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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14화 (114/293)

114화. 제안 ― 시간 좀 괜찮으실까요 (2)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어교연의 말에 특별히 그들과 동행한 천무진이다. 하지만 그가 자리한 곳은 무림맹과 그리 멀지 않은, 꽤나 사람들이 많은 길가의 한쪽이었다.

근처에는 노점을 비롯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옆의 거리도 오고 가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분명한 건 지금 이곳이 이야기를 하기에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교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보다는 조금 더 조용한 장소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내가 당신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더 욕심내면 그거까지는 들어 줄 생각이 없어. 선택해. 여기서 하든지, 아니면 그만 헤어지든지. 다른 이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면 전음으로도 충분하잖아."

애초부터 모르는 여인과 조용한 장소까지 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과거의 삶에서 당했던 기억이 있는 천무진으로서는 이 정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려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배려를 해 주는 건 이들이 적화신루의 사람들이니까. 또 백아린, 그녀의 동료들이라 생각해서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사람 많은 장소라고 할지언정,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굳이 따라와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확고한 천무진의 말투에 어교연은 슬그머니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

허나 지금 그와 대화를 원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것 또한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길 한쪽에 위치한 노점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기로 가서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떨까요? 아무리 그래도 길 한복판에서는 사람들한테 너무 치여 대서요."

천무진은 어교연이 가리키는 노점을 바라봤다.

어차피 같은 길목에 위치한 곳이었기에 천무진 또한 그 정도는 수긍할 수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가지."

말을 마친 천무진이 먼저 성큼성큼 노점상으로 향했다.

노점에는 자그마한 의자 몇 개가 준비되어져 있었고, 그중에 하나에 천무진이 걸터앉았다.

뒤따라 도착한 어교연이 자리에 앉았고, 그런 그녀의 뒤편에 경패가 위치했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노점 주인이 다가왔다.

"뭐로 가져다 드릴까요?"

"그냥 경단 몇 개랑 엽차 정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간단한 먹거리 몇 개를 주문한 이후 어교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가벼운 말을 던졌다.

"성도는 언제 와도 생기가 넘치네요. 너무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천무진과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던진 말이긴 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예전부터 백아린이 맡고 있는 이 인근 지역을 무척이나 탐냈던 그녀다. 특히나 이곳 사천성 성도는 요충지이자, 수많은 일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그만큼 적화신루에서도 중요한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가벼운 몇 마디 말에도 천무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고, 이내 노점상 주인이 앞에 가져다 놓은 엽차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엽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내게 할 말이라면 백아린을 통해 전달하면 될 텐데."

"백 총관을 통해 전달하기 조금 어려운 말이니까요."

"해 봐. 그 어려운 말이 뭔지."

천무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어교연이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천룡성과 관련된 일을 앞으로 제가 맡았으면 해서요."

움찔.

찻잔을 든 천무진의 손이 멈칫했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이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왜? 백아린이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다고 하던가?"

"아뇨, 그녀의 생각이 아니라 그냥 제 뜻이에요."

움찔했던 천무진은 어교연의 이어지는 말에 그제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천무진은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백아린이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하는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천무진은 일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만큼 그녀가 일을 진행하는 데 가지는 비중이 크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당시 느껴졌던 감정 안에는 아쉬움이라는 것 또한 존재했다.

대체 왜?

허나 다행히도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처음엔 안도가, 그리고 이내 이런 말로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 버린 눈앞에 있는 상대에 대한 화가 슬금슬금 치고 올라왔다.

그런 천무진의 상태도 모르고 어교연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백 총관 능력 있죠. 일 처리도 무척이나 깔끔하고요. 저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서서 저와 함께 일하시는 게 어떠냐고 제의를 하는 이유는 그토록 뛰어난 백 총관보다 제가 더 많은 걸 천 공자님께 드릴 수 있다 확신하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뒤편으로 손을 뻗자, 경패는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재빠르게 넘겼다.

수십 장은 넘어 보이는 종이 뭉치를 든 채로 어교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천룡성의 일을 제게 맡겨 주시면 백 총관과는 달리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릴게요. 첫째로……."

"됐어, 거절하지."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조건을 내걸 준비를 해 왔던 어교연이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는 그것과 관련된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이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투자할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을 당하니 그녀는 멍하니 천무진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어교연이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야기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들어 볼 필요도 없으니까. 난 백아린과 계속 같이 갈 생각이야. 당사자가…… 날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더 많은 걸 드릴 수 있어요. 천 공자께서 원하시는 더 많은 도움도 지원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것들도 얼마든지 더해 줄 수 있다고요."

