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88화 (88/293)

88화. 천인혼 ―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2)

패기 넘치는 단엽의 그 말에 흑마신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뱉은 말대로 오랜 역사를 지닌 대홍련은 흑마련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랬기에 분했다.

‘망할…….’

어떻게든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파 최고 집단의 수장이 되고 싶었다. 그랬기에 해선 안 될 일에도 서슴없이 손을 댔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대가가 너무도 달콤했으니까.

분했지만 흑마신은 최대한 빠르게 들끓는 속을 다잡았다. 지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여긴 우리가 불리해.’

대로라고는 하지만 양옆이 막혀 있었기에 지금처럼 압도적인 고수들로만 구성된 저들에게 유리한 싸움터가 될 공산이 크다.

포위를 하고 한 번에 숫자로 밀어붙여야 하는 흑마련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흑마신은 이곳에서 가까우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할 법한 장소를 빠르게 생각해 냈다.

바로 천인혼이 잠들어 있는 사해신전이었다.

‘좋아, 그곳이라면 일귀와 이귀가 대동할 병력들이 합류하기에도 나쁘지 않겠군.’

중앙 지역과도 연결되어 있어 지원군의 합류가 용이한 장소.

결정을 내리자 흑마신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파앙!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검기가 정면에 있는 백아린과 단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기운을 마주한 백아린이 재빠르게 대검의 날을 아래로 향하게끔 하며 강하게 땅에 꽂아 넣었다.

쿵!

대검이 박힌 곳을 기점으로 하여 커다란 검막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덕분에 검기는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허나 그런 건 흑마신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처음부터 잠시 발을 잡아 두기 위해 날린 검기였으니까.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검기를 날리기 무섭게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 흑마신의 뒷모습을 보며 백아린이 빠르게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도망치는 흑마신의 뒤를 쫓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백아린의 뒷모습을 보며 단엽이 고개를 저었다.

‘몰랐는데 저거 완전히 싸움 귀신이네.’

생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박력 있는 모습과 파괴적인 무공. 거기다가 상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끈질김까지.

단엽의 시선이 자신의 뒤편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흑마련의 무인들에게로 향했다.

쓰러져 있는 저들 중 상당수는 백아린의 대검에 휩쓸려 뭐 하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 덕분에 단엽은 얼마 싸움도 하지 못했지만…….

피식.

그의 입가엔 웃음이 피어올랐다.

생각보다 점점 더 재밌어지고 있어서다.

‘이래서 무림이 재미있다니까.’

대홍련이 있는 운남성에만 처박혀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고수들. 그런 이들과 알게 되고 또 언젠가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엽을 들뜨게 만들었으니까.

웃음을 지운 단엽이 이미 멀찌감치 달려가는 백아린의 뒤를 빠르게 뒤쫓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사해신전의 인근에 도달할 무렵 뒤편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에 슬쩍 시선을 줬던 흑마신은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채만 한 대검이 떨어지면서 땅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이 사해도가 반쪽이 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과, 대홍련 부련주 단엽은 그렇다 치자.

둘은 너무도 특별한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또 다른 두 명.

정체조차 모르는 그 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삼귀의 목을 들고 나타났던 여유 가득한 중년의 사내, 거기다가 저 무식할 정도로 큰 대검을 마치 젓가락처럼 휘두르고 있는 괴력의 여자까지.

계속되어진 도망에 지쳐 갈 무렵 마침내 목적지인 사해신전이 흑마신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일부의 무인까지.

그들은 갑작스럽게 달려오는 흑마신과, 그 뒤를 맹렬히 쫓고 있는 낯선 이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흑마신이 버럭 소리쳤다.

"적이다! 방비하라!"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던 그들은 서둘러 각자의 병기를 꺼내어 든 채로 흑마신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이곳 사해신전을 지키는 이들은 흑마련 내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무인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덕분에 흑마신은 한숨 돌릴 여유를 얻는 것이 가능해졌다.

