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암습 ― 안 될 것 같죠 (2)
무림맹의 별동대가 실종되었다 알려진 곳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평과를 향해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다행히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그나마 가까워지는 방향이었기에 시간이 길어지거나 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제법 되었기에 도착하는 데는 며칠의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평과.
미리 언질을 해 둔 덕분인지 도착하기 무섭게 보고서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객잔에 방을 잡고 모인 상황에서 곧바로 보고서부터 확인했다. 백아린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며 안에 담긴 내용들을 전달했다.
"별로 큰 단서는 없어요. 다만 인근에서 싸웠던 흔적이나 피가 좀 튀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는군요. 하필이면 비가 심하게 오는 바람에 흔적이 많이 씻겨 나가 파악하는 게 어렵긴 했는데 아마도 상대는 다섯 미만으로 추정되고요. 시체는 먼저 처리를 했는지 발견하지 못했다는군요."
"다섯……."
무림맹의 무인들이고 그 숫자도 육십에 육박한다.
그 정도의 무인들을 다섯 미만의 인물들로 상대했다는 건 그만큼 그자들의 실력이 뛰어났을 거라는 의미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생존자가 있기를 바랐다.
이번 일에 대한 증인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별동대 임무를 위해 나왔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경 쓰였다.
천무진이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그 흔적이 있는 곳이 여기서 먼가?"
"거리가 제법 돼요. 반나절 정도는 가야 하거든요. 왜요? 직접 가 보게요?"
"그래야 할 것 같아."
자신들이 이곳까지 오는 내내 조사를 했던 장소.
특별한 뭔가가 더 나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대답을 마친 그녀의 시선이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못들은 척 자는 시늉을 하는 그들을 향해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냉수라도 한 바가지 뿌려 주면 깨려나……."
중얼거리는 소리에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의 몸이 반사적으로 침상에서 튕겨져 올랐다. 둘은 자연스레 옆에 두었던 겉옷을 걸치며 서로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하하, 이런 깜빡 잠들 뻔했습니다. 그죠?"
"그러게 말이야. 아슬아슬한 순간 정신력으로 딱 일어났다니까."
한천과 단엽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백아린은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렇게 쿵짝이 잘 맞는 사이도 찾기 어려울 게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두 사람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실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빨리 내려와."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단엽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과격하다니까."
"그게 저희 대장 매력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천 소협?"
한천이 질문의 방향을 돌리자 자연스레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천무진은 당황했다.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그럼요. 여기 다른 천 소협도 있으십니까?"
짓궂어 보이는 한천의 모습에 천무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백아린의 저런 모습이 어떠냐고?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를 바꾸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 오며 주변에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주지 못했던 천무진이다.
허나…….
"……과격한 건 모르겠는데."
가녀린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는 것만큼은 그리 느꼈을 수도 있지만, 성격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대화 하나하나에도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심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백아린과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인이라면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에서도 이처럼 지근거리를 허락한 상대.
그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능력적인 면에서도, 인성적인 면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한천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요? 그럼 저희 대장이 어떤데요?"
"그건……."
대답을 하려던 천무진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천무진이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알 거 없어."
말을 끝낸 그가 질문이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보다 빠르게 객잔 방을 박차고 나갔다. 순식간에 천무진이 사라져 버린 빈 공간을 바라보며 한천이 괴롭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아, 저 뒷말이 궁금한데 말이야. 이거야 원, 뒷간 갔다가 제대로 못 닦고 나온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네."
"궁금한 것도 많다. 주인이 너희 대장을 어찌 생각하는지 그게 뭐가 그리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말을 마친 한천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창가의 아래쪽에서는 바삐 마차를 정비하고 있는 백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천이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이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하니까."
* * *
천무진 일행이 탄 마차는 싸움이 벌어진 흔적이 있는 장소로 곧장 움직였고, 말한 대로 약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백아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비 때문에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들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더 많이 없어진 것 같네요."
검에 잘려져 나간 나무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면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천무진은 가만히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상념에 잠겼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별동대를 쳤다. 대체…… 왜?’
그들이 노리는 많은 것들을 천무진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허나 확실한 건 본래라면 그 안에 이번 별동대가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단순히 자신이 청아원과 사해도를 무너트렸다는 이유로 별동대를 건드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별동대가 사라진다 해서 천무진이 입을 타격은 전혀 없었으니까.
게다가 오랜 시간 스스로를 감춰 오던 그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모습을 드러냈을 리는 만무한 상황.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천무진이 백아린에게 물었다.
"누군가 살아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높진 않겠죠."
현실적으로 백아린이 경험해 본 그들은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작정을 하고 움직였다면 그 마수에서 벗어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게다.
백아린이 물었다.
"어떻게 할래요? 바로 무림맹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릴까요?"
아마도 별동대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아직 무림맹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이번 임무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이토록 쉽게 그들이 실종된 사실을 안 건 애초부터 적화신루에게 의뢰해 이들을 전담으로 뒤쫓던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천무진 또한 이런 일을 전혀 몰랐을 게다.
