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인과응보 ― 그건 무리야 (1)
갑자기 밀려드는 섬뜩한 한기를 느껴서일까?
적들을 쓸어버리고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뒤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검을 들고 있는 천무진이 있었다.
백아린은 한눈에 그 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렇게 피처럼 붉은 검신을 가진 검은 세상에서 쉬이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저 검은 뭐지?’
천무진이 저런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마치 소중한 가족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까지.
저 검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으라차! 스물하나!"
옆에서 들려오는 단엽의 목소리에 백아린의 시선이 다시금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에게로 향했다.
백아린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자신보다 무조건 더 많은 숫자의 적을 쓰러트리겠다고 날뛰는 단엽, 그리고 백아린 또한 져 줄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대검이 번개처럼 휘둘렸다.
쿠카캉!
단 일격에 십여 명을 날려 버린 그녀가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서른!"
그러자 막 한 명의 멱살을 잡아 내리꽂던 단엽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중 하나는 나도 패고 있었다고."
"침만 바르면 뭘 하나. 입에 넣어야지."
백아린의 말에 단엽은 불만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하기는 어려웠는지 이를 꽉 깨물었다.
"좋다고, 결국 내가 이길 테니까."
말과 함께 단엽은 보다 강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투쟁심 강한 단엽에게 목표까지 생겨 버리니 그의 주먹은 평소보다 더욱 매섭게 휘몰아쳤다.
퍽퍽!
곤죽이 되며 흑마련의 무인들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조용히 적들을 베고 있는 한천의 주변으로도 많은 숫자의 흑마련 무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세 사람은 정말 순식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흑마련 무인들을 제압해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령을 받고 단엽의 발을 붙잡기 위해 움직이려 했는데, 본격적으로 나서기도 전에 순식간에 진형이 무너질 정도로 상대들이 압도적 무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미친 듯 휘몰리는 흑마련 무인들을 보며 이귀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놈들 대체 뭐지? 아무리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 정예 병력은 아니라고 해도 내기를 하면서 베어 넘길 수준은 아닌데…….’
단엽에 대해서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둘 또한 단엽에 비해 크게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저 셋 모두가 우내이십일성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귀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름조차 모르는 젊은 무인들. 그들이 무림 최고수로 불리는 그 스물한 명의 고수들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질적으로 그 수준의 무인 셋이 모인다면 어지간한 문파 하나가 박살이 나는 건 일도 아닐 정도다. 그런 고강한 경지에 이름조차 모르는 저 젊은 무인들이 올라 있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아닐 거라 스스로에게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불안해지는 이 감정은.
그때 멀리에서 나타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이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형님!"
선두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건 정예 병력들을 모아 오기 위해 움직인 일귀가 있었다. 그가 외곽에 빠져 있는 이들 일부를 끌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일귀의 뒤편으로 줄지어 모습을 드러낸 아군들. 마침내 흑마련의 정예 병력들이 도착한 것이다.
이귀와 마찬가지로 일귀 또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이내 천무진 일행을 바라보며 수하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침입자들을 모두 잡아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존명!"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정예 병력들 또한 싸움에 개입했다.
그들의 개입으로 흑마련의 사기는 크게 요동쳤다.
"오오오!"
들려오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던 천무진은 이내 자신의 앞에 마주하고 있는 흑마신에게 다시금 시선을 줬다.
어깨를 베인 그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무진의 손에 들린 천인혼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강한 기운을 뿜어내며 밀어만 대던 그 검이 지금 천무진의 손에서는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흑마신이 입을 열었다.
"네놈 그 무기가 뭔지 알고나……."
"알아, 천인혼."
"알고 있었어?"
"그럼, 내 무기였는데 모를 리가."
"그게 무슨 개 소리야! 그건 내 거야! 아주 오래전에 내가 힘겹게 구한 신병이기라고!"
"그럼 뭐하겠어. 천인혼은 네가 아닌 날 선택했는데. 이걸로 누가 주인인지는 정해진 거 아닌가?"
