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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85화 (85/293)

85화. 흑마신 ― 이제야 안 거야 (1)

천무진은 곧바로 들고 있던 아이의 시신을 전각 뒤편 한쪽에 눕혔다.

싸움의 여파로 시신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서다.

여전히 전각 위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흑마신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내려올 이유가 전혀 없다 여기는 듯싶었다.

지금 정면에서 다가오는 이백이 넘는 무인.

거기다가 그 안에는 흑마련을 대표하는 흑사귀들 또한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무진은 자신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흑마신을 금방 이 아래로 끌어내릴 자신이.

다가오는 흑마련 무인들을 향해 성큼 나아가던 천무진이 검에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슈아아앙.

‘너희는 운이 없었어.’

천룡성의 무공은 일대일의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일대다의 대결에서 보이는 파괴력 역시 대단했으니까.

마치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걸 위에서 바라보고 있던 흑마신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그 순간 천무진의 검이 움직였다.

스윽.

선을 긋듯 허공을 가르는 천무진의 검을 따라 꽃잎이 나부꼈다. 일전에 사천당문의 암살자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때 사용했던 무공, 천룡비공 무수화(無數花)였다.

꽃잎이 주변을 뒤덮다시피 공간을 장악한 순간 그 모든 것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순식간에 인근에 있던 무인들이 폭발에 휘말리며 나뒹굴었다. 공간마저도 일그러지는 파괴적인 일격.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너무도 놀라운 공격에 수십에 달하는 무인들이 나가떨어졌고, 그사이 천무진이 직접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빛을 쏟아 냈다.

샥샥!

움직임에 맞춰 춤추기 시작한 검기가 주변으로 커다란 원형의 기운을 만드는 듯싶더니, 이내 강렬한 폭발로 돌변했다.

쿠카카캉!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서둘러 뒤편으로 물러났지만, 뒤늦은 이들의 팔다리가 잘려져 나갔다.

"으악!"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피가 흩뿌려졌고, 그사이에 있던 천무진의 검이 달려들던 상대를 향해 움직였다.

슥.

검이 목을 베고 지나쳐 갔고, 동시에 회전하며 뒤편에서 다가오던 상대의 가슴팍을 맹수처럼 찢어발겼다.

거칠게 뿜어져 나간 검기는 뒤편에 있던 이들의 몸마저도 갈라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무위에 당황하며 물러섰던 흑사귀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이 동시에 천무진을 덮쳐 왔다.

천무진은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드는 그들의 무기를 쳐 냈다.

카카캉!

철퇴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천무진의 어깨 부분을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비어 버린 이귀의 옆을 향해 천무진이 검을 내뻗었다.

하지만 상대들 또한 그대로 당하지는 않았다.

날아드는 천무진의 검을 사귀가 자신의 창으로 받아 낸 것이다.

"어딜!"

동시에 삼귀가 허공으로 번쩍 치솟아 오르며 천무진을 덮쳤다.

하늘로 치솟은 도가 맹렬하게 떨어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천무진은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며 도를 피해 내는 것과 동시에 삼귀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쾅!

바닥에 그를 틀어박은 천무진이 검을 치켜들었다. 단번에 내리쳐 그 숨통을 끊어 버리려 할 때였다. 옆에서 일귀가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파파팍!

결국 천무진은 자리를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가볍게 착지했다.

"켁켁, 저 씹어 죽일 놈이……!"

움켜잡힌 채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삼귀가 붉어진 얼굴로 욕설을 터트렸다. 그런 그를 향해 일귀가 침착하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알고 있다고, 형님!"

그리고 그땐 이미 벌어진 거리를 좁히며 이귀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는 철퇴가 소리 나게 날아들었다.

콰앙!

방금 전까지 천무진이 있었던 장소는 장정 서너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움푹 파여져 있었다.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허나 이미 그곳에 천무진은 없었다.

그가 옆으로 이동하며 이귀를 향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막아 낸 건 이번에도 일귀였다.