어교연이 다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천무진은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나한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건 당신이 아니라 그녀야."

그의 단호한 얼굴에는 조금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교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간단해. 당신 능력이…… 그녀보다 못할 테니까."

"저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모르잖아요."

억울하다는 듯 어교연이 말했다.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아,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난 백아린, 그녀에 대해서는 알고 있거든."

몇 달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처음엔 몰랐던 백아린이라는 여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보다 나은 적임자는 아마도 중원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어교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항상 백아린에게 밀려 왔다.

그런데 자신의 실력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대가 무턱대고 백아린이 더 나을 거라 확신을 하고 있다.

그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랬기에 더욱 악에 차오른 듯 어교연이 말했다.

"정당한 기회를 줘요. 제 능력을 보고 나서도 그리 말한다면 그때는 물러나죠. 하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이런 평가를 하는 건 같은 총관인 저로서는 자존심의 문제예요."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기 위해 어교연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를 얻고자 했다.

우선은 끈을 부여잡고 그 이후에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줘 그 생각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말에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이죠. 제가 일 처리 하는 걸 보면 분명히 흡족하실 거고……."

"아니, 일에 관련해서가 아니야. 그 외적인 거."

"외적인 거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는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말이야, 아무나 안 믿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안 믿는 쪽에 가깝지. 그런데 그녀는…… 믿어.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믿고 있다고."

저번 삶으로 인해 천무진은 쉽사리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사내들에게도 그렇지만, 여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훌훌 털고 싶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과거의 그 길었던 시간 동안 받은 두려움은 그리 가볍지 못했으니까.

그런 천무진에게 많든 적든 믿음을 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의 대답에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교연이 대꾸했다.

"백 총관을 믿는다고요? 고작 그거 때문에 제 제안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 말씀하시는 거고요?"

"그래. 그게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는 가장 큰 이유야. 내가 백아린, 그녀를 조금이지만 믿으니까. 그건 지금의 나에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다시금 대답을 들었지만 어교연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깟 믿음이 뭐가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그딴 것들보다 지금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훨씬 많다 자부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 모든 것들을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었다.

허나 확실한 건 지금으로선 자신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우겨대는 건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분했고, 욕심도 났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어교연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보여 드리죠. 제가 그녀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그리고 또 천 공자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럼 그땐 생각을 달리해 주실 수 있으시겠죠?"

"그쪽한테는 안됐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확신 어린 천무진의 목소리에 어교연은 재차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그런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는 상황.

그녀가 몸을 돌리며 뒤편에 서 있던 경패를 향해 짧게 말했다.

"가자."

어교연은 곧바로 경패와 함께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천무진 또한 들고 있던 엽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천무진은 거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천무진과 어교연이 대화를 나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른 노점.

놀랍게도 그곳에는 백아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단을 든 그녀는 무척이나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태였다.

무림맹으로 오던 도중 생각지도 못하게 어교연을 발견한 그녀다. 그렇지만 더욱 놀란 건 그녀가 천무진과 동행하고 있었다는 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제법 거리를 두고 뒤쫓았고, 이곳에 앉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주워들었다.

어교연이 천룡성의 일을 자신이 맡고 싶다며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 백아린은 화가 치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교연의 개인적 욕심으로 적화신루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아린은 이어지는 천무진의 대답에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흔들림 없는 대답들.

자신을 믿는다는 그 한마디.

비록 그 믿음이 아주 작다고 계속 언급한 것이 조금 불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면 충분했다.

그것이 천무진이라는 사내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백아린은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천무진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종종 악몽을 꾸는 것 같았고, 작은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몇 번이고 목격했다.

혼자 자리할 때 눈동자에서 드문드문 드러나는 그 깊은 어둠까지도 잘 알고 있다.

마음속에 있는 정체 모를 커다란 응어리.

그게 뭔지 묻지도,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응어리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알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천무진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던 백아린이 뭔가 쑥스러운지 경단을 쥔 반대편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참내. 이상한 부분에서 감동을 주고 난리네. 괜히 사람 기분 이상하게."

기분이 뭔가 묘했다.

믿는다는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으로 날아와 박혀 버려서.

그랬기에 자신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당신과 같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백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천무진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녀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떠나라고 하기 전까지…… 저 또한 절대 당신 옆을 떠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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