카카캉!

재빠르게 달려 나간 그들은 백아린과 단엽의 발을 잠시나마 잡아 줬다.

흑마신은 곧바로 신전의 위에 있는 수하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불을 피워라! 비상 상태임을 알리고 이곳으로 모든 흑마련 무인들을 집결시켜야 한다!"

명령을 전달받은 수하는 곧바로 신전 한쪽에 있는 커다란 봉화대에 불을 피워 올렸다.

화르륵.

불꽃이 순식간에 꿈틀거렸고, 이내 거기서 나온 불빛이 신호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불이 피어오른 걸 보며 흑마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사해신전으로 움직인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합류하기에 용이한 건 물론이고 특별한 장소이니 만큼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주변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봉화대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다행스러웠다.

덕분에 보다 빠른 시간에 흑마련의 정예 병력들이 이곳으로 오는 게 가능해졌다.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나도 싸워 볼까?’

여태까지는 계속 도망만 쳤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이곳에서 버티면 버틸수록 유리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흑마신이 움직이려는 찰나 이귀가 나타났다.

괜히 천무진과의 싸움에 끼어들어 죽을 위험이 있는 병력들을 이쪽으로 유도하며 그를 뒤쫓은 것이다.

"련주님!"

이귀의 목소리를 듣자 흑마신의 표정은 더욱 밝게 변했다.

자신을 바짝 뒤쫓던 백아린, 단엽과 대치하던 상태에서 나타난 이귀와 그가 대동한 병력은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 간다 생각할 그 무렵, 이귀와 비슷하게 천무진 또한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 천무진.

그가 착지한 주변에 있던 흑마련의 몇몇 무인들이 그대로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그런 천무진을 보며 단엽이 짧게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휘유, 등장 한번 엄청 화려하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강렬하게 모습을 드러낸 천무진의 모습에 흑마련 무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진은 곧장 엉망이 된 옷을 가볍게 손으로 털었다.

백아린이 옆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괜찮죠?"

"당연하지. 그런 질문은 나 말고, 나와 싸운 상대한테 해야지."

오만한 느낌까지 드는 대답에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도 별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던 것뿐이다.

처리해야 할 적이 많았기에 신호탄을 보고 나타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 늦어서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했거늘, 막상 눈앞에 있는 천무진은 멀쩡했다.

옷이 조금 찢어지고, 잔부상들이 조금 있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금 물었다.

"부총관은요?"

"뒤에."

천무진의 짧은 대답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뒤편에서 일련의 무리들을 베며 걸어오던 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눈을 한 채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이내 백아린을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대장!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혼자 뒤를 처리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모습.

한천까지 나타난 걸 확인한 천무진의 시선이 이내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빠르게 진열을 정비하며 곧 있을 싸움에 대비하는 흑마신의 모습이 보였다.

허나 천무진의 시선은 이내 흑마신이 아닌 그의 뒤편에 위치한 단상 위에 자리하고 있는 한 자루의 검으로 향했다.

천인혼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천인혼에 시선을 주던 천무진이 이내 흑마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도망은 포기했나 보군."

"도망은 무슨…… 처음부터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터를 찾아 다녔던 것뿐이다."

지지 않겠다는 듯 흑마신이 받아쳤다.

고작 네 명에 의해 이곳까지 도망쳤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국 원하던 대로의 결과만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현재 이곳에 모인 병력은 얼추 삼백여 명 정도.

개중에 정예 병력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병력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충분히 버틸 만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때까지 최소한의 피해로 저들을 막는 것.

흑마신은 곧바로 이귀에게 전음을 날렸다.

『내가 천룡성에서 온 놈을 전담으로 맡지. 너는 나머지 셋 중에…….』

흑마신의 시선은 천무진의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세 명에게로 향했다.

대홍련의 부련주 단엽과 정체불명의 두 남녀.

