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의심 ― 하지만 아닙니다 (2)
천무진의 승낙이 떨어지자 당자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몸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굶었고, 그 안에는 크게 다친 환자들도 존재했죠. 그대로 뒀다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어. 그래서?"
"저는 모자란 물을 뜨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차마 그냥 물만 가지고 들어갈 순 없었습니다. 부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로 며칠을 굶은 동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나마 전 멀쩡한 상태였고, 당연히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무진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당자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을은 워낙 거리가 있으니 그곳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여 혹여라도 인근에 자그마한 인가가 있다면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와중에 저희를 찾던 적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곧 그건 오히려 그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긴말을 내뱉은 그가 호흡을 한 번 고르고는 다시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반대로 도망쳤습니다.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동료들을 위해 혼자서 죽음을 맞을 생각이었죠. 당연히 제 존재를 눈치챈 그자들 중 일부는 저를 뒤쫓았고, 전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하지만 제 실력으론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두 시진가량 시간이 흘렀을 때 뒤를 잡혔고, 그곳에서 적들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패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패한 절 끌고 자신들의 거처로 향했고, 전 그곳에서 하루 가까이 혼절해 있었습니다."
끔찍한 기억을 꺼내듯 힘겹게 말을 내뱉고 있는 당자윤. 그리고 당자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어느 산채였습니다. 절 잡아갔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전 그곳에서 산채의 도적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지요. 그렇게 죽는가 싶었는데 그때 그 산채를 신월문(新月門)이 급습한 겁니다."
"신월문이?"
신월문은 중도 성향의 문파 중에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커다란 단체다.
당자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들 덕분에 전 그곳 산채에서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무림맹으로 안내해 준다는 그들의 말을 뿌리치고 곧바로 동료들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더군요."
그때가 생각이라도 나는 것처럼 잠시 먹먹한 표정을 지어 보인 당자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레 저만 살았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껴 괴로워하기도 했지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저는 무림맹에 당시 벌어진 모든 일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전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쉼 없이 이곳 사천당문으로 달려왔던 겁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서야 그때 함께 남았던 대원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찌나 다행인지……."
말을 하며 당자윤은 잠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치 안도한다는 듯한 모습, 그렇지만 천무진은 그런 그를 여전히 무표정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무진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연기를 하던 당자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재차 말했다.
"그렇게 전림(田林), 주춘(株椿), 안순(安順), 흥문(興文), 좌탕리(左糖里)를 거쳐 이렇게 돌아온 겁니다."
마을 이름들을 쭉 나열한 당자윤은 이내 오는 도중 있었던 간단한 일들에 대해서도 부연으로 설명을 달았다.
그 설명들은 꽤나 자세했고, 또 관련된 누군가가 있어 증명하기도 간단했다.
길게 말을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천무진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좋아. 어차피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캐물을 부분이 아니니까. 무림맹 내에서 이번 일에 대해서 꽤나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잘 해명해야 할 거야. 어쨌든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하지."
굳이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가 없다 판단됐는지 천무진은 거기서 대화를 끊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도는 그때 당자윤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기…… 몰라 뵙고 실례를 끼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절대로 그 같은 결례는 끼치지 않았을 겁니다."
여태 쌓여 온 모든 감정들을 좋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적으로 지내고 싶지는 않은 상대였기에 나름 신경 써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사과가 틀린 거 아닌가?"
"……예?"
"만약 정체를 알았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면 안 되지. 넌 지금도 나에게 사과한 게 아니야. 내 신분에 사과를 한 거지."
천무진의 말에 당자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망할 자식. 잘난 척은!’
당자윤은 속으로 열불이 끓어올랐지만 힘겹게 그런 감정을 감춘 채로 수긍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조심하겠습니다."
"됐어."
짧게 말을 끊은 천무진이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의 눈빛은 맞은편에 자리한 당자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식사 자리가 끝이 났다.
나중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당소련과 헤어진 천무진과 백아린은 곧장 거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던 도중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어때요? 당자윤에게서 의심할 만한 부분이 좀 있었어요?"
"아니, 없어. 살아나게 된 경위도 있고, 그 증인이 되어 줄 게 신월문이라면 결코 그 말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겠지. 거기다가 정확하게 이동한 경로도 말해 주더군."
"무림맹에서 이번 일에 대해 추궁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요?"
"빠져나갈 거야. 증거나 증인이 너무 많거든."
일정 부분 의아한 게 있겠지만 전부 증빙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딱 맞아 떨어지는 아귀.
그리고 넘치는 증거와 증인들.
분명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느껴져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왜일까?
정면을 응시하며 걷던 천무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모든 앞뒤가 딱 들어맞아. 그런데 말이야…… 그래서 이상해."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사천당문 근처까지 다가와 쓰러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거쳐 온 마을의 이름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거기다가 그 마을들을 전부 천무진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마치 한번 조사를 해 보라는 것처럼.
물론 그냥 기억하고 있다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천무진은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마치 모든 게 정확하게 짜여 있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백아린은 단번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조작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응, 맞아."
"증명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요?"
"아쉽게도 아직은."
자신의 예상대로 이 모든 것이 조작됐다면 당자윤이 언급한 마을로 사람들을 보내 캐내 봐도 그곳에서는 그를 봤다는 증언을 할 이들이 꽤나 많을 게다.
게다가 이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신월문을 움직여야 하고, 각 마을에 증인과 그에 맞는 증거들을 완벽하게 심어 놔야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증인으로 나설 이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끝까지 이 거짓말을 유지할 정도의 인물이어야 할 게다.
