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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25화 (125/293)

125화. 위기의식 ― 그럴 리야 없겠지 (1)

휘장 너머 인물의 오늘 하루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원하던 계획 하나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며 자신이 꿈꾸고 있는 미래로 한 발자국 다가선 날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선한 날씨가 낮잠을 자기에도 무척이나 좋은 날이었다.

완벽했던 하루.

그렇지만 그 하루가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실패라고?"

"……면목 없습니다. 어르신."

주란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한눈에 봐도 주란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핏기 없는 얼굴과 불편해 보이는 거동은 그녀가 큰 부상을 당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어르신이라는 존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네가 실패를 하다니."

다른 이도 아닌 십천야의 일원인 주란이 직접 움직였다. 거기다가 그녀가 다친 모양새를 보아하니 직접 나선 것도 자명한 사실, 그런데 실패를 했단다.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가 물었다.

"천무진에게 당한 것이냐?"

물어 오는 질문에 주란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차라리 천무진에게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분하지는 않았을 게다. 허나 자신을 막아선 건 고작 적화신루의 사총관. 무림에 이름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런 애송이에게 당해 버렸다.

쉽사리 말문이 열리진 않았지만, 그가 미적거리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주란이 힘겹게 입을 열어 진실을 말했다.

"아뇨, 저희의 표적이었던 백아린에게 당했습니다."

"……농담하는 게냐?"

"누구의 앞인데 농담이나 지껄이겠습니까. 정말로 그 여자에게 당했습니다."

"지금 나보고 네가 직접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적화신루의 일개 총관에게 패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쾅!

참지 못하겠는지 휘장 안의 그림자가 손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의자의 손잡이가 박살이 나며 주변으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펄럭!

휘장이 펄럭이는 것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있던 주란의 몸 또한 뒤로 밀려 나갔다. 빠르게 날아가 벽에 박히려는 찰나, 그녀를 잡아챈 건 다름 아닌 반조였다.

반조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벽에 틀어박히려는 걸 막아 줬다.

그러고는 이내 어깨를 감쌌던 손을 풀며 씩 웃어 보였다.

"어르신, 진정하시죠."

"지금 진정하게 생겼더냐! 대체 무슨 멍청한 짓을 벌였기에 적화신루의 사총관 따위에게 십천야가 지고 돌아온단 말이야!"

"뭐 그냥 그렇게 단순히 비교하시면 기가 차시겠지만…… 그 여자 생각 외의 고수였습니다."

"생각 외의 고수? 겨우 그걸로 이번 패배에 대해 날 납득시킬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반조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저와 비슷한 급의 고수라면요."

"……."

반조의 그 한마디에 휘장 안에서 휘몰아치던 성난 기운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방 안은 고요해졌고, 그 순간 충격파에 밀려났던 주란이 가슴을 움켜쥔 채로 가볍게 피를 토해 냈다.

주르륵.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

버럭 내지르는 호통만으로 주란의 내상을 다시금 들끓게 만드는 수준의 무공을 지닌 인물.

그만큼 이 안의 상대가 강하다는 의미였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휘장 안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 말 진심이냐?"

"네,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자면 멀쩡한 상태에서 일대일로 마주했을 때 제가 이길 확률은 육 할 정도일 겁니다."

자신이 살짝 더 우위라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휘장 안의 인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백아린이라는 여인의 강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반조는 십천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 그런 그가 승산을 육 할 정도로 잡는 수준이라면 애초에 주란의 상대가 아니었다.

허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화신루에 그런 고수가 있다고? 그것도 그렇게 어린 계집이?"

그때 솟구치던 피를 억누르고 있던 주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계집이 검왕의 무공을 사용했어요."

"뭐? 검왕? 검왕 한신의 무공을 썼다고?"

"네, 나선형의 강기 일곱 개를 자유자재로 쏟아 내더군요. 그건 분명 검왕의 나선칠선파였어요."

"그럴 리가…… 검왕에게 제자가 있었단 말인가?"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고 알려진 검왕 한신이다.

