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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99화 (99/293)

99화. 섬멸 ― 까불지 마 (2)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천무진이 놀란 적들을 응시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 정체가 중요한가? 그보다 너희들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는 걸 더 신경 써야 할 거 같은데."

오가위와 마염이 데리고 온 스무 명의 수하들 중에는 이제 서 있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들 정도를 처리하는 건 천무진 일행 중 한 명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

그런데 셋 모두가 함께 날뛰고 있으니 정리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치 커다란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세 사람이 움직이는 곳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버티고 서 있는 수하가 채 다섯조차 남지 못한 상황.

오가위가 마염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쩌지?』

『이 싸움…… 못 이겨.』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이미 끝난 싸움이나 다름없다. 천무진 한 명을 상대하며 오가위는 한쪽 팔이 찢겨져 나갔고, 마염은 등이 베였다.

둘이서 눈앞에 있는 천무진 하나를 감당해 낼 수 없거늘, 뒤편에서 날뛰는 나머지 세 사람까지 개입하게 된다면 그 결과야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에 두 사람은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오가위가 뭔가를 생각해 냈다.

『정면으로는 어찌 못하니 답은 하나지.』

『뭔데?』

『우리가 죽이려고 했던 별동대 대장 놈. 그놈을 인질로 잡아야겠어.』

오가위의 전음에 마염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여겨진 것이다. 물론 그 또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천무진이 막아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 뒤편에 있는 이지강을 인질로 잡는다는 건 꽤나 복잡한 일이었다.

허나 그것이 천무진을 꺾는 것보다 어려운 건 아니었다.

마염이 곧바로 답했다.

『천룡성 놈의 발은 잠시지만 내가 잡아 보지. 네가 인질을 붙잡아.』

말을 끝낸 그가 자신의 무기를 다시금 들어 올려 괜히 더 화려하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연검 특유의 낭창거리는 움직임이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슉슉.

마치 뱀처럼 요리조리 휘둘리는 연검을 쥔 채로 마염이 슬쩍 거리를 좁혔다.

스스슥!

몸을 날린 마염의 연검이 기기묘묘한 변화를 선보이며 천무진에게 밀려왔다.

창창창.

천인혼이 그 모든 변화를 단번에 집어삼키는 그 찰나 오가위가 슬그머니 옆으로 움직였다.

목표는 하나, 바로 천무진의 뒤편에 있는 이지강이었다.

그를 잡아서 어떻게든 이 위기를 빠져나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옆으로 치고 나가는 오가위의 모습이 보였지만…….

천무진의 눈은 다시금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잠시 밀려 나갔던 마염이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달라붙어 오고 있었다.

촤촤촤촤촤악!

천무진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오가위게로 향하는 걸 마염 또한 알아차렸다. 그랬기에 곧바로 이처럼 매섭게 내공을 실은 공격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쪽으로 움직일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만약이라도 오가위를 막으려 든다면 빈틈을 파고들어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생각했고,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최소한 발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런 마염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뒤편으로 움직일 거라 여겼던 천무진이 그쪽에다가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도리어 마염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마염은 다급히 검로를 바꿔야만 했다. 허나 변해 가는 그 움직임을 천무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천인혼이 정확하게 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카카카캉!

연달아 끌리는 검, 동시에 천인혼에서 뿜어져 나온 강대한 기운을 견뎌 내지 못하고 연검이 튕겨져 나갔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파앙!

천인혼과 충돌한 연검이 허공에서 조각조각 나며 힘이 밀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마염이 있었다.

퍽퍽퍽!

깨진 연검들이 몸에 틀어박히며 마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몸을 밟은 채로 천무진 또한 착지했다.

쾅!

발로 마염을 땅에 처박아 버린 천무진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백아린!"

입에서 터져 나온 백아린이라는 이름.

그때 오가위의 뻗은 손이 막 이지강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허나…….

번쩍!

날아든 대검이 뻗어진 오가위의 손을 날려 버렸다.

동시에 대검과 함께 몸을 던진 백아린이 허공에서 독수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쾅!

하늘에서 날아드는 발이 정확하게 오가위의 안면에 적중했다. 그는 피를 뿌리며 그대로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컥컥."

바닥에 쓰러진 그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동시에 박살이 난 이를 뱉어 냈다.

천무진으로 인해 왼쪽 팔이 완전히 날아갔던 상황이다. 그 직후에 백아린이 날린 대검에 오른손이 잘려졌다.

두 팔이 모두 망가진 그 찰나에 날아든 발길질이었기에 막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갑자기 달려드는 오가위 때문에 움찔했던 이지강은 거의 코앞에서 날아가 버린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불어 자신의 앞에 착지한 백아린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기민한 움직임 때문이다.

‘적화신루에 어찌 이런 무인이…….’

청아원 사건을 마무리 지을 때 백아린의 뛰어난 추리력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그건 이 여인이 가진 능력의 일부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백아린이 천무진에게 시선을 줬고, 이미 마염을 쓰러트린 그가 성큼 오가위를 향해 다가갔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오가위는 이미 치명상을 입어 헐떡이고 있었다. 양쪽 팔이 잘려지며 대량의 피를 쏟아 냈고, 백아린에게 가격당한 얼굴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천무진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그를 점혈해 혼절시키고는, 이내 다른 혈도들을 눌러 피가 쏟아져 나오는 걸 멈추게 만들었다.