"……무슨 사특한 수로 그 녀석을 쥔 거냐?"
너무도 궁금했는지 흑마신이 물었다.
그러자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간단해. 그냥 이 녀석한테는 네가 모자랐던 거야. 그러니 네 손길을 거절한 거지. 아마 평생을 보냈어도 이 녀석은 널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별 볼 일 없는 작자에게는 자신의 몸을 맡기지 않는 놈이거든."
"닥쳐!"
얼마나 탐을 내던 무기인가.
오랜 시간 곁에서 바라보기만 하며 어떻게든 천인혼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랬는데…… 그 오랜 시간 지켜 왔던 검이 지금 자신의 모든 걸 망가트리려고 하는 작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큰 분노가 스멀스멀 밀려든다.
검을 비스듬히 추켜세운 채로 흑마신이 말했다.
"천인혼에게 자신이 선택한 자의 피가 얼마나 하찮은지 보여 주지."
"안됐지만 천인혼이 마실 피는 이쪽이 아니거든."
말과 함께 천무진은 흑마신을 겨눴다.
이 검에 죽을 상대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처럼.
후웅.
천인혼의 끝에 서서히 내공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공을 움직였을 뿐이거늘 천무진은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휘둘렀던 평범한 검과는 손에 느껴지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천무진은 곧바로 천룡비공 일점의 초식을 펼쳤다.
검 끝에 매달려 있던 검기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피잉!
대놓고 펼치는 공격에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흑마신은 무공이 터져 나오는 순간 기겁을 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하나의 점,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수십 번의 공격.
뒤로 쏘아진 검기들이 한참 싸움에 열중하고 있던 흑마련 무인들의 옆을 가로질렀다.
퍼퍼펑!
일점이 도달한 곳에 있던 자들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며 나자빠졌다. 천무진은 슬쩍 천인혼을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사용했던 검들은 천룡비공을 쓴 직후 적잖이 무리가 가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천인혼은 너무도 멀쩡했다.
괜히 전설의 무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건 아니었다.
가볍게 천인혼을 휘둘러 본 천무진은 이내 망설이지 않고 폭발하듯 큰 내력을 검으로 쏟아 넣었다.
후웅!
검을 쥔 천무진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들어갔다.
캉캉!
잠시 천인혼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흑마신 또한 재빨리 자신의 검을 들어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 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파앗! 팟!
흑마신의 검이 천무진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데 비해, 천인혼은 그의 팔뚝을 길게 베고 지나갔다.
피가 터져 나왔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무진의 공격이 이어졌다.
파라락.
휘저어지는 검이 순식간에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익!"
흑마신이 이를 악문 채로 날아드는 공격을 검날로 받아 냈다. 가까스로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실려 있는 힘을 견뎌 내기는 어려웠는지, 그의 몸이 뒤로 붕 떠서 밀려 나갔다.
허공으로 붕 뜬 그 와중에 흑마신이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슈슈슉.
잔영이 일 정도로 빠른 공격이 재차 달려들려던 천무진의 발걸음을 잡아냈다.
껑충 뛰어올라 공격을 피한 천무진은 곧바로 검기를 쏘아 보냈다.
스윽.
머리카락 끝자락이 아슬아슬하게 잘려져 나갔다.
‘빠르다.’
흑마신은 서둘러 자세를 취한 채로 천무진을 노려봤다. 이미 몇 차례 손속을 겨루며 상대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흑마신은 검을 섞을수록 자신이 점점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허나 그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타악.
가볍게 발로 바닥을 박차 오른 그의 몸이 땅과 수평이 된 상태로 회전했다.
촤르르륵.
회오리처럼 마구 요동치던 상태에서 흑마신의 검이 수십 개의 변화를 보이며 밀려들었다.
차차차창!
천무진은 빠르게 밀려드는 공격을 받아 냈다.
핏핏.
몇 개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천무진에게 자잘한 부상을 남겼다.