백아린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천무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삼 일 정도 시간 괜찮겠어? 그냥 떠나기에는 뭔가 찜찜해서."
"삼 일이라면…… 뭐 가능할 것 같아요."
쉽진 않겠지만 밤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 삼 일의 시간을 빼더라도 원래의 계획과 비슷하게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삼 일이라는 시간.
그 안에 천무진은 무엇이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 * *
늦은 오후.
평소에 보기 힘든 정파의 수많은 핵심 인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 세력을 대표하는 수장도 있었고, 자신이 속한 곳의 대표를 대신하여 모습을 드러낸 이들도 존재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 외에 수많은 중소문파의 세력들 모두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건 오늘 있을 회의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건이 있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있는 그런 회의였다.
분명 별다를 것 없는 회의였는데 회의장 내부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히죽거리며 웃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자도 있었다.
현재 무림맹은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립하는 맹주파와, 반맹주파.
그리고 그런 둘 중 어디의 손도 들어 주지 않는 중도 세력이 존재했다.
세 개의 세력 중 현재 가장 큰 힘을 자랑하는 건 아직까지는 맹주파였다. 맹주인 추자후는 훌륭한 무인이었다. 그럼과 동시에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능력 또한 출중했다.
당연히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적부터 무림에 이름을 날렸던 그의 단 하나 모자란 점이라면 역시나 배경이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명문정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세력이 아닌 인물이 무림맹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그리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추자후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중 일부는 오래전부터 대립하며 호시탐탐 다음 맹주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회의를 위해 회의장에 참석한 무림맹의 군사 위지겸 또한 오늘따라 분위기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였다면 귀찮은 자리에 불려 왔다는 티를 팍팍 내던 몇몇 이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양새가 특히나 눈에 거슬렸다.
‘그렇게 회의를 좋아하던 작자들이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지금으로선 그 꿍꿍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릇.
그저 얼른 회의가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쿵쿵.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고, 이내 바깥에 서 있던 수문위사가 크게 소리쳤다.
"맹주님 오십니다!"
그 소리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몸을 일으켰고,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모두 자세를 잡고 곧 들어올 무림맹의 수장, 추자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추자후가 성큼 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고함 소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회의장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울려 퍼지는 소리 속에서 추자후는 익숙한 듯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십 년이 훨씬 넘는 긴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켜 온 추자후다.
그의 몸에서는 절로 비범한 절대자의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걸음을 옮기던 추자후가 이내 자신의 자리 앞에 서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준비되어진 곳에 앉고는 곧장 손을 들며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다들 앉으시오."
승낙이 떨어지자 그제야 양쪽에 도열해 있던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추자후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회의, 주기가 그리 긴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몇 보였다.
추자후가 기분 좋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 몇 있소. 다들 건강한 듯하니 마음이 좋소이다. 특히 요원(了圓) 자네는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군그래."
"맹주님도 정정하신 걸 보니 저 또한 한결 마음이 좋습니다. 아미타불."
말과 함께 합장을 하는 이는 소림사의 요원이었다. 오십 대의 나이로 방장을 대신하여 이곳에 나온 것이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추자후와 함께 싸우며 제법 깊은 우정을 나눈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보며 추자후가 가볍게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오랜만에 만난 지기인데 하필이면 그게 스님이라 술 한잔하자고 하기도 뭐하고 말이야. 안 그렇소?"
"하하하!"
추자후의 말에 많은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요원 또한 화답했다.
"저야 땡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맹주님."
"그 말에 내가 몇 번을 속았는지 원. 자네와 술 마시는 건 이제 포기일세."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푼 추자후는 슬쩍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여 주는 곳과는 대조적으로 웃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싸늘한 시선이 쏟아지는 곳.
반맹주파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였다.
핑계를 대면서 종종 참석을 안 하던 이들도 있었거늘 오늘따라 모두가 빼곡하게 자리를 채워 주고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그쪽에게서 관심을 떼며 언제나처럼 회의를 시작하기 위해 추자후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보겠소. 첫 번째는……."
바로 그때였다.
착석해 있던 인물들 중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이내 추자후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짧게 예를 갖추고는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습니까?"
말을 꺼낸 이는 다름 아닌 반맹주파에서도 나름 입김이 있는 종남파 소속의 무인, 양승필(量繩筆)이라는 자였다.
해 보라는 듯 추자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했다.
"맹주님께 하나 확인받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추자후의 말에 양승필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을 받았다.
"지금 그 자리에…… 맹주님이 앉아 계실 자격이 있으신지를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도발에 추자후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반대하는 이들에게 몇 차례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추자후가 피식 웃었다.
‘뭔지 몰라도 내 목을 물어뜯어 볼 준비가 되었다 이건가?’
하지만…….
그가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전노장에게서나 풍겨져 나올 수 있을 법한 여유였다. 추자후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양승필을 응시했다.
추자후의 웃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무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