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123화 (123/293)

123화. 속내 ― 돌려주죠 (1)

천무진의 대답에 놀란 것은 우습게도 질문을 던진 당사자인 백아린이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천무진을 응시했다.

직접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어 본 적이 있다고?

지금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일까?

적화신루에서 살아가며 정말로 많은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대해 경험해 본 그녀다. 그런데 그 어떠한 것도 지금 천무진의 입에서 나온 저 말과 비견할 순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백아린은 결코 천무진의 말을 가벼이 듣지 않았다.

그를 아니까.

자신이 아는 천무진이라는 사내는 결코 이런 걸로 그녀를 속이려 들지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놀랐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한 건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무진 또한 백아린의 변해 가는 표정에서 그녀의 속내를 읽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는 건가?"

솔직히 답변을 해 놓고도 천무진은 생각했다.

자신의 이 말을 듣고 백아린이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천무진의 생각이 틀렸다.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은 결코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한 말이니까요."

확고한 그 한마디에 천무진은 움찔했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쉽사리 누군가를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천무진에게는 지금 백아린의 그 한마디는 꽤나 깊게 들어와 박혔다.

순간 말문이 막혀 있던 그 찰나였다.

쪼르르르.

천무진의 옷 안에 숨어 있던 치치가 빠져나와 빠르게 백아린의 몸을 타고 어깨로 올라섰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몸을 비비는 치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주며 슬며시 웃었다.

"고마워, 치치."

치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두 명의 십천야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을 그녀다. 물론 그 승부의 승자가 누가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천무진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변을 가득 채웠던 정체불명의 안개가 서서히 걷혀져 가고 있었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백아린은 우선 입을 닫았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이봐요, 이제 가도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향한 곳에는 아직까지도 바위 뒤에 바짝 몸을 웅크린 채로 숨어 있던 개방도 담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담구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이내 망가진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했다.

천무진이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개방?"

"네, 맞아요. 잠깐 저 사람하고 용무가 있어서 온 건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천무진과의 대화를 멈춘 건 바로 저 담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는데, 개방의 방도에게 둘의 대화가 흘러 들어가길 원치 않았으니까.

담구는 아직까지도 정신이 없는지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더, 덕분에 살았소."

"애초에 절 노린 자들이었는걸요. 저 때문에 괜한 위험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해요."

백아린의 말에 담구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건 이 여인 덕분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바위 뒤에 숨은 채로 싸움의 절반도 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본다 해도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대결이었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는 싸움.

그걸 해낸 이 여인의 실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적화신루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담구가 입을 열었다.

"받은 서찰은 방주님께 꼭 전달드리겠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엉망이 된 이곳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담구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백아린이 슬쩍 옆에 서 있는 천무진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눈치 보지 말고 빨리 물어봐. 궁금한 거 많잖아."

"음…… 살면서 이런 일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해 봐서 어떤 질문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번 해 볼게요."

복잡한 머릿속을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한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 제 앞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간단해. 내가 죽은 건 이번 생이 아니니까."

천무진은 간단하다 말했지만 백아린은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 어떻게 저 말을 이해해야 할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백아린의 시선에 천무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말대로 난 죽었어. 그리고 돌아왔지. 과거인 지금으로."

"그러니까…… 미래에서 죽고 지금으로 돌아왔다 이 말인 거예요?"

"그래, 바로 그 말이야."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은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백아린이 놀라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모두는 아니고 극히 일정 부분 정도만 알고 있어."

"왜요? 미래를 경험했다면서요?"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묻자 천무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때의 난 조종당했거든. 마치 영혼 없는 강시처럼 말이야. 당연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조차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

"천룡성의 당신이 조종을 당해요? 대체 누구…… 설마 그들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던 백아린은 퍼뜩 자신들이 쫓고 있는 그들에 대해 떠올리며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에 천무진은 속이지 않고 답했다.

"그래, 그들이 날 조종했던 자들이야."

그제야 백아린은 대충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천무진이 어떻게 정보 단체인 자신들도 모르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왜 그토록 그들을 뒤쫓고 있었는지도 말이다.

백아린이 물었다.

"혹시 과거의 삶에서도 절 알았어요?"

"아니, 몰랐어. 어디 꽁꽁 숨어 살았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던데."

"……그랬군요."

적화신루의 루주라는 비밀을 안고 있는 백아린이다.