하지만 방어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몇 개의 공격을 가볍게 흘린 상태에서 천무진은 힘이 가득 담긴 일격을 회전하고 있는 흑마신을 향해 찍어 내렸다.
쾅!
"큭!"
순식간에 빈틈을 파고드는 공격에 서둘러 방어는 해냈지만, 결국 그대로 땅에 처박히고야 말았다. 이어지는 공격이 두려워서일까?
무인으로서는 수치스럽지만 살기 위해 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허나 그렇게 해서 거리를 벌린 흑마신은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어질 거라 여겼던 천무진의 공격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마치 뭐하냐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는 그 눈빛에 흑마신은 수치심을 느꼈다.
천무진이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
흑마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허나 붉어진 얼굴이 지금 그의 심정을 말해 주는 듯싶었다.
흑마신의 속을 뒤집은 천무진은 이내 천인혼을 치켜들었다.
쿠르르릉!
하늘을 향해 치솟는 강기.
동시에 천무진은 상대를 찍어 누르기 위해 강렬한 내공을 뿜어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결박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강한 힘.
그리고 그와 마주하고 있던 흑마신 또한 이를 꽉 깨문 채로 내력을 집중시켰다. 보통 공격이 아님을 직감한 탓이다.
우우웅.
울음소리와 함께 강기가 그의 검에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두 개의 힘 차이는 여실히 느껴졌다.
허나 더 파괴적인 무공이라 해서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다.
흑마신은 밀려오는 천무진의 기운을 받으면서도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연신 밀리고는 있었지만 그 또한 사파에서 손꼽히는 고수 중 하나.
그런 그가 상대에게 고작 몇 개의 생채기 정도만 내고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부러 내공을 쏟아 내 상대를 압박하려던 천무진은 걸음을 떼는 흑마신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움직였다.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무리였군.’
이전 생에서 천무진이 흑마신과 싸운 건 지금부터 대략 십 년 정도 후의 일이다. 당연히 그만큼 흑마신도 강해져 있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과거다 보니 천무진이 싸웠던 당시의 흑마신보다는 약한 상태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천무진은 전생의 경험을 통해 빠르게 경지에 오르고 있었으니 그 실력 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엔 혼자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흑마련의 무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든든한 동료들이 지금 뒤를 봐주고 있었다.
쾅쾅쾅!
지금도 뒤편에서는 굉음과 함께 비명 소리들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일귀가 끌고 온 정예 병력들과 함께 자신 있게 시작된 싸움. 하지만 결과는 지금 이 비명이 말해 주고 있었다.
고작 조금 더 버티는 정도였을 뿐, 흑마련의 무인들이 일방적으로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누가 더 많이 쓰러트렸나 숫자를 소리쳐 대는 백아린과 단엽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가오는 흑마신을 향해 천무진이 걸음을 옮겼다.
콰드득.
걸어가는 걸음걸이에 맞춰 땅은 조각조각 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천무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어마 무시했다.
점점 거리를 좁히던 흑마신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땀을 느꼈다.
‘……지금 겁을 먹은 건가? 내가?’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겁을 먹는다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흑마신은 떨리려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천룡성의 무인이라고 해도 어차피 놈도 사람일 뿐이다. 목이 떨어지면 죽는 건 마찬가지지.’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듯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검을 쥔 손을 위쪽으로 치켜들었다.
슈웅, 슝!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둘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
그리고 치솟은 두 개의 강기.
꿈틀.
걸음을 옮긴 천무진의 발이 다시금 땅 안으로 새끼손가락 정도 파묻히는 그 순간, 흑마신이 몸을 날렸다.
마뢰십이강기(魔雷十二罡氣)라 불리는 그의 독문무공이다. 열두 개의 강기가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일격필살의 무공.
부아아앙!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치솟았던 그가 힘껏 검을 내려쳤다.
열두 개의 강기가 기다렸다는 듯 검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을 뒤덮으며 강렬하게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천무진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내리꽂히는 강기의 가닥들.
