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강림 ― 검을 다오
해가 진 시각, 일련의 무리가 강줄기를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별동대를 전멸시킨 괴한들이었다.
세 명 중 한 명은 다른 임무를 위해 움직인 탓에, 둘이서 뒤처리를 전담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며칠 동안 상당히 짜증이 나 있었다.
반드시 죽였어야 할 놈들 몇 명을 놓쳤던 일 탓이다.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이려 했는데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음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령 감자 한 알이라고 할지언정 그걸 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면 결국 찾아낼 수 있었을 게다. 헌데 놀랍게도 그들의 흔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지독한 새끼들이네. 며칠을 계속 굶고 있었다니."
말을 내뱉는 오가위(吳價瑋)라는 사내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귀찮았던 그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며칠 동안 흔적을 찾지 못했던 별동대 잔당들의 위치, 그리고 생존자의 숫자와 상황까지 모두 완벽하게 알게 됐다.
그 모든 건 바로 당자윤 덕분이었다.
그가 위치를 비롯한 현재 상황에 대한 모든 걸 알려 준 덕분에 그간 찾지 못했던 별동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선두에서 걸어가는 두 명의 사내를 스무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뒤쫓고 있었다.
저번에 놓쳤던 일을 교훈 삼아 보다 완벽한 포위망을 짜려고 하는 것이다. 이번엔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당시엔 워낙 급히 일을 진행하다 보니 수하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들 셋만 작전에 나섰지만 그 이후 며칠의 시간 동안 이들 모두가 도착한 상황이었다.
이번 작전에 투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가위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내, 마염(馬廉)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놈은 어떻게 되는 거야?"
"누구? 사천당가 그 꼬맹이?"
"응, 정말 살려준대?"
"그럴 거라던데. 애초부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쪽에 증인이 필요하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얽혔으니…… 앞으로 이용해 먹을 수도 있고 말이야."
고문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살고 싶다면 아는 걸 말 하라는 그 한마디에 동료들이 있는 곳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긴 자다.
자신의 동료들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자라는 건 그만큼 두고두고 이용해 먹기에 용이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남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로 이기적인 자라는 소리니까.
마염이 재차 물었다.
"사천당문 놈인데 귀찮아지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자기가 한 짓이 있는데 그걸 떠들 수 있겠어?"
절대 자신이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을 터.
자신들에 대해 떠들려면 동료를 팔아넘긴 그 사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오히려 잃을 게 많은 건 사천당문의 후기지수인 당자윤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만에 하나 정말 미친 것처럼 모든 걸 밝히려고 한다면 그에 맞는 방비책 또한 준비되어져 있으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가위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그 당자윤이라는 놈 때문에 김이 다 샜다니까."
"왜?"
"적어도 뭐 쑤시는 시늉이라도 하고 나서 불어야 재미가 있는데, 이놈은 뭐 물어만 봐도 술술 말해 주니 하나도 재미없더라고."
"큭, 어지간한 놈이군."
"욕심이 많아 보이더라고."
당자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의 눈에 허름한 인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둘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염이 입을 열었다.
"저긴가?"
"그놈 말이 사실이라면."
오가위가 덤덤하니 대답했다.
잠시 더 대화를 이어 갔지만 목적지가 가까워 오자 두 사람은 침묵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들이 알아차릴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다.
오가위는 당자윤에게 전해 들은 말을 상기했다.
‘안에 있는 건 다섯. 경상이 둘, 중상이 셋. 그중에 우두머리인 이지강의 상태는 최악이라 했으니…….’
어린아이의 팔목을 비트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다.
허나 그런 방심이 며칠 전의 실수를 만들어 냈다. 다시는 그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됐다.
이번엔 완벽하게 끝낸다.
오가위가 수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자그마한 인가를 빼곡하게 둘러쌌다.
아직까지는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
오가위가 입을 열었다.
"시작해 보자고."
자신들을 죽이러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가의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바로 사라진 당자윤 때문이었다.
물을 마시고 오겠다고 나간 그가 몇 시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당자윤을 찾기 위해 경상을 입은 두 사내가 인근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자윤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이지강의 표정은 착잡했다. 간신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못 찾았느냐?"
"네,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큰일이군그래.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할 터인데 어떻게든 흔적을…… 쿨럭."
말을 하다 힘에 겨웠는지 이지강은 잔기침을 토해 냈다. 기침을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흔들린 듯 그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윽."
"제가 다시 한 번 찾아볼 터이니 염려 마시고 좀 쉬시지요."
사내가 서둘러 말했다.
가뜩이나 좋지 못했던 이지강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하는 모습에 걱정이 인 것이다.
다시 찾아보겠다는 말에 이지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뉘었다. 그리고 말을 끝낸 채로 생각에 잠시 사내의 머리는 복잡했다.
도망을 친 걸까?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인근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고 또…….
애써 여러 가지 가정들을 그려 내고 있던 그때였다.
쿵!
들려오는 소리에 지푸라기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이들이 움찔했다. 며칠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황에 대부분이 무척이나 지친 얼굴들이었다.
순간 바깥에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던 오가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들이 있다는 걸 알고 왔다. 그만 숨어 있고 나오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가에 숨어 있던 다섯 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그토록 몸을 감추고 있었거늘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잠시 몸을 뉘었다가 일어난 이지강이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놈이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자.
저 신이 난 듯한 특이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지강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벽을 짚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천무진이 자신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나타나 주길 바랐다.
