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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82화 (82/293)

82화. 사해도 ― 저 안에 숨지 (2)

배가 출항을 하고 곧바로 다른 상자로 옮겨 가기로 마음먹었던 백아린의 계획은 생각처럼 빠르게 실행되지 못했다.

계속해서 창고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몇 명의 보초들이 있어서다.

그 덕분에 약 두 시진 가까이를 천무진에게 거의 안겨 있다시피 했던 그녀는 식사를 하기 위해 보초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서야 간신히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녹초가 되어 새로운 상자로 기어 들어갔다.

가만히 숨어 있기만 했을 뿐이거늘, 적들에게 둘러싸여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보다 더욱 기력을 소진한 기분이다.

그렇게 상자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얼마의 시간을 보낸 걸까. 백아린의 귓가로 외부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종종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은 그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서두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와, 점점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지는 배의 움직임까지.

백아린은 배가 자신들의 목적지 인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좌우로 흔들던 그녀는 이내 눈을 부릅떴다. 무려 하루 이상을 이렇게 멍하니 보내 버렸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

이제부터는 멍하니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곳은 흑마신이 있는 사해도였으니까. 배를 정박시키기 위해 창고 내부에 있던 보초들도 모두 바깥으로 나갔을 때였다.

나무 상자 안에 있던 천무진이 그 안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자 바깥으로 나온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나갈 준비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세 개의 나무 상자의 뚜껑이 밀리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 뚜껑을 닫은 천무진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배가 정박하기 전에 뒤편으로 빠져나가야 해. 그 이후에 움직이면 흑마련의 놈들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정면으로 나갔다가는 걸리지 않을까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 오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걱정 말라는 듯 뒤편을 가리켰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물건을 뺄 만한 뒷문이 하나 있어. 저쪽이라면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가능할 거야. 시간이 없으니 우선 움직이지."

"그러죠."

정박을 한 이후라면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기에 속도를 내야 했다. 한천은 가만히 서 있는 백아린을 향해 말했다.

"뭐합니까, 대장?"

"어?"

"무기 챙기셔야죠."

"아…… 그러게."

백아린은 황급히 옆에 던져 놓았던 천에 돌돌 감싸인 대검을 챙겨 등에 짊어졌다. 그러고는 이내 먼저 움직이는 천무진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창고 뒤편으로 간 천무진의 손이 가볍게 벽면을 어루만졌다.

‘분명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예전의 기억을 더듬던 천무진은 결국 자신이 찾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벽면으로 보였던 곳이 슬쩍 밀렸고, 이내 그곳을 통해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순간적으로 창고 내부를 가득 채웠다.

뒤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곧장 내 뒤를 쫓아와."

말을 마친 천무진은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 배의 아래로 몸을 던졌다.

퐁.

경신술을 이용해 물에 빠지니 그 소리가 무척이나 작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던 단엽 역시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둘이 뛰어들자 백아린과 한천 또한 곧장 그쪽으로 움직였다. 난간을 가볍게 박차며 아래로 몸을 날린 두 사람의 몸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싸아아아.

밀려 나가는 파도.

그 안에서 천무진 일행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천무진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고는 어딘가를 향해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의 뒤를 나머지 세 사람은 무작정 따랐다. 그렇게 네 명이 움직이는 사이 도착한 배는 선착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네 명은 선착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천무진은 몇 차례 슬쩍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확인하면서 헤엄을 치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딘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백아린이 의아한 듯 천무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기 와 본 적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 이곳은…….’

처음부터 사해도가 이들의 거점이라는 확신을 했고, 이내 금황상단의 배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도 알았다. 거기다 배에 있는 자그마한 뒷문까지 꿰고 있는 걸로 모자라 이곳의 지형을 아는 듯한 모습까지.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고 스스로를 비웃던 그 무렵 마침내 천무진이 멈췄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다름 아닌 수직으로 깎아진 듯한 절벽과 마주하고 있는 장소였다.

물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그는 나머지 일행들 모두가 물속에서 나오자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절벽을 타고 움직이면 돼. 이쪽은 별 감시가 없을 테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천무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절벽의 툭 튀어나온 돌을 움켜쥔 채로 힘껏 몸을 위로 당겼다.

그의 몸이 빠르게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높이가 꽤나 됐고, 경사 또한 가팔랐지만 천무진의 몸은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절벽을 타고 오른 그가 제일 위쪽에 이르자 가볍게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해도의 곳곳이 보일 정도로 높은 지형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도 그랬지만, 그냥 길목 또한 험난해서 쉽사리 오고 갈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단엽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휘유, 대체 여길 어떻게 안 거야?"

이곳 사해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단코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사해도가 얼마나 폐쇄적인 곳인지 잘 아는 단엽으로서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뭐 우연히."

천무진은 가볍게 말을 흘렸다.

뒤이어 올라온 백아린과 한천 또한 굳이 천무진이 왜 그런 절벽을 오르는 걸 택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주변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좋으면서도, 반대로 자신들의 모습은 최대한 숨길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녔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도 아니니 이렇게 비밀리에 잠입하기에 무척이나 좋았다.

천무진이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나와 한천만 움직이는 걸로 하지."

젖은 머리카락을 짜고 있던 백아린이 물었다.

"둘만요?"