간단한 뒤처리가 끝나자 천무진이 백아린 쪽으로 다가갔다.

다가간 천무진이 그녀의 옆에 섰고, 그런 그를 무림맹의 별동대들은 경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마치 오래된 전설처럼 들어만 오던 그 천룡성의 무인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신기했고, 또 두근거렸다.

그렇게 천무진이 모두의 관심을 끌고 있는 그때 백아린이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한창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갑자기 전음을 보내 막아 달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켜내는 걸 실패했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쪽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봐, 내 생각대로 됐잖아."

천무진은 담담하니 대답했다.

빠져나가는 오가위를 확인하는 순간 이지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군지 확인했다. 그것이 백아린이었고, 그녀의 실력을 이제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뒤를 맡겼던 것이다.

확신 어린 천무진의 대답에 오히려 백아린이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녀의 고개가 옆에 있는 이지강에게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물론이네. 신세를 졌군."

백아린은 괜찮다 말하는 이지강을 잠시 살폈다.

대답과는 달리 몸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

"뭐 보는 대로네. 그래도 감사한 일이지.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어디인가."

말을 하는 이지강의 얼굴에는 깊은 어둠이 묻어났다. 함께 싸우다 죽어 버린 다른 별동대 무인들이 생각난 모양이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생존자는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입니까?"

이곳에는 이지강과, 뒤편에 있는 네 명의 수하들만이 전부였다. 물어 오는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아, 그러고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는데."

문득 사라진 한 명의 별동대원을 기억해 낸 이지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재차 물었다.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군요."

"모른다고요?"

"예, 물을 마시러 간다고 나갔다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이라 저희도 난감해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당자윤이라고 사천당문의 인물입니다."

당자윤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천무진과 백아린은 동시에 표정을 팍 구겼다. 그리 유쾌한 기억이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허나 개인적 원한으로 그냥 두고 가기는 애매했기에 천무진이 물었다.

"언제 사라졌습니까?"

"반나절 이상은 족히 되었습니다."

"그렇게나 오래 말입니까?"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기에 천무진이 되물었고, 이지강은 대충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렸다. 어떻게 도망을 쳤고 이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숨어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어 당자윤이 사라졌던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말해 줬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생각은 간단하게 정리됐다.

잡혔거나 아니면…….

‘제 발로 도망쳤겠지.’

당자윤의 성품을 직접 겪어 봤기에 천무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자였다. 상황이 좋지 않자 거동하기 힘든 동료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곳에 있을 이들이 모두 죽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면 말이다.

옆에 있는 수하들의 도움으로 근처 자리에 앉은 이지강이 힘겹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저희를 어찌 찾으신 겁니까?"

이지강은 그 사실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어쩌면 천무진 일행이 자신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긴 했지만,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어떠한 단서조차 남기지 못했으니까.

헌데 이들이 숨어 있는 자신들을 찾아냈다. 그 방법이 무척이나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강의 질문이 던져질 무렵 싸움을 끝내고 근처로 다가와 있던 단엽이 갑자기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이내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풀어 그의 무릎으로 휙 던졌다.

얼결에 기다란 무엇을 받아 든 이지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이게 뭔가?"

"직접 풀어 보면 알 거 아냐."

짧게 대답하는 단엽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무릎에 있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풀기 시작했다.

천에 간단하게 싸여져 있었던 탓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을 모두 푼 이지강이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대협의 검이에요. 그것 덕분에 별동대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이지강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바로 절벽에 박혀 있던 바로 그의 검이었다. 그는 건네받은 검을 어루만지며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네 녀석이…… 우리를 살렸구나."

무인에게 무기란 단순한 싸움의 도구가 아니다.

때로는 어떠한 가족이나 친구보다도 가깝고, 생명을 함께하는 단 하나뿐인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종종 무기가 주인의 목숨을 살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언제나 귓등으로 가벼이 넘겼던 그 말.

헌데 우습게도 자신의 검이 그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백아린이 슬그머니 천무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우선은 빠르게 무림맹에 돌아가야지.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당자윤은 어떻게 할까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그자까지 우리가 직접 찾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찾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백아린은 천무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들이 직접 찾는 건 아닌 것 같다 말 한 이유와 일맥상통했으니까.

분명 인근에서 적들에게 잡혔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그렇다면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적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확률 상 제 발로 도망을 쳤다 보는 것이 맞다.

백아린이 곧바로 답했다.

"혹시 모르니 적화신루에 그자의 용모파기를 전달해 두는 것 정도로 마무리하죠."

"그 정도면 충분해. 그보다……."

천무진은 살아남은 별동대의 대원들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왜 별동대가 그들의 표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천무진이 내린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천무진이 천인혼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짧게 말을 이었다.

"서둘러 돌아가야겠어."

무림맹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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