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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16화 (116/293)

116화. 안건 ― 전혀 (2)

적화신루의 가짜 루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진자양이 말을 받았다.

"오늘 이렇게 긴급 총회를 열게 된 건 다름 아닌 사총관의 요청 때문이오. 그 안건이 뭔지는 본인에게 직접 들어 보겠소이다."

급히 총회가 열린 것이 백아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자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어교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비단 어교연뿐만이 아니었다.

적화신루의 실질적인 삼인자로 분류되는 자.

이총관 황균 또한 마찬가지로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저번 총회를 통해 어교연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정한 그다. 백아린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으로 분류한 직후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나도 쉽사리 요청해 본 적 없는 긴급 총회를 건방지게…….’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황균은 눈을 빛냈다.

만약이라도 오늘 꺼내는 안건에서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요량이었다.

적화신루 내에서 백아린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그때 백아린이 앞으로 걸어 나와 중앙의 길목에 섰다.

그녀는 먼저 적화신루의 가짜 루주가 있는 붉은 휘장 너머로 예를 갖추고는 이내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불러 모으게 된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허나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흐음, 사총관이 이리 모았다면 어련히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다만 전례에 그리 많지 않은 긴급 총회까지 열 일이라……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일지 궁금하군요."

백아린의 말에 답하는 황균의 말투에는 묘한 가시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백아린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적은 없는 상대.

그런 그가 자신에게 뭔가 불만스러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유가 뭔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교연에게 넘어간 모양이네.’

단순히 불편한 걸음을 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상대는 아니었으니, 답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알면서도 백아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천룡성이 무림맹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엔 저도 있었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앞서 그간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면……."

백아린은 무림맹의 별동대로서 움직이며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정보 집단인 적화신루의 고위층들.

당연히 어느 정도의 정보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상세한 설명보다 깊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백아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듣자 왜 그녀가 천룡성에 모든 걸 집중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조차 알지 못했던 모종의 세력.

그들이 뭔가를 벌이고 있고, 그것은 무림을 뒤흔들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일들이었다.

허나 백아린이 이들을 모은 건 그 같은 사실만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설명드릴 건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을 모이게 한 건 외부에서 들어온 요청이 하나 있어서예요."

외부에서 들어온 요청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번 더 집중됐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만 엿보는 어교연과 황균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개방 방주 장량이 루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 청을 해 왔습니다."

"개방 방주가?"

놀란 듯 황균이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이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이.

어찌 보면 동업자라 할 수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적에 더 가까운 관계라 봐야 옳을 게다.

오랜 무림의 역사상 개방은 적화신루를 그리 높게 쳐주지 않았다.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어서다. 그런 그들의 수장이 적화신루 루주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미 백아린을 통해 어떤 안건이 들어올지 사전에 알고 있었던 가짜 루주다.

허나 그가 모르는 척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이건 기회입니다! 개방과 적화신루가 동급이라는 걸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놓쳐선 안 될 거라 생각됩니다."

오총관 조광건이 급히 말했다.

허나 삼총관 서원은 생각이 조금 다른지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는 지금 만나서 득이 될 것이 있을는지요. 장량은 겉보기와 달리 위험한 자입니다.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조심만 하다가는 언제 그들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오총관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가는 것이 옳지요."

"그렇게 조심해서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이토록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언제까지……."

"조용. 모든 결정은 루주님이 내릴 것이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려 하자 진자양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분위기가 자신들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치우치는 걸 사전에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의견은 묻고 있지만 사실 이미 답은 며칠 전부터 정해진 상태였다.

지금 이 총회는 의견을 묻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진짜 루주 백아린이 내린 결정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한 자리.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임시 총회를 연 이유였다.

"흐으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휘장 안에 자리하고 있는 가짜 루주는 고민스러운 듯 소리를 흘렸다.

약 반각가량을 그렇게 고민하는 시늉을 해 보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개방의 방주를 만나 봐야겠군."

루주의 결단에 조광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지만, 반대로 서원은 입맛을 다셨다.

그 누구도 루주의 결단에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던 찰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개방 방주께 루주님의 뜻을 전하고, 약속을 잡도록 할게요."

"그렇게 해 주게."

둘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일총관 진자양이 나서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사총관의 안건은 이걸로 매듭짓고,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일들도 마무리 지었으면 하오. 우선은……."

진자양은 다른 안건들을 입에 올렸고, 이내 그것들에 대한 결론을 빠르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행되어 가는 회의에서 황균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가져온 안건을 듣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개방 방주와 관련된 것이다 보니 뭔가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사실 황균은 개방 방주와 약속이 잡힌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이번 일을 통해 적화신루에 뭔가 큰 득이 생기게 된다면 그 모든 공로는 둘 사이를 연결한 백아린에게 갈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젠장, 대체 어떻게 저런 일들을 귀신같이 잡아 오는 거야?’

