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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21화 (121/293)

121화. 이야기 ― 도와줄까 (1)

주란은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나타난 백아린의 모습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허나 그렇게 경악만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대검에서 쏟아져 나온 강기가 순식간에 밀려오고 있었던 탓이다.

주란이 서둘러 손바닥을 움직였다.

몇 차례나 내상을 입은 상황이라 막대한 양의 내공을 빠르게 뿜어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지금 이 공격은 간단하게 받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과감하게 마찬가지로 수강을 뿜어냈고,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 내는 것에 성공했다.

두 개의 강기들이 충돌하며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쿠웅!

반탄력으로 인해 백아린은 위로, 주란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볼썽사납게 떨어져 내리던 주란은 서둘러 몸을 회전시키며 아슬아슬하게 두 발로 바닥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공중에서의 격돌로 인해 결국 주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가 떨어져 나갔고, 그녀는 황급히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반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훨훨 날아갔던 백아린은 멀리에 있는 돌 위에 착지한 상태로 주란을 향해 강렬한 시선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도주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빠르게 소리쳤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버럭 내지른 소리에 명령 이후 가만히 싸움을 관전만 하고 있던 화접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들은 주란 근처로 모여들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화접들에게 둘러싸인 주란을 보며 백아린은 가볍게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결국 혼자선 무리라는 걸 알았나 봐? 뭐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으니 별반 놀랍진 않네."

처음 염려했던 대로 화접들까지 싸움에 끼어들게 되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내상이 깊은 탓에 주란이 처음처럼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니까. 그렇게 된 이상 저들 정도 되는 이들이 돕는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으드득.

주란은 절로 이가 갈렸다.

마치 백아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처음 싸움의 시작부터 해서 도망을 치려 했던 그 순간까지.

마치 모든 걸 알고 준비한 것처럼 백아린은 그에 맞춰 대응했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자신은 적잖은 내상을 입어 제 실력을 모두 뿜어내기 어렵게 되어 버렸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망치려던 것조차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예상치 못하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지만 결국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화접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란은 남아 있는 화접들의 정확한 숫자부터 파악했다.

‘스물네 명. 숫자는 제법 되긴 하지만…….’

이 정도 숫자라면 어지간한 무인들을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긴장조차 하지 않았을 게다. 다만 문제는 그 상대가 우내이십일성 수준에 들어선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상대는 자신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아니…… 강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스물네 명의 화접은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결국 싸우게 된다면 이들 화접의 힘을 이용한 채로 자신이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건데…….

주란은 바삐 머리를 굴렸다.

만약에라도 백아린을 죽이겠다며 화접들과 같이 싸우다가 그들의 숫자만 줄어들게 된다면 결국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에 비해 지금이라면 이들 모두를 내주고 기회를 엿보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여기서 주란은 빠르게 선택을 내려야 했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걸어 보느냐 아니면…… 수하들을 방패로 삼고 도망치느냐.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화접들의 힘이 더해진다 해도 이길 확률은 삼 할 미만이다. 주란에게는 절반조차 되지 않는 확률에 자신의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생각이 정해진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주란이 명령을 내렸다.

"연옥수라진(煉獄修羅陣)을 펼친다."

연옥수라진은 한 명의 상대를 상대할 때 극히 위력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진법이다. 상대를 삥 둘러싼 채로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고 쉼 없이 몰아치는 공격성을 지녔다.

겉으로 보기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 보일 법도 했지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연옥수라진을 선택한 건 자신의 움직임이 보다 자유스러울 수 있었고, 원한다면 화접들을 하나씩 제물로 삼아 최대한 시간을 끌기 용이한 부분이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서 있는 백아린의 주변을 재빠르게 에워싼 화접들은 무기를 뽑아 든 채로 주란의 명령을 기다렸다.

진법 안으로 성큼 들어선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개진!"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화접들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옷자락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훅훅훅훅.

바람이 뒤엉키며 요란한 소리들이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백아린의 감각은 그들 모두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머리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펼쳐진 연옥수라진.

