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회담 ― 원하는 것이 같으니까요 (1)
중원을 대표하는 네 개의 정보 단체 중 두 곳의 수장이 만난 자리에서 본격적인 대화의 포문을 연 것은 개방 방주 장량이었다.
그가 말했다.
"얼마 전 제게 연락을 취하던 와중에 그쪽의 총관이 위험에 처했었다 들었습니다. 당시 개방의 문도도 있었거늘 덕분에 목숨을 구제했다고 하더군요. 그 부분에 있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쪽 사람을 노렸던 일이라 전해 들었으니 오히려 말려든 부분에 있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찌 됐든 개방 문도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변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저야 고마울 뿐이지요."
십천야가 백아린을 노렸던 사건에 대해 간략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직후 장량이 말했다.
"제가 루주를 이렇게 뵙고자 한 건 우리 두 세력 사이에 얽힌 일들도 조금 풀고, 앞으로 흘러갈 중원의 일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함입니다."
개방과 적화신루.
아무래도 같은 정보 단체다 보니 그간 꽤나 많은 마찰이 있기도 했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대부분의 승자는 세력의 크기상 개방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만.
장량이 갑자기 품 안을 뒤적이다 하나의 서찰을 꺼내어 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서찰을 펼쳐 안의 내용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흠, 뭐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서찰 안에는 꽤나 많은 사건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개중 하나에 이르러 시선을 멈춘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아. 이게 좋겠군요. 산동성 제성(諸城) 지역의 일을 아시겠지요?"
"목가장(木家莊) 이야기시군요."
백아린이 담담히 답했다.
목가장은 산동성 제성 지역에 위치한 가문이다.
무림에서는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가문이었지만, 산동 지역에서는 손꼽히는 재력을 지닌 곳으로 상당히 많은 문파들과 얽혀 있는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목가장을 두고 몇 달 전쯤 개방과 적화신루는 큰 마찰이 있었다.
새로 장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오랜 시간 적화신루와 연을 이어 오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던 탓이다. 허나 목가장은 개방과 거래를 해 오던 가문이었고, 자연스레 두 세력은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큰 건수였기에 개방이나 적화신루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으려 했고, 장주가 된 자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이었다.
목가장의 이름을 언급하고 잠깐 서찰을 보던 장량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개방이 목가장 일에서 손을 떼지요."
"……목가장을 우리에게 넘기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천막 안쪽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백아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장량이 말을 이었다.
"그럼요. 대신 강소성 태주에서 벌어진 건수는 저희에게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리상으로도 적화신루에게 큰 이득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강소성 태주와 관련된 일도 분명 큰 건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방이 양보한 목가장 정도는 아니었다.
개방에서 먼저 한발 양보하며 나오기도 했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많은 판국이니 백아린으로서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목가장을 넘겨주신다는 데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좋군요. 그럼 다음엔……."
장량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는 중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개방과 적화신루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언급하며 그것들을 나름 서로에게 적당한 선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부분에선 개방이 더 많은 걸 취했다면, 또 그만큼 적화신루 쪽에게 주기도 하는 방식으로 두 세력 간의 거래를 최대한 공평하게 진행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평하게 나눈다면 이득을 보는 건 당연히 적화신루 쪽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적화신루에 비해 개방이 훨씬 더 큰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양보를 하지 않고 힘 싸움으로 연결시킨다면 개방은 더욱 많은 부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피해를 입기도 하겠지만, 지금 주는 것에 비해서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공평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주는 까닭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장량이 서찰에 적힌 내용들을 다 마무리했는지 그것을 접으며 말했다.
"이걸로 얼추 우리 두 세력 사이에 얽힌 일들은 매듭지어진 것 같군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천막 너머에서 들려온 백아린의 말에 장량이 피식 웃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수하들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보통 상대가 아닐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적화신루의 루주는 꽤나 눈치가 빨랐다.
그가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개방의 방주께서 얼마나 바쁘신 분인지 잘 아니까요. 겨우 이 정도 일을 매듭짓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지금 정리한 것들은 굳이 이 같은 자리를 만들면서까지 해결할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에 백아린은 장량에게 다른 진짜 목적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였다.
백아린의 말에 장량이 숨기지 않고 속내를 드러냈다.
"맞습니다. 사실 이렇게 루주께 뵙자고 연락을 드린 이유는 바로 천룡성 때문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탓에 백아린은 크게 동요치 않았다.
애초에 장량이 루주를 만나고 싶다고 제안을 한 시기가 천룡성의 존재가 드러난 직후였다. 당연히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천룡성과 연관되었을 거라 판단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아린이 말했다.
"하실 말씀 해 보시지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장량이 입을 열었다.
"천룡성을 저희에게 주시지요."
"지금 그게……."
"아, 물론 공짜로 넘겨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가로 향후 이십 년 동안 복건성에서 들어오는 모든 의뢰를 적화신루에게 넘겨 드리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두 세력 간의 마찰이 생긴다면 오늘처럼 제가 중재하여 최대한 공평하게 일 처리가 되도록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방 방주 장량이 던진 조건은 충격적이었다.
복건성은 중원으로 치자면 외곽에 위치한 곳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의 지역이다. 그곳에서 들어오는 모든 의뢰를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하니,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이득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추후에도 개방과의 문제에 있어 방주가 직접 나서서 해결을 해 주겠다고 하니, 세력을 넓히려 하는 적화신루의 입장에서는 분명 절호의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큰 제안.
천막 너머에 있던 백아린도, 바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천도 꿈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장량은 천막 너머에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이내 말을 이었다.
"적화신루의 입장에서 절대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아닙니까?"