그 말은 곧 이건 당자윤 혼자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이 정도 일을 벌일 힘이 그에겐 없었으니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생각대로 만약 당자윤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거라면 아마도…… 그들이겠지."
"그들이 당자윤을 통해 원하는 게 뭘까요?"
"글쎄. 하지만 확실한 건 당자윤이라는 인물 자체를 원한 건 아닐 거라는 거야. 그들에게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자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건 역시나 사천당문이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당자윤은 필요 없겠지만, 그의 가문인 사천당문은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오대세가의 하나로 중원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했으니까.
그런 사천당문을 쥐고 흔드는 건 무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분명 완벽히 처리했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천무진은 백아린에게 부탁했다.
"혹시 모르니까 당자윤이 들렀다는 마을을 좀 조사해 줘. 그럴 확률은 적지만 뭔가 의심스러운 정황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전림, 주춘, 안순, 흥문, 좌탕리라더군."
"그렇게 할게요."
천무진의 말대로 뭔가를 찾을 확률은 그리 높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냥 넘어갈 부분은 아니었다.
부탁대로 하겠다고 대답한 그녀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며칠 후에 적화신루 회의가 있어요. 아직 정식 총회를 할 시기가 아니긴 한데 급한 안건이 하나 있어서, 급히 모일 예정이거든요."
"그럼 또 며칠 자리를 비우는 건가?"
"아뇨, 이번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서요. 오고 가는 시간까지 다 포함해서 하루면 충분할 거예요."
일전의 회의에서 백아린은 앞으로 있을 적화신루 총회를 자신이 있는 곳 근처에서 열릴 수 있게 해 달라는 특혜를 요청했다.
애초부터 진짜 루주인 그녀의 요청, 가짜 루주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
자연스레 이번 임시 총회도 지금 거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리게 되었다.
덕분에 백아린은 큰 시간 낭비 없이 할 일을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이번 임시 총회의 안건은 천룡성의 일도 있었지만, 역시나 개방 방주와의 문제를 결정하기 위함이 가장 컸다.
만나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하루면 된다는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오래 자리를 안 비워서."
"왜요? 저 없으면 뭐 막 심심하고 그래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린 천무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짧게 답했다.
"그쪽이 없으면 내가 할 일이 엄청나거든."
"쳇."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에이,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이 그녀를 응시한 채로 물었다.
"뭘?"
"원래 나중에 해 주려고 했던 말이 하나 있었는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못 참겠어서요. 그냥 지금 말해 줄게요. 조만간 좋은 소식 하나 전해 줄 것 같아요."
"좋은 소식? 그게 뭔데?"
궁금하다는 듯 묻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절대 말해 주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녀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만요. 나머지는 나중에요. 나중에 말해 줄게요."
* * *
그 시각 무림맹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떠한 장원에서 한 명의 노인이 막 자신에게 날아든 서찰 한 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노인은 칠십은 족히 되어 보였고, 하얀 백의에 긴 수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긴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려 위로 고정시켰고,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이었다. 눈빛은 따뜻했지만 맑게 빛나는 눈동자는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서찰을 확인하던 노인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재미있는 서찰 한 통이 왔군요."
방 안에 있는 건 노인 하나뿐이 아니었는지, 그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연서라도 왔는가?"
"거참, 제 나이에 무슨 연서입니까."
노인은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서찰의 정체를 그 상대에게 전달했다.
"적화신루에서 연락이 왔군요. 저와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는가. 내가 자네를 가둬 둔 것도 아니고. 그대 뜻대로 하면 되지 않는가, 진균(陳均)."
노인의 이름은 진균.
그리고 세상은 이 노인을…… 의선(醫仙)이라 칭했다.
중원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의원 중 하나.
그에게 적화신루에서 연락을 취해 온 것이다.
의선이 실실 웃으며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그럼 바둑은 누구랑 두시려고요."
"아차, 바둑을 생각 못 했군그래. 그건 좀 문제인데……."
고민스럽다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크게 결심했다는 듯 소리쳤다.
"에잉! 그래도 바둑 때문에 자넬 계속 잡고 있을 순 없지. 뭐 자네가 나와 바둑 두는 게 더 좋다면 굳이 가지 않아도 좋고."
유쾌한 목소리에 의선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원하는 바가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마음에 없으신 소리 참으로 잘하십니다. 애초에 적화신루 쪽에 제가 있는 곳의 정보를 흘리신 것이 천 대협이시지 않습니까."
"하하, 이런 들켰는가?"
"왜 그리도 숨어서 지내던 절 애타게 찾으셨나 했는데…… 역시 다른 생각이 있으셨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하는 의선의 눈에 바둑판을 앞에 둔 채로 웃고 있는 한 명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는 의선과 비슷해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이나 달랐다. 젊은이들이 무색할 만큼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쳤고, 표정과 자세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압도적인 기백과,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특유의 패왕과도 같은 기운을 뿜어 대는 인물.
큰 키와 나이에 맞지 않게 아직까지도 너무나 튼튼해 보이는 신체까지.
의선 또한 보통 노인이 아니라는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것도 이 인물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도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
천운백(天雲佰).
천무진의 스승이자 천룡성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그가 쥐고 있던 흑돌을 바둑판 위 빈자리에 탁 내려놓았다.
어지럽던 바둑판 위의 형세가 그 한 수로 순식간에 급변했다.
천운백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바둑은……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