이윽고 공격이 터져 나왔다.

타앙!

한쪽에 위치한 화접 하나가 먼저 짧게 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백아린은 재빠르게 발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날렸다.

발아래 있던 커다란 돌이 매섭게 굴러가며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그 순간 다른 쪽에 있던 화접이 백아린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 진법을 꽤나 연습해 왔던지 동시에 뒤편에서 다른 이의 움직임 또한 느껴졌다. 여러 개의 움직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백아린의 감각에 걸려들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결국 이 연옥수라진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을 상대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주란, 바로 그녀다.

모두의 움직임을 읽어 내면서도 백아린은 멀찍이에서 기회를 엿보는 주란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이 진법의 의미가 싸우려는 것인지, 도망치려는 것인지부터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파앙! 팡!

날아드는 검을 가볍게 대검으로 받아 내며 백아린은 슬쩍 빈틈을 드러냈다.

만약이라도 연옥수라진이라는 진법을 통해 자신과 싸울 생각이라면 반드시 달려들었어야 할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찰나의 틈이긴 했지만 저 정도 실력자가 본다면 분명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백아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금 도망칠 생각인가 보네.’

그걸 확인한 이상 백아린 또한 머뭇거릴 이유는 사라졌다.

백아린이 대검을 쥔 손에 보다 많은 힘을 불어넣었다. 막 달려들던 두 명의 화접이 대검에 맞고는 땅에 처박혔다.

이내 백아린은 몸을 돌려 주란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주변을 향해 대검에 휩싸인 검기를 쏟아 냈다.

파파파팡!

펼쳐지고 있는 연옥수라진을 잠시나마 움츠러들게 한 그 찰나 백아린은 곧바로 주란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굴렀다.

순식간에 진이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뒤편의 빈틈이 사정없이 드러났고, 당연히 화접들 또한 재빨리 몸을 날렸다.

자그마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란을 향해 달려든 건 괜히 시간을 끌리다가 그녀를 놓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백아린을 보며 주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쓰러트릴 상대를 뒤에 둔 채로 저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이쪽으로 달려든다는 건 곧 자신의 속내를 읽어 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치잇, 눈치도 더럽게 빠르군.’

수하인 화접들보다 먼저 자신의 속내를 읽어 낸 백아린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주란 또한 쥐고 있던 검을 움직였다.

비록 내상을 입어 파괴력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싸우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으니까.

앞으로 껑충 뛰어오른 주란의 검이 지(之)자를 그리며 백아린의 양쪽으로 빠르게 휘몰아쳤다.

백아린이 양쪽을 번갈아 공격해 들어오는 주란의 검을 받아 내는 찰나 뒤편으로 다가온 화접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슈슈슉!

백아린은 힐끔 시선을 뒤편으로 줘서 그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는 곧장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대검을 후려쳤다.

쾅!

달려들던 화접들의 몸이 사방으로 밀려 나갔고, 덩달아 주란의 다음 공격 또한 무위로 돌려 버렸다.

껑충 뛰어올랐다 착지하는 백아린의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그 공격에 휘말린 화접들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걸 막기 위해 주란이 재빠르게 검을 움직여 흐름을 끊어 버리긴 했지만, 이미 몇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이후였다.

주란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해! 진형이 무너졌잖아!"

완벽한 원형이 되어야 했거늘 백아린이 한쪽으로 밀고 들어오며 균형이 무너져 버린 상황.

급히 몇몇이 투입하며 백아린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주란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발을 꽁꽁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백아린의 절묘한 자리 선점으로 인해 빠르게 도망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주란으로서는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함부로 등을 보였다가는 뒤편에서 공격을 당할지도 몰랐기에 조금 더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올려!"

진법의 회전력을 더욱 올려 정신없이 휘몰아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주란의 명령대로 화접들은 보다 빠르게 공격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차차창!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백아린은 한 손에 있는 대검을 이용해 밀쳐 냄과 동시에 몸을 뒤로 젖혔다.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무기들, 그 순간 백아린의 발이 주변에 있던 이들을 휩쓸었다.