그런 그의 무공이 다시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인데, 그걸 사용한 당사자가 적화신루의 총관이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주란이 말했다.

"저희의 정보는 싹 잘못됐어요. 단엽의 암살을 실패한 것도, 그리고 이번 일의 실패도 거기서 시작된 거죠. 애초에 그 여자의 등급을 육급으로 분류했던 게 문제였어요. 최소 사급, 최악의 경우 삼급으로까지 올려야 할 대상이에요. 이번 기회에 저희 정보 단체를 다시금 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돼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공간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한테 핑계를 돌리는 건가?"

말을 내뱉는 이는 사십 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거칠어 보이는 외향은 흡사 투견을 연상케 했고, 성난 눈동자와 야수와도 같은 기운은 그가 무척이나 거친 성격을 지녔다는 걸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의 이름은 상무기(常武祈).

십천야의 일원으로 정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상무기가 이끄는 정보 단체는 다름 아닌 귀문곡(鬼問谷)이었다.

중원을 대표하는 네 개의 정보 단체 중 하나.

귀문곡은 이미 예전에 이들의 손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싸늘한 상무기의 말에도 주란은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한 채로 휘장 너머의 상대에게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적어도 이번 일의 실패는 저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백아린에 대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파악돼 있었다면 최소한 화접의 일부만 끌고 상대하러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 모든 건 정보가 틀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그랬기에 실패에 대한 책임의 일정 부분은 귀문곡에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소리. 어디서 실패해 놓고 책임 전가야?"

상무기가 살기를 토해 내자 곧바로 주란이 받아쳤다.

"그럼 그따위 정보를 줬는데 내가 뭘 하는 게 말이나 돼?"

"네가 모자랐으니 이런 꼴이 났지. 만약에 나였다면……."

"상무기 네가 갔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걸. 네가 나보다 강하다면 모를까."

옆에 서 있던 반조가 픽 웃으며 받아쳤다.

반조까지 이렇게 나오자 상무기는 표정을 확 구겼다. 같은 십천야긴 하지만 무공에 한해서는 자신보다 윗선에 있는 것이 반조였고, 그런 그의 말을 쉽사리 무시해 넘기긴 어려웠다.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그 순간 휘장 속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

그의 일갈에 뭔가 말을 하려던 주란과 상무기가 동시에 입을 닫았다.

더 상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좋지 못한 꼴을 볼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조용해진 공간 안에서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주란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하오나……."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 상무기!"

변명을 하려던 상무기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급히 그가 고개를 조아릴 때 휘장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잘못된 정보였으니 임무를 완수하는 데 무리가 따랐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용납되는 건 아니다. 너희는 십천야니까. 너희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패를 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니더냐."

"……죄송합니다."

주란 또한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말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든 성공을 시켰어야만 했다. 그것이 십천야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들의 숙명이었다.

휘장 안의 인물이 말했다.

"상무기, 주란의 말대로 이번 기회에 귀문곡의 정보 체계를 다시금 정비해라."

"알겠습니다."

"특히나 천무진 일행에 대한 정보들을 더 모아야 할 게야. 단엽도 그랬지만 백아린이라는 그 계집도 생각 외의 고수였으니까."

"그리하도록 하지요."

내키진 않았지만 상무기는 빠르게 답했다.

더는 어르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정보가 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독기가 치솟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 명령을 내렸지만 휘장 안 인물의 심기는 무척이나 복잡했다.

천무진을 견제하기 위한 비책들은 연달아 실패로 돌아갔고, 반대로 그는 자신들의 중요 거점들을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했으니까.

그 피해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거기다 상대의 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큰 상황.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귀찮게 됐구나."

삼급으로 분류했던 천무진.

그리고 사급이었던 단엽까지. 하지만 일전에 암살에 실패하며 그 등급에 대한 의문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등급을 상향 조절해야 하는 찰나 또 하나의 방해 거리가 나타났다.

최소 사급에서, 삼급까지 예상되는 존재.

백아린이다.