그가 자신의 검으로 천무진의 검의 경로를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이귀가 손에 들린 철퇴로 바로 옆에 위치한 천무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부웅!

쇠로 된 철퇴가 천무진의 얼굴에 닿으려는 그 찰나.

타악.

천무진이 철퇴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드드득.

철퇴에 실린 힘 때문에 옆으로 조금 밀려나긴 했지만 천무진은 멀쩡했다. 손바닥으로 자신이 휘두른 철퇴를 잡아 낸 상대의 모습에 이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자신이 휘두른 이 정도 공격이면 커다란 바위조차도 가루가 되어 버린다. 그런 자신의 철퇴를 손바닥으로 받아 내다니 보고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천무진의 손바닥에서 밀려 나온 힘에 의해 이귀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쾅!

바닥에 처박힌 그가 피를 뿜어냈다.

"크윽."

순식간에 이귀를 날려 버린 천무진이 일귀에게 검을 움직였다.

슈슈슉!

검끼리 엉켰지만 순식간에 일귀의 옆구리에선 피가 터져 나갔다. 너무도 빠른 검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보법마저 엉키며 마구 뒷걸음질 치던 사이에 다행히도 다른 흑마련 무인들이 일귀를 도왔다.

핑핑핑!

날아드는 암기들이 천무진의 등 뒤를 노렸다.

그는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움직였다.

파라락!

순식간에 날아드는 오십 여 개의 비침들이 튕겨져 나갔다. 개중 일부는 도리어 그 비침을 날린 장본인에게 날아가 박혔다.

"윽."

나지막한 비명 소리들이 주변을 뒤덮는 그때 천무진의 검이 다시금 웅장한 힘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검을 쥔 채로 껑충 뛰어올랐던 천무진.

뒤로 쭉 뻗은 손과, 그 손에 들린 검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커다란 강기가 치솟았다.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새카만 빛.

그것은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강렬했다.

천룡비공 흑령무상(黑靈無狀)이라는 초식이었다.

검에 휩싸였던 강기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흑마련 무인들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아예 즉사하거나, 아니면 그 후폭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새카만 강기가 휘젓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 무엇도 남지 못했다.

그리고 더는 버텨 내지 못하겠는지 천무진의 검이 바스러졌다.

투두두둑.

부러진 검의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때였다.

후웅!

위쪽에서 날아드는 뭔가가 천무진을 기습해 들어왔다.

막 검이 깨어져 나가는 순간 들어온 절묘한 일격이었다.

천무진은 급히 손등으로 날아드는 검을 밀쳐 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거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지척까지 다가온 상대의 손바닥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펑!

충격과 함께 천무진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뒤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치명타는 되지 못했는지 허공에서 가볍게 몸을 회전시킨 그가 균형을 잡으며 바닥에 착지했다.

검을 손등으로 쳐 내는 그 와중에도 손바닥으로 날아드는 장력의 일부를 상쇄시킨 덕분이다.

뒤로 밀려 나간 천무진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속 위에 있을 것처럼 굴더니 상당히 급했나 봐?"

"……."

천무진의 조롱에 침묵하고 있는 건 흑마신이었다.

자신이 이 싸움에 개입할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그다.

사실 흑마신은 수하들이 죽어 나가던 와중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스스로 내뱉은 말 때문인지 결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상황은 점점 돌변했고, 결국 천무진이 쏟아 내는 강기의 위력을 확인하고는 더 참지 못하고 전각에서 뛰어내려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물론 결정을 내리는 데는 검이 부서지는 것도 한몫했다.

그 틈을 이용해서 파고들면 치명상을 가할 수도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생사를 오가는 무인의 세계에서 이 정도의 상황은 승부를 끝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기회였다.

허나 그 기회조차도 천무진이 막아 낸 것이다.

단신의 몸으로 순식간에 오십여 명이 넘는 흑마련의 무인들을 베어 넘겼다. 헌데 그런 놀라운 일을 벌인 당사자의 상태는 너무도 멀쩡하다.