퍼퍼펑!

가능하면 싸움에 개입하지 않으려던 주란이었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웠기에 어쩔 수 없이 검을 움직여야만 했다.

탁!

거리를 좁히며 내뻗은 일격이 백아린의 미간을 노렸다.

파앙!

대검이 비어 있는 공간을 파고들었거늘 백아린은 능숙하게 손바닥으로 검의 옆면을 후려치며 방향을 비틀었다.

내공이 실려 있는 공격이었기에 손바닥에서는 재차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웅!

손바닥이 주란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검을 바닥에 팽개치며 장법을 펼쳤다.

쩌엉!

두 손바닥이 마주치며 주변으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며 서로를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그렇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인 주란의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우웁."

뒷걸음질 치던 주란은 재차 뒤틀리려는 속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힘도 문제였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저 고강한 내공이 주란의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간 탓이다.

"망할!"

화가 나 소리를 내지른 주란이 바닥에 있는 검을 주워 들고는 곧바로 휘둘렀다.

파앙!

날아드는 검기에 다른 화접들을 상대하고 있던 백아린의 옷깃이 터져 나갔다. 어깨 부분에 상처가 생겨나긴 했지만 그 상태로 그녀는 마주하고 있던 세 명의 화접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란의 표정이 좋지 못한 건 당연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 작전이 모두 물거품이 될 텐데…….’

스물네 명에 달하던 화접의 생존자 중에 절반 가까이가 쓰러져 버렸다. 이제는 점점 도망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눈속임용으로 썼던 벽력탄의 일부를 남겨 놨을 게다. 그렇다면 화접들을 방패 삼고, 벽력탄으로 시야까지 가려 도망쳐 봤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녀에겐 단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주란이 계획에 없던 이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하던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스스스!

귓가로 밀려드는 섬뜩한 소리에 주란은 움찔했다.

뒤편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허나 주란은 그 힘의 간격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움직이는 순간 뒤편에서 날아드는 이 공격의 많은 부분이 자신을 덮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이 날아드는 걸 눈치챈 건 비단 주란뿐만이 아니었다.

백아린이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드는 그 순간 주란의 뒤편에서 날아든 무형의 기운이 주변을 뒤덮었다.

쿠아아앙!

폭발이 일며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마치 커다란 태풍이 밀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근처에 있던 모든 게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대지가 갈라졌고, 덩달아 그곳에 있던 것들이 터져 나갔다.

생존해 있던 화접들 모두가 날아드는 빛에 휩쓸려 사라졌다.

분명 화접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 그 공격만 본다면 지금 뒤편에서 날아든 힘은 주란의 적이어야 할 터인데…… 그 안에는 백아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미친 듯 휘몰아치는 후폭풍 속에서 주란이 놀란 눈을 한 채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나풀나풀 휘날리며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사내.

일전에 배 위에서 천무진과 마주했던 십천야의 일인, 반조였다.

"여, 지나가다가 꽤 위험해 보이기에 말이야."

웃으며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주란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정말로 지나가다가 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부터 자신의 이 싸움을 어딘가에서 구경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주란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막 입을 열었다.

"너 언제부터……."

"얼굴 가리라고. 아직 안 끝났거든."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말을 내뱉던 주란은 뒤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황급히 다시금 한쪽 손으로 얼굴 입 부분을 가렸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로 한 명의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백아린 그녀가 살아서 나타난 것이다.

놀란 주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폭발 속에서도 살아 있다고?"

꽤나 치명적인 공격이었는지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옷 또한 곳곳이 찢겨져 나갔다.

행색이 꽤나 엉망이긴 했지만, 그녀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이마의 피를 손등으로 가볍게 스윽 닦아 내는 백아린을 보며 반조가 픽 웃음을 흘렸다.

백아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사실 반조 또한 기척을 눈치채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놓고 그 안에서 살아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이래서…… 무림이 재밌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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