혹시나 해서 물었거늘 천무진은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랬기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기도 했던 것.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드시 묻고 싶었던 질문이 지금의 이 상황과 맞물리며 더욱 커다란 궁금증으로 다가왔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미래를 알잖아요."

"그치."

"그런데 왜…… 저희를 선택했어요?"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수많은 정보 단체들 중 굳이 자신들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 당장에 자신들보다 더욱 큰 세력을 지닌 정보 단체들이 존재했고, 천룡성이라면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그런데 미래까지 아는 그가 자신들을 선택한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어 오는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무림을 대표하는 네 개의 정보 단체 중 유일하게 적화신루만이…… 그들과 싸웠거든."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자신들만이 그들과 싸웠다라…….

정보 단체는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여기는 백아린으로서는 지금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백아린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거 나쁘지 않네요."

"뭐가?"

"나쁜 놈들이잖아요. 그런 이들과 끝까지 싸웠다는 건 저희가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말이니까요."

백아린의 당당한 말에 천무진은 잠시 입을 닫고 그녀를 응시했다.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궁금했다.

방금 전 백아린이 던졌던 질문 중 하나는 천무진 또한 항상 궁금해했던 것이다.

왜 과거엔 이 여인을 알지 못했던 걸까?

이 정도의 여인이라면 분명 쉽사리 죽지도 않았을 터인데 대체 왜…….

자신을 바라보는 천무진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백아린이 말했다.

"그래서 저희 적화신루는 결국 어떻게 되죠?"

"……모두 죽어."

"역시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아린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이후에 그들은요?"

"무림을 집어삼키지."

천무진을 선두에 새운 채로 필요한 모든 걸 잠식해 가던 그들은 결국 무림의 주인이 되고야 만다.

당시엔 그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생 또한 같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들은 강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아린이 퍼뜩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 참, 이걸 묻지 못했네요. 그 삶에서의 당신은 어떻게 되었어요?"

"나 역시 그들에게 죽었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천무진은 자신이 죽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신은 물론이거니와 신체 또한 괴물이 되어 버렸던 그때. 이용만 당하다 결국 그들에 의해 독에 중독당한 상태로 암습을 당했었다.

괴롭기만 했던 과거의 삶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표정 또한 굳어졌다.

천무진이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아주 잔인하고 비참하게."

변해 가는 천무진의 표정을 보며 백아린은 그제야 그간 봐 왔던 그의 어두웠던 모습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구나.’

잦은 악몽과 알 수 없는 어둠을 안고 있던 사내.

대체 천무진에게 어떤 슬픈 과거가 있었던 걸까 생각했는데…… 그 슬픔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깊었던 모양이다.

길게 숨을 내뱉은 천무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도 내 숨을 거두던 그놈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뭐라고 했는데요?"

천무진이 중얼거렸다.

"……병신 같은 새끼라고 하더군."

말을 내뱉고도 스스로 부끄러웠는지 천무진은 억지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 외면하고 싶은 기억.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가만히 고개 숙인 천무진을 응시하던 백아린이 갑자기 자신의 대검을 땅에 소리 나게 박아 넣었다.

쿠웅!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천무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다.

백아린이 빈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망할 새끼들아! 이번엔 그 말을 누가 들을지 두고 보자!"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행동에 천무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크게 소리를 내질렀던 백아린이 당찬 얼굴로 고개를 돌려 천무진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들었던 그 말, 우리가 돌려주죠."

씩씩한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물었다.

"적화신루가 멸문당한다는 데도 여전하군. 무섭진 않은 거야?"

"무섭죠. 적화신루는 저한테 모든 것이니까요. 그런 곳이 멸문당한다고 들으니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인지 투지가 더 불타오르는데요. 적화신루를 멸문시킬 놈들이라니…… 그대로 당해 줄 순 없잖아요? 복잡하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는 문제라 보다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려고요."

"쉽고 단순하게?"

되묻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도와야 할 확실한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여태까지도 계속해서 전력을 다해 도와 왔지만, 이제는 그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게 전부일 뿐이다.

백아린이 한 말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기에 천무진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단순하니 좋네. 마음에 들어."

"그죠? 그러니까 우리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요. 이번엔…… 우리가 먹여 줘야 할 차례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멀리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천이었다.

그가 단엽과 함께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을 확인한 백아린이 슬쩍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우리 부총관이 다친 절 보고 호들갑을 떨 예정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