흑마신은 근처에 있던 흑사귀 중 하나인 삼귀에게 전음을 날렸다.

『지금 당장 바깥에 있는 흑마련 무인들 모두에게 이곳으로 모이라고 명령해. 한 놈도 빠짐없이 몽땅!』

『모, 모두를 말입니까? 한 명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

『멍청하긴! 아직도 모르겠어? 그 한 명한테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계속해서 싸운다면 결국 머리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가 너무도 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모든 병력을 한 번에 쏟아 부어 최소한의 피해로 상대를 제거해야만 한다.

이대로 날뛰게 두었다가는 자신 또한 큰 부상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서서다.

결국 삼귀는 명령대로 바깥에 있는 흑마련 무인들을 불러오기 위해 뒤편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물론 천무진 또한 그런 그자의 모습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스윽.

자신과 삼귀의 사이를 흑마신이 절묘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그 자그마한 움직임만으로 천무진이 임무를 가지고 빠져나가는 삼귀를 공격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여유가 있지는 않겠군.’

흑마신이 싸움에 끼어든 이상 이제 이 싸움은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전생의 자신조차도 마공을 익히고서야 이곳 사해도의 모든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지금 상태라면 여기 있는 이들뿐이라면 몰라도, 외부에 있는 천 명이 넘는 무인들까지 감당하며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싸움을 감행한 이유는 분명했다.

천무진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카만 하늘.

아까 전 자신이 쏘았던 신호탄을 백아린과 단엽은 분명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만 버틴다면 가능한 싸움이다.

삼귀가 사라지는 틈을 이용해 흑마신이 입을 열었다.

"날 끌어내릴 줄은 몰랐군."

"그래? 난 알았는데. 아, 그래도 도망치지 않은 건 칭찬하지."

"도망은 무슨.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우리가 될 텐데."

씩 웃으며 흑마신이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검을 든 채로 천무진을 가볍게 겨눴다. 그것을 마주한 천무진은 들고 있던 손잡이만 남은 검을 휙 던졌다.

그러고는 이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들 중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흑마신이 말했다.

"지금 네놈이 내게 입힌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아? 그 대가는 상당히 크다고. 난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일 생각이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네놈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데?"

말과 함께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흑마신.

그가 슬쩍 손짓으로 뒤편에 있는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있을 싸움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움직인 삼귀를 제외한 나머지 흑사귀들이 뒤편에 있는 수하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사이 흑마신은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천무진과의 거리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실력 한번 볼까?"

말과 함께 흑마신의 몸이 움직였다.

슉.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검을 움직였다. 허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천무진은 비스듬히 세운 검날로 밀어냈다.

동시에 위쪽으로 찌르고 들어가는 검이 아슬아슬하게 흑마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흑마신은 공격을 이어 갔다.

촤르륵.

나눠지는 검의 잔영들.

순식간에 주변이 검기에 휩싸였다.

움직일 수 있는 사방을 점하며 치고 들어오는 검기를 마주한 천무진이 그사이를 검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차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이 부닥쳤다.

동시에 주변을 에워싸던 검기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천무진이 정확하게 기의 흐름을 끊으며 검기가 쏟아지기 전에 모든 걸 무(無)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저 한 번의 찌르기.

그렇지만 그걸로 너무도 많은 걸 막아 버린 천무진의 치명적인 움직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기술에 흑마신은 눈을 치켜떴다.

그저 무공이 뛰어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보통의 경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술이다.

거기다 쏟아지는 검기들을 향해 오히려 다가오는 배포까지.

이미 전각에서 뛰어내릴 때부터 느꼈지만…….

흑마신이 검을 맞댄 상황에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너…… 평범한 무인이 아니구나."

"눈치가 없네. 그걸 이제야 안 거야?"

"정체가 뭐냐?"

검을 맞댄 상황에서 물어 오는 흑마신.

어차피 적들이 이미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상황.

더는 정체를 감출 이유가 없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천룡성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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