤지던 한천은 이내 그나마 괜찮은 나무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배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뭐…….’
한천은 배추의 일부를 들어 옆에 있는 나무 상자에 넣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도 좀 모자랐는지 손바닥으로 배추를 강하게 내려쳤다.
팍팍!
몇 번의 주먹질로 배추의 일부가 으깨졌다.
그렇게 억지로 공간을 만든 한천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만 빼 놓은 채로 배추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한천이 이내 깨달았는지 입을 열었다.
"저기, 대장."
"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찬가지로 숨을 만한 상자를 찾던 백아린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배추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한천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뚜껑 좀 닫아 주시죠. 그걸 생각을 못 했네요."
"하아."
그녀가 작은 한숨과 함께 옆에 있는 뚜껑으로 한천이 들어가 있던 상자의 위를 가려 줬고,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대장. 그럼 나중에 뵙죠."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막 몸을 돌리던 그때 이번엔 또 다른 쪽에서 단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나도 좀 부탁할게."
감자 더미에 몸을 감춘 단엽이 손만 번쩍 들어 올린 채로 말하고 있었다. 감자 더미 사이에서 손만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 괴기스럽게까지 보였지만…….
결국 백아린은 단엽이 숨어 있는 상자의 뚜껑까지 닫아 줘야만 했다.
그렇게 막 두 사람이 숨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닫아 준 그녀가 자신이 은신할 장소를 찾으려 하는 바로 그때였다.
"각자 자리로들 가! 출항이다!"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자신들이 숨어 있는 창고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아린은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까지 자신이 숨을 상자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탓이다. 상자의 숫자는 제법 되었지만 그 내부에 있는 물건에 따라 숨기 어려운 장소도 있었다.
백아린은 우선 천으로 아예 돌돌 감아서 대검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기 어려워 보이는 자신의 무기를 구석에 있는 짐 더미 사이에 던져 놨다.
이걸 짊어진 채로는 어떠한 상자에도 들어가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확인된 상자가…….’
안에 든 것이 뭔지 확인하고, 또 공간을 만들어 낼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백아린은 빠르게 선택을 내렸다.
그리 내키진 않지만 아까 전에 봤던 고기들이 가득 담겨 있는 상자에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녀가 막 고기가 든 상자를 열어젖히려는 그때였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백아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천무진이 있었다.
그가 백아린을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왜 자신을 부르는 건가 하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 천무진이 괜히 자신을 부를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나무 상자 안에 몸을 감추고 있던 천무진이 자신이 있는 이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그제야 천무진의 생각을 알아차린 백아린이 움찔했다. 급히 만든 공간이다 보니 내부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순간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천무진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빨리!』
백아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는 나무 상자 안에 들어갔다.
천무진은 그 즉시 손에 쥐고 있던 뚜껑으로 위를 덮었다.
뚜껑이 덮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창고의 문이 열렸다.
덜컹.
안으로 들어선 두 명의 인물들은 창고 내부를 걸어 다니며 손가락으로 상자의 개수를 확인하면서 필요 없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백아린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가득했으니까.
두근두근.
좁은 공간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면서 백아린은 얼결에 천무진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좁은 공간에서 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분을 꾸욱 눌렀다.
‘왜 이렇게 난리니. 조용히 좀 해. 이 사람이 다 듣겠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상체를 밀착한 상황.
백아린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뛰는 자신의 심장에게 괜한 화를 쏟아 냈다.
제발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이고 간절히 소리쳤지만, 아쉽게도 널뛰기 시작한 심장은 주인인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의 얼굴을 천무진이 보기 어려운 상태라는 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당장에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백아린은 지금 자신의 모습에 심히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미칠 듯이 뛰는 심장과 화끈거리는 얼굴까지.
‘대체 왜 이러지?’
살면서 처음 느끼는 묘한 감정에 그녀는 평소의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자신의 품 안에서 백아린이 꿈틀거리는 걸 느껴서일까?
천무진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왜 그래? 불편해?』
『……아뇨. 전혀요.』
백아린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지금으로선 그저 상자를 나갈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배가 가볍게 흔들렸다.
배가 나루터를 떠나 출항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배는 서서히 남양을 떠나 목적지인 사해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