하지만…….
천무진의 입가에 슬며시 비웃음이 걸렸다.
‘안됐지만…… 이 무공을 쓸 줄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의 독문무공인 마뢰십이강기를 저번의 삶에서 이미 두 차례나 몸으로 받아 봤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라 완벽하게 파훼까지 해냈던 전적이 있다.
전생에서 흑마신의 목이 날아갔던 그 순간이 바로 이 마뢰십이강기를 세 번째 펼쳤을 때다. 천무진은 이 공격 두 번을 받아 냈고, 그 이후에 다시금 이 무공을 펼친 대가로 그는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천무진의 시선은 쏟아져 내려오는 강기들 사이의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열두 개의 강기를 쏟아 내며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흑마신의 모습이 일순 눈에 들어왔다.
‘지금.’
천인혼에 맺혀 있던 강기가 기다렸다는 듯 불을 뿜었다.
파아앙!
순식간에 쏘아진 강기가 마뢰십이강기의 사이 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천무진을 향해 날아들던 열두 개의 강기 가닥들이 갑자기 흔들렸다.
후웅!
천무진이 뿜어낸 강기가 마뢰십이강기의 기운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가져온 상황은 흑마신에게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허공에서 막 착지하려던 흑마신을 향해 천무진의 강기가 순식간에 도달해 있었다.
일순 내력을 쥐어짜며 착지했던 흑마신은 갑자기 코앞에서 나타난 천무진의 강기를 보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방패처럼 밀려 나가던 마뢰십이강기의 정확한 빈틈을 파고들어 온 강기라 방어하기엔 그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거기다가 천무진의 강기가 비집고 들어온 뒤, 마뢰십이강기는 자신이 원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안 돼!’
번쩍.
빛이 앞에서 터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방어를 위해 황급히 들어 올렸던 검에 묵직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드드드드!
떨리는 몸과, 신체를 뒤덮은 강기.
콰앙!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뼈가 으깨지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동시에 그의 신체 곳곳이 터져 나가며 태어나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아아악!"
흑마신의 몸이 허공으로 크게 솟구쳤다가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몸을 회전시키며 착지하려 했지만…….
쿵.
흑마신은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
발뼈가 완전히 으깨진 바람에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힘겹게 상체는 일으켜 세웠지만 순간 완전히 뒤집혀 버린 속이 참지 못하고 요동쳤다.
푸웃!
피가 연신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입 부분은 아예 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쏟아져 내린 피가 목 부분과 가슴 부분까지 완전히 적셔 버린 상황이다.
거기에 사지 중에 성한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된 흑마신의 시선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천무진이 보였다.
마뢰십이강기가 천무진을 뒤덮긴 했지만, 교묘하게 그 힘을 흘려버리는 바람에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흑마신은 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사실 너한테 듣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말이야…… 말하지 않겠지?"
"네놈에게 해 줄 이야기 따위는 아무런 것도 없다."
흑마신의 목소리는 내상을 입은 탓인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장에 숨이 넘어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모습.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느냐?"
"왜? 아닌 것 같아?"
천무진의 비웃는 듯한 어투에 흑마신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피범벅인 얼굴로 악에 받친 듯 소리를 내질렀다.
"두고 보거라! 다시 태어나서라도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이고야 말 테니까! 그때는 내가 네놈을……."
"아쉽지만 그건 무리야."
천무진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이내 허리를 굽혀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세우고 있는 흑마신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모르겠지만 네가 나한테 죽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하지. 만약에 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넌 나한테 죽을 거야."
알 수 없는 말에 흑마신이 눈을 크게 치켜뜰 때였다. 천무진의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대로 편히 가게 놔두기엔 이자가 지은 죄가 너무도 크다.
으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흑마신의 입에서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끄으으윽!"
게거품을 물며 고통에 부들부들 몸부림치는 흑마신. 그런 그에게 천무진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가 됐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