각자의 생각들이 가득한 채로 총회는 끝을 맺었다.

총회는 끝이 났지만 언제나처럼 진짜 회의는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 일총관과 백아린, 그리고 한천만이 남은 채로 모두가 나갔고 그 이후에 휘장 안에 있던 가짜 루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짜 루주를 연기하는 인물이자, 일총관의 두 번째 부총관인 주서호(周西豪)가 백아린을 향해 예를 취했다.

"루주님을 뵙습니다."

"고생했어요."

말과 함께 그녀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고, 이내 네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진자양이 말했다.

"시간은 추후에 양측이 대화를 통해 정하도록 하면 될 것 같고, 만나는 규모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 부총관을 필두로 하여 한 오십여 명 정도 준비할까 싶은데……."

진자양은 개방 방주 장량과의 만남에도 가짜 루주를 자리하게 할 계획이었다.

허나 백아린의 생각은 달랐다.

"아뇨, 이번엔 제가 직접 만날 생각이에요."

"루주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네, 무슨 대화가 오갈지 장담할 순 없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것들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거기다가 장량은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정말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최악의 경우 가짜 루주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눈치챌지도 몰라요."

개방의 방주가 직접 움직였거늘, 적화신루 측에서 가짜 루주를 내세운다는 건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보다 확실하고 뒤탈이 없도록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진자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 정체를 드러내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물론이죠. 오늘처럼 이렇게 휘장을 둔 채로 만날 생각이에요. 사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렵지 않고, 역용술이나 간단한 분장 정도로 덩치도 속일 수 있고요. 그림자만 보고 제 정체를 알 수는 없겠죠."

백아린의 말에 진자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대로 가짜 루주인 주서호가 나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그 자리에 백아린 또한 동석을 해서 전음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장량이 단둘만의 대화를 원해서 모두를 물린다면 어찌하겠는가. 그 상황에서 백아린이 함께 남아 있겠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백아린의 뜻을 받아들인 진자양이 곧바로 물었다.

"그럼 인원은 어느 정도 규모로 하실 생각입니까?"

"그쪽 뜻도 들어 보고 정할 일이긴 하지만 가능하면 우리들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고요."

"……설마 두 분만 움직이실 계획인 겁니까?"

우리라는 말에 진자양이 놀란 듯 말했다.

백아린이 이렇게 말한다면 그 포함 대상은 언제나 한 명뿐이었다.

부총관 한천.

백아린은 한천과 단둘이 개방 방주를 만나려고 하고 있었다.

놀란 그를 향해 백아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가능하면 적은 인원끼리 자리하는 게 나으니까요."

"개방 방주의 뜻도 같을까요?"

"이야기는 해 봐야겠죠. 하지만 그쪽도 그리 번거로운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공산이 클 거예요."

우선은 개방에서도 두 사람만 움직이기를 청할 예정이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후에 다시금 규모를 정하면 될 일이다.

백아린의 말에 진자양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알고 진행하도록 하지요."

개방 방주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가 정리되어 가는 그 무렵 백아린이 퍼뜩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일총관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예, 하명하시지요."

"이총관과 육총관의 낌새가 조금 이상한데, 어리석은 행동 하지 못하도록 감시 좀 부탁할게요."

백아린의 말에 진자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총관까지 말입니까?"

"네, 잘은 모르겠지만 육총관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 같아서요. 여태까지와 다르게 저한테 적의를 드러내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총관 황균까지 거론되자 진자양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예전부터 어교연이 백아린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아린이 그냥 내버려 두라 명하기도 했고, 그것이 적화신루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아 방관을 해 오던 진자양이다.

허나 어교연에게 황균까지 가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적화신루 내에서 세 번째 서열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백아린을 적대시한다면 예전과는 비견할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진자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둘을 쳐 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아린은 적화신루의 진짜 루주다.

그녀가 마음먹는다면 두 사람을 이곳에서 쫓아내는 것도 가능했지만…….

백아린이 피식 웃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가능은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비록 사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능력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지금은 적화신루를 보다 높게 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때다.

어차피 그들이 적의를 지니고 있는 상대는 루주인 백아린이 아니다.

사총관인 백아린, 그녀를 적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이니 결론적으로 적화신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두 사람을 쫓아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적화신루를 위하여.

그 하나를 위해 지금은 그저 모르는 척 봐주고 있는 것뿐이다.

허나 그 두 사람이 결국 적화신루에 해를 끼친다 판단되는 순간이 온다면……

백아린이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두고 보죠. 아직은…… 칼을 뽑을 때가 아니니까요."

칼을 뽑을 때는 신중하게.

그리고 칼을 뽑았다면……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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