사실 천룡성의 의뢰를 맡는다는 건 당장의 금전적 이득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추후에 천룡성과 관련해서 얻게 되는 정보를 통해 뭔가 커다란 이득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지금 장량이 내건 조건보다 나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백아린이 답했다.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군요."
"그렇다면 이 제안 받아들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화신루는 돈과, 향후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저희는 천룡성을 얻음으로써 상징성을 지닐 수 있게 되겠지요."
"상징성이라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긴요.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장량이 검지를 치켜세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중원 최고의 정보 단체라는 그 상징성. 이토록 많은 걸 양보하면서 천룡성을 얻고자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개방은 아주 오랫동안 최고의 정보 단체라는 자리를 지켜 왔다. 그런데 천룡성이 자신들이 아닌 적화신루를 택했다는 사실로 인해 중원 최고의 정보 단체라는 자부심에 큰 흠집이 나 버렸다.
물론 어느 누군가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토록 많은 금전적 피해를 감수하는 게 어리석다 여길지도 모른다.
허나 장량의 생각은 달랐다.
왜 많은 이들이 개방을 찾겠는가.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을 최고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최고라는 사람들의 인식.
그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장량은 이번 자신의 제안이 양쪽 모두에게 나쁘지 않다 여겼다.
이미 완벽하게 중원 최고의 정보 단체로 자리를 잡았고, 금전적으로도 전혀 문제없는 개방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상징성이었고 반대로 보다 도약하기를 원하는 적화신루에게는 언제 갖게 될지도 모를 그런 이름값보다는 당장의 이득이 중요했으니까.
장량이 말했다.
"곧바로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면 얼마간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지요. 적화신루의 수장이시니 뭐가 이득인지 계산하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마음을 결정하시면 그때……."
그때였다.
검은 천막 너머에서 백아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절합니다."
"거절…… 입니까?"
"예,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군요."
재차 들려오는 의사 표시에 장량은 미간을 찡그렸다. 거절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던 건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방의 방주로서 내건 이 조건을 보면 분명 받아들일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가 물었다.
"거절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분이 적화신루를 원했으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장량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겨우 그 이유 때문입니까? 그 정도 이유로 버릴 만큼 낮은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원하는 것이 방주님과 같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이 같다?"
그게 뭐냐고 묻는 듯 말끝을 올리는 장량을 향해 백아린이 답했다.
"적화신루 또한…… 최고가 되고자 하니까요."
백아린의 그 말에 장량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지금 내뱉은 최고가 되고자 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였으니까.
바로 개방을 넘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결코 가벼이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무력과, 최고의 정보 단체라는 위명에 어울리는 정보력을 지닌 개방이다.
그런 자신들을 넘어서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마찬가지로 최고가 되고자 한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장량은 생각을 바꿨다.
가능하면 좋게 이야기를 끝내고자 했지만, 상대의 생각이 그렇다면 결코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천룡성의 의뢰를 자신들이 맡고자 했던 제안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오히려 잘됐다.
장량이 입을 열었다.
"제 제안을 거절하셨으니 이제 이쪽도 실력으로 보여 드려야겠군요."
거절당한다고 해도 그냥 물러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결국 천룡성에서 직접 자신들을 선택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도의적으로 이미 의뢰를 하고 있는 상황에 힘으로 뺏는 게 내키지 않아 이 같은 제안을 한 것뿐이다.
허나 최대한 배려한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장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룡성이 개방을 선택하게 만들어 보이지요. 그리고 그날이 온다면…… 루주께서는 오늘 이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가능하시다면 얼마든지요."
지지 않고 받아치는 백아린의 말을 들은 장량이 몸을 휙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가자!"
그의 외침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삼이 서둘러 닫혀 있는 문을 열었다.
먼저 나간 종삼의 뒤를 쫓아 움직이던 장량이 입구에 이르러 잠시 발길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검은 천막에 가려진 백아린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이내 복면과 죽립을 눌러 쓰고 있는 한천의 시선을 느끼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개방 방주 장량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스르륵.
막고 있는 천을 거두며 백아린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여전히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천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복면을 턱 아래로 끌어내리며 투덜거렸다.
"어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고생했어, 부총관."
"한 거라고는 잔뜩 무게 잡고 서 있는 것밖에 없었는데요, 뭘."
실실 웃으며 별거 아닌 듯 말하고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 한천이 없었다면 모든 것들이 조금 더 복잡했을 게다.
최소한 개방 방주 장량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보초를 서고 있는 한천의 존재 때문이었으니까.
장량이 사라진 문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던 한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잔뜩 화가 난 모양새잖아요. 명분이 없으니 개방이 전면전을 걸어오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기회가 나면 계속 저희를 방해하려 들 겁니다."
"언제는 안 그랬나."
예전부터 적화신루를 사사건건 억눌러 오던 개방이다. 오늘 이 일로 조금 더 심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여태까지와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같은 목표를 두고 달려가는 상대.
결국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개방을 넘어서야만 했다.
한천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백아린의 모습을 곁눈질하다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완고하게 거절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나름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했거든요."
"확신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개방의 손을 잡지 않을 거라는 확신."
천무진은 미래를 알기에 적화신루를 제외한 모든 정보 단체들이 그들에게 굴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적화신루에게 손을 내민 것이고, 그걸 잡은 건 자신이었다.
애초에 천룡성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 결심은 더욱 확고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천무진을 도와 그들을 막는다.
그리고…….
"부총관, 적화신루 소속원들에게 전달해 줘. 긴장들 하라고."
제안을 거절했으니 자연스레 시작될 그들의 도발.
하지만 백아린은 그런 도발에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오히려 개방에게 확실히 보여 주고야 말리라.
적화신루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