저 중에 누구를 맡겨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과는 하나였다.

『단엽을 네가 맡아야겠다. 혼자서 감당할 자는 아니니 수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도록 해.』

『단엽이요? 저 중에 단엽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저 머리 긴 사내놈이 단엽이다. 위험한 놈이니까 절대 섣부르게 건드리진 말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상대의 정체를 안 이귀의 안색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그런 이귀의 모습을 보면서 흑마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긴장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흑사귀 정도 되는 자가 막기엔 상대는 너무 거물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놈에게 시간을 끌어 줄 만한 수하가 없다는 것인데…….

흑마신은 손에 쥔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버틴다.’

계속해서 버틴다면 결국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흑마신이 버럭 소리쳤다.

"쓸어버려!"

고함과 함께 흑마신이 선두에서 달려 나갔다.

흑마련의 수장인 그가 먼저 움직이자, 굳어 있던 흑마련의 무인들도 용기를 얻은 듯 그의 뒤를 쫓아 내달렸다.

쿠쿠쿵!

수백 명의 무인들이 달려드는 모습은 꽤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문제는 그런 그들과 마주한 네 사람의 표정들이다.

누구 하나 그 같은 모습에 긴장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백아린이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우리도 갈까요?"

"그러자고."

"혹시 뭐 누구 살려 둬야 하거나 이런 건 없죠?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거나……."

"아니. 그냥 깨끗하게 박살 내도 돼. 이미 다 찾아냈거든."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이 잘됐다는 듯 손에 든 대검을 붕붕 움직였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가볍게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말을 받았다.

"잘됐네요. 여태 봐주느라 좀 힘들었거든요."

"큭, 그렇게 패 놓고 봐준 거였어? 안 봐줬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네."

옆에서 단엽이 웃음과 함께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맺힌 웃음기는 점점 사라지고 표정은 진지해져 가고 있었다. 달려드는 적들에게로 시선을 향한 채 단엽이 짧게 말을 이었다.

"이번엔 누가 더 많이 쓰러트리는지 보자고."

"안 될걸. 내 대검이 네 팔보다 더 길거든."

백아린 또한 자신 있게 받아쳤다.

그녀의 말에 단엽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채로 대꾸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

말과 함께 단엽이 먼저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권갑에 붉은빛이 터질 듯 넘실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단엽의 주먹에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시원한 공격이 터져 나갔다.

쿠아아앙!

중앙을 가로지르는 붉은 권기가 땅바닥을 갈라 버리며 퍼져 나갔다.

그런 단엽의 모습에 백아린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커다란 대검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고는 이내 폭풍우와도 같은 숫자의 검기들을 아래로 쏟아 냈다.

순식간에 한쪽을 무너트리며 두 사람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내기라도 하는 듯이 적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한 둘의 모습을 보며 한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젊으셔서 그런가. 참 혈기들 왕성하시다니까."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한천도 자신의 검을 적들에게 겨눈 채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도 젊은이들한테 쉽사리 질 정도로 늙지는 않았답니다."

한천의 몸이 흑마련 무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스윽, 슥.

귀신처럼 나타난 그의 검이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이들을 빠르게 베고 지나갔다.

날뛰기 시작한 세 명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흑마신은 천무진을 향해 다가왔다. 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천무진이었으니까.

그가 거리를 좁히며 버럭 소리쳤다.

"어디 천룡성이라는 이름값 좀 확인해 볼까!"

파악!

위로 솟구치는 흑마신의 검에서 수십 개의 검기가 성난 맹수의 발톱처럼 치솟아 올랐다.

파파팍!

천무진은 들고 있던 검으로 가볍게 받아 냄과 동시에 정면으로 흑마신을 찌르고 들어갔다.

카앙!

두 개의 검이 충돌하며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순간 천무진의 몸이 낮게 회전하며 빠르게 발이 흑마신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퍽.