허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가능성 없는 바람인지 정도는.
그저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그 끈에 매달려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도 안 되는 희망의 끈을 놓고,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어 버렸다.
꾸욱.
벽을 힘겹게 짚으며 이지강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장 큰 부상을 입고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하들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어서 숨으라는 듯 수신호를 하는 그들을 향해 이지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있는 걸 알고 왔다.
숨죽이고 있는다 해서 속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아마 이대로 계속 버티고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집에 불을 질러 결국 자신들이 제 발로 뛰어나오게 만들 놈들이다.
이지강이 옆에 있는 수하를 향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검을 다오."
"……대장."
"이 안에서 우습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더냐."
자신의 검은 절벽에 박은 이후 잃어버린 탓에 수하의 무기를 빌리려 하는 것이었다.
이지강의 말에 지푸라기 속에 아직도 숨어 있던 그 사내 또한 부끄러웠는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이지강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부축하겠습니다."
"반대편은 제가 하겠습니다."
서둘러 다른 사내도 다가오며 말을 받았다.
다가온 두 사내가 이지강을 부축하려 했고,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 발로 나가고 싶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최후의 순간일지라도.
이지강의 의지를 읽었는지 두 사내는 옆으로 거리를 벌리며 그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줬다.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힘든 두 사내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 모두가 걸음을 옮기는 이지강의 뒤편으로 따라붙었다.
탁.
문을 열며 가장 선두에서 이지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둑해진 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뒤편에서 바짝 따라붙은 수하 하나가 빠르게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대장."
"고맙다."
검을 받아 든 이지강의 시선이 이내 전방에 있는 적과,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아예 빠져나갈 길을 막아 버렸군.’
며칠 전에는 다른 이들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그런 요행 또한 아예 불가능해져 버린 모양새다.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
저들은 결코 자신들이 도망치는 걸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오가위와 마염이 이지강을 바라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 힘든지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실로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꽉 쥐고 있는 것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말해 주는 듯싶었다.
"뭐야 우리랑 또 싸우려고? 생각보다 멍청한 놈이네."
"무리야. 멀쩡했을 때도 우리 상대는 아니었잖아."
오가위와 마염의 말에 이지강은 검을 앞으로 겨눈 채로 답했다.
"나는 무인이다. 내 마지막은…… 내가 정한다."
의지를 꾹 담아 내뱉은 그 말에 뒤편에 있던 수하들 또한 눈에 힘을 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 싸움의 승패는 뻔하다는 걸 알지만, 이지강의 말대로 우습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에 마염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토해 냈다.
"큭큭, 그래? 어디 그 전의를 꺾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볼까!"
말과 함께 그가 손바닥을 휘둘렀다.
후우웅!
커다란 장력이 이지강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태가 좋지 못한 그를 지키겠다는 듯 한 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지만 그 정도 되는 자가 막아 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펑!
"크으읏!"
비명과 함께 사내는 밀려 나가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동시에 입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장력이 이지강을 덮었다.
콰콰쾅!
간신히 버티고는 서 있었지만 그의 상태는 더욱 망가져 버렸다.
비명을 토하지 않기 위해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검은 색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작 한 방이었다.
그 한 방조차 어떻게 하기 힘들 정도로 지금 별동대 무인들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바닥을 나뒹굴었던 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대장을 지켜라!"
창창!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지강의 앞을 막아선 세 명의 무인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적들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좁히는 이들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버틸 힘이 없는 이들 몇 명 정도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끝이 날 싸움.
그런데…….
슈유우웅!
유성우가 떨어지는 듯한 굉음에 모두가 고개를 치켜들었고, 그 순간 하늘에서 하나의 신형이 떨어져 내렸다.
쿠웅!
그 신형은 정확하게 두 무리의 가운데에 착지했다. 주변으로 이는 흙먼지, 그리고 불어오는 후폭풍까지.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마치 태풍을 만난 것처럼 휘몰아쳤다.
나무와 흙들, 심지어 바람까지도.
파바밧!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는 충격파를 느낀 오가위와 마염은 서둘러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채로 흙먼지가 피어오른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오가위의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뭐지?’
주변으로 흩어져 가는 흙먼지들. 그리고 그 정중앙에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싸아아아.
동시에 주변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한 바람이 보다 빠르게 흙먼지들을 밀어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
바람에 휩쓸려 미친 듯 펄럭이는 옷자락과 붉은 검신의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특별해 보이는 인물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적과 아군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그 한 명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유성처럼 떨어져 내려 주변의 모든 것들을 뒤흔들어 버린 모습.
그 모습은 흡사 하늘에서 신이 떨어져 내려온 것만 같았다.
천룡성의 작은 주인.
천무진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늦었습니까?"
물어 오는 질문에 이지강이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닙니다. 딱 좋게 오셨습니다."
힘겹게 말을 내뱉는 순간 목이 콱 하고 막혀 왔다.
얼마나 기다렸던 이인가.
그렇지만 그저 헛된 희망이라고만 여겼다.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는 그 어떠한 단서조차 남기지 못했으니까.
그랬기에 모든 게 끝났다 여겼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다.
천무진은 별동대의 생존자들을 등진 채로 입을 열었다.
"뒤에서 보고 계시죠."
천인혼의 붉은 검신이 핏빛을 뿜어 댔고, 천무진이 적들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저놈들을 어떻게 만들어 버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