그 말은 곧 정말 만약에라도 단엽 또한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 강하다면 삼급에 해당되는 무인 셋이 손을 잡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 정도 무력이라면 아무리 자신들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야 만다.

정보 수정과 함께 천무진 일행이 생각지도 못한 거대 세력이 되어 버린 바람에 잠시 고심하던 그가 이내 뭔가를 기억해 내고는 물었다.

"그 셋 말고 한 놈이 더 있었는데. 맞나?"

질문에 상무기가 빠르게 답했다.

"예, 백아린의 부총관인 한천이라는 작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설마 그놈도 뭔가 있는 건 아니겠지?"

뭔가가 찜찜하다는 듯 물어 오는 어르신의 물음에 상무기가 그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자는 오른팔도 잘 못 쓴답니다. 나이를 먹고도 명성이 고작 그 정도라면 굳이 저희들이 경계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은 아닐 겁니다. 거기다가 그자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많은데, 술 마시는 걸 좋아하고 성격도 유들거리는 것이 사람과 잘 어울린답니다. 아마 그 때문에 부총관으로 데리고 다니는 듯싶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알아보기는 하겠습니다."

상무기의 대답에 휘장 안의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무기의 말대로다.

종종 실력을 쌓고 무림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고수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무림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인물이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력을 감췄다고 해도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허나 한천에게서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저 정말 평범한 한 명의 무인,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랬으니 귀문곡에서도 그에 대해서는 특이 사항이 없다며 무척 낮은 평가를 내린 것이겠지.

안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려와서였을까?

이것저것 괜한 걱정이 많아져 버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리야 없겠지."

* * *

백아린이 십천야의 주란과 반조와 싸운 지 며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좋은 약과, 하루 종일 쉬라며 들들 볶아 대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폭 휴식을 취한 그녀의 회복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자잘한 외상 몇 개만 아물면 될 정도로 회복한 지금 백아린은 오랜만에 외출에 나섰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한천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침 일찍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따라붙은 한천을 보며 백아린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웬일이야. 맨날 어떻게 하면 자기는 집에서 놀까 궁리만 하던 사람이."

"허허,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언제나 이렇게 딱 붙어서 호위하지 않았습니까."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한천을 보며 백아린은 픽 웃었다. 그가 지금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자신을 홀로 보냈던 그날의 일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게 분명했다.

백아린이 말했다.

"평소처럼 해. 괜히 그러지 말고."

"뭐가 말입니까?"

"그날 날 안 따라온 건 내가 그냥 쉬고 있으라고 명령을 해서잖아. 부총관 잘못 아니라고."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그거 때문에 뭐 미안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전혀 아닌데요."

다 맞으면서도 한천은 아닌 척 딴청을 피웠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라는 걸 알기에 백아린 또한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어차피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바로 성도에 있는 적화신루의 거점이었다.

포목점으로 위장한 그곳으로 찾아간 백아린과 한천을 관리자인 장현이 반갑게 맞았다.

"좀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은밀한 장소까지 도착하자 장현은 백아린에게 몸 상태부터 먼저 물었다.

그의 물음에 백아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보다시피 멀쩡해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침 드릴 정보가 하나 있었는데……."

말을 하던 장현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한천의 눈치를 살폈다. 일전에 십천야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백아린 말고 자신에게 먼저 알려 달라고 한 일이 있어서다.

역시나 한천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현이 서둘러 말했다.

"개방에서 온 연락입니다."

전달하려던 정보가 십천야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개방에서 온 내용이란 걸 알게 된 한천은 그제야 슬쩍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들이 오가는 사이 백아린은 건네받은 서찰을 펼쳐 안에 있는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어느덧 장현에게서 관심을 끊은 한천이 힐끔 서찰을 훔쳐보며 말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어 오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말했다.

"개방 방주께서 보내온 답변."

간단하게 답변한 그녀는 이내 서찰을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바빠질 것 같네."

개방 방주 장량과 적화신루의 루주인 백아린의 만남.

그 날짜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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