팔로 날아드는 발을 받아 낸 그 상태 그대로 흑마신이 천무진과의 거리를 좁혀 들었다.

"흐읍!"

흑마신은 나지막한 소리를 토해 냄과 동시에 빠르게 쫙 편 다섯 손가락을 곧바로 천무진의 가슴을 향해 찍어 넣었다.

천무진은 빠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날아드는 적의 공격을 피한 뒤 그사이로 검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검날을 후려쳤다.

파앙!

부러져 버린 검신이 옆으로 튕겨져 나갔고, 동시에 흑마신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천무진의 앞섶을 스치며 지나갔다.

피가 튀어 올랐지만 천무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곧바로 발로 상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팔꿈치로 가까스로 막아 내긴 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던 탓인지 몸이 뒤로 쭉 밀려 나갔다.

표정을 찡그렸던 흑마신이 아픈 팔을 흔들며 비웃듯 말했다.

"검이 부러졌군. 조심하라고. 그러다 다음엔 네놈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뭐, 네 손이 닿기 전부터 상태가 좀 별로였거든. 이런 검들이 천룡성의 무공을 버텨 내기는 좀 버거운 모양이야."

수많은 적들과 싸우며 계속해서 검을 바꿔 왔던 천무진이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금 검이 부러지자 시선은 자연스레 옆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천무진의 귀를 간질이던 소리의 진원지로.

부르르르!

떨려 온다.

그리고 들려온다.

천인혼의 울음소리가. 그 성난 듯한 울부짖음이.

우우웅! 우웅!

천인혼은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이다.

천무진이 잠시 옆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였다.

‘지금이다!’

기회라 여긴 흑마신이 재빠르게 천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흑마신은 천무진이 주변에 나뒹구는 수하들의 무기를 집는 여유를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가 움직이자 당연히 천무진 또한 알아차리고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흑마신.

그가 먼 거리에서부터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천무진은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손을 옆으로 내뻗었다.

비어 버린 가슴을 보며 흑마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에게 검이 없다고 해서 이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기회에 몰아치며 시간을 벌거나, 운이 좋다면 상처 두어 개 내는 정도의 이득은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오히려 가슴을 열고 옆으로 손을 내뻗은 천무진의 지금 모습은 무방비해 보이기만 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회였다.

천무진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죽어!’

앞으로 향한 검을 강하게 움직여 천무진의 가슴을 베기 위해 손에 힘을 주는 그때였다.

순간 천무진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동시에 무엇인가가 빠르게 날아들며 그의 손바닥에 감겼다.

촤르르륵!

파앙!

천무진의 손에 들린 건 한 자루의 검이었다.

천무진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허공섭물을 이용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검을 회수할 수도 있는 상황, 그렇지만 흑마신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천무진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검신.

천인혼이다.

흑마신이 뽑아 들 때면 언제나 보통의 검처럼 새하얗게 변해 버리던 천인혼이, 지금은 그 특유의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검신을 자랑하며 빛나고 있었다.

허나 흑마신은 놀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천인혼을 쥔 천무진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크윽!"

어깨를 베인 흑마신이 주춤거리며 뒤로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천무진은 굳이 뒷걸음질 치는 그를 쫓지 않았다.

대신 천무진은 손에 들린 천인혼을 응시했다.

붉은 검신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새로운 생에서는 처음 조우한 상황.

천인혼에게 정말로 영혼이 있다 해도 자신을 알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왜일까?

이 울음소리가 마치 자신을 향한 오랜 친구의 인사처럼 들리는 이유는.

손에 착 감기는 천인혼의 감각을 느끼며 천무진의 손바닥이 붉은 검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피처럼 붉은 검신을 어루만지던 천무진은 이내 정면에 마주한 흑마신을 응시한 채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번 생에도…… 부탁한다. 나와 함께 신나게 날뛰어 보자고."

우웅!

천무진의 말에 천인혼 또한 낮은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