"당장은 싸우기보다 먼저 알아내야 할 게 있잖아."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지 않은 건 싸움이 보다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욱 큰 이유는 아이들이었다.

이곳으로 넘겨졌을 고아들의 행방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그리고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지금처럼 외부에서 온 금황상단의 인원들과, 이곳에 있는 흑마련의 인물들이 뒤섞인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잘만 이용하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내부를 어느 정도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금황상단의 인원들에게는 흑마련 소속인 척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또 그에 맞춰 행동하는 식으로 말이다.

천무진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내부로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기에 두 사람은 안 맞아. 우선적으로 단엽은 얼굴이 알려졌을 수 있어."

대홍련의 부련주인 단엽이다. 거기다가 운남성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다.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본 이가 있을 위험이 분명 존재한다.

백아린은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저 외모는 이곳에서 큰 문제를 야기하기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천무진이 백아린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쪽은 얼굴이 너무 눈에 튀어. 그러니까 우선 두 사람은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나와 한천 둘만 저 무리에 섞이는 걸로 하지."

"저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한천 또한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린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어디서든 눈에 띌 저 외모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아쉬워하던 백아린은 한천까지 이리 나오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저희 둘은 이곳에서 대기하죠.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시면 신호탄을 쏴요. 저희가 어떻게든 도우러 갈 테니까."

말과 함께 백아린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막대기 모양의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아래쪽에 충격을 가하면 붉은 실처럼 얇은 폭죽이 쏘아지는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을 건네받으며 천무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지. 은밀하게 잠시 염탐하는 거라 이것까지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을 마친 그가 한천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가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곧바로 가파른 산길을 타고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이고 흑마련 소속의 무인으로 보이는 이들과 조우했지만, 먼저 기척을 숨긴 채로 몸을 감춘 덕분에 산 아래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 어떠한 소란도 생기지 않았다.

곧바로 흑마련의 본거지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천무진은 일부러 배가 들어선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배에서 내려진 물건을 하나 들고 무리에 뒤섞였다.

천무진과 마찬가지로 한천 또한 짐을 든 채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애초부터 들어온 짐을 옮기기 위해 금황상단의 일꾼들과, 흑마련의 무인들이 함께 물건을 나르고 있던 상황.

둘의 모습은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너무도 간단하게 무리들 사이에 스며든 채로 둘은 앞에서 걸어가는 이의 뒤를 묵묵히 쫓았다.

앞에 있는 이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걷던 천무진의 눈에 이내 익숙한 곳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흑마련의 본거지였다.

커다란 벽이 마치 성벽처럼 길을 막고 있었고, 그 입구와 위쪽은 수많은 무인들이 서서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비밀리에 들어간다는 것이 꽤나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천무진과 한천은 사람들에 섞여 흑마련의 본거지 안으로 수월하게 들어설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직후 주변을 둘러보던 한천의 감탄 어린 전음이 날아들었다.

『우와, 여기 생각보다 더 엄청나네요.』

커다란 성벽도 그랬지만 내부 또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곳곳에는 높은 성루가 자리하여 혹시 모를 외부인의 침입을 감시했고, 또한 겹겹이 쌓여 있는 외벽들은 이곳을 마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놀라는 한천을 향해 천무진이 답했다.

『놀라긴 아직 일러. 여긴 겨우 입구에 불과하거든.』

『허허, 돈들을 어지간히 벌었나 봅니다. 이런 거점도 다 있고.』

『시답지 않은 소리는 됐고.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면 어디에 있을 것 같아?』

『당연히……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안쪽이겠죠.』

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인체에 뭔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건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오늘 이곳에 온 금황상단 같은 이들에게도.

당연히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장 깊숙한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외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고, 안에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

‘안쪽까지 몰래 잠입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외부를 먼저 수색하며 뭔가 단서를 찾아볼 생각이긴 하지만 최악의 경우 안쪽까지 들어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천무진이 생각했던 상대편 쪽 사람인 척하며 속이는 건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그 상황이 오게 되면 작전을 변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후의 일에 대해 고민을 하며 발을 옮기던 천무진의 감각 안으로 갑자기 묘한 그리움과 강렬함이 밀려들었다.

움찔.

천무진은 불현듯 강력하게 받은 이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섰다.

옆에서 걷던 한천이 슬쩍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허나 천무진은 한천의 전음에 대답하지 않고 직접 입을 열며 중얼거렸다.

"이 느낌은……."

그 말과 함께 천무진은 홀린 듯 갑자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란 듯 한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나 천무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몇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에 아주 멀리 떨어진 단상 위에 자리한 하나의 물건이 들어왔다.

그 단상의 주변으로는 붉은 끈이 둘러져 있어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상의 위에는 마치 신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다.

천무진은 그 바위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츠츠츠츠!

수십 장 이상 떨어진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 있었다.

이 울음소리, 그리고 이 느낌까지도.

천무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 바위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커다란 바위를 관통한 채로 자리하고 있는 검의 손잡이. 그것이 바로 천무진의 시선을 꽉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천무진에게 저 검 손잡이는 너무도 익숙했으니까.

검은 색의 손잡이.

그리고 그 손잡이에 새겨진 붉은 악귀의 형상.

저번 삶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옆을 지켜 주었던 칠신기(七神器) 중 하나.

‘네가 왜 여기에…….’

천무진의 검, 천인혼(千人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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