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귀명신단 ― 불가하네 (1)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의선을 향해 백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적면신의에 대해 잘 아세요?"
"뭐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관계였네. 뛰어난 의술을 지녔지만 접근하는 방식이 나와는 많이 달라, 어느 순간부터는 거리를 두게 됐었지."
과거에 적면신의와 만났던 일을 잠시 떠올리던 의선이 이내 백아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가 자모충으로 뭘 했는가?"
"인체 실험을 자행했어요. 그것도 고아들을 가지고요."
백아린의 말에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의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사고를 쳤다 생각했거늘, 이건 그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선의 얼굴이 붉게 변해 갔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의술을 익힌 자가 고아들을 가지고 인체 실험이라니!"
"이번에 그를 잡아서 막아 내긴 했지만 십 년 이상 이 같은 실험을 해 왔던 모양이에요. 아마 수천 이상의 아이들이 그자의 손에 죽은 걸로 파악하고 있고요."
"하아."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의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의원의 손이, 불쌍한 이들의 생명을 뺏어 가고 있었다니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면신의는 죽었는가?"
"아뇨, 무림맹에 넘겨서 조금 더 자세한 조사를 할 예정이에요. 별반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그 뒤에 있는 이들을 찾아내는 건 어려워 보이지만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던 의선이 이내 물었다.
"상황은 대충 알겠네. 그러면 나에게 부탁할 것이 무엇인가?"
"해독약입니다."
"해독약? 자모충에 대한 해독약 말인가?"
"그것도 그렇고 또 하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과 함께 백아린이 뒤편으로 시선을 줬고, 기다렸다는 듯 한천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전낭 같은 주머니를 건네받은 의선이 안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하얀 가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의선이 물었다.
"이건……?"
"몽혼약이라는 것 정도만 확인했고, 저희도 정확히는 파악을 하지 못한 물건이에요. 그런데 이걸 향로에 넣고 피우면 사람들이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시키는 대로 움직이더군요. 못 버티는 자들은 부작용으로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토하며 죽기도 했고요."
"자모충과 비슷하군."
"네, 맞아요. 적면신의의 말대로라면 이 몽혼약이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해서 조종할 수 있게 만들고, 자모충은 그 효과를 보다 극대화시킨다 하더군요. 단순히 이 몽혼약만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고요."
"흐음."
가만히 하얀 가루를 바라보는 의선을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이 가루의 정체가 뭔지 파악하실 수 있겠습니까?"
"쉽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해 보기도 전에…… 불가능하다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사실 몽혼약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다.
그것들과 일일이 비교를 하는 것만 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과중한 일이다. 헌데 방금 들었던 설명만으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떠한 것과도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아마도 여태까지 중원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새로운 것.
어쩌면 새외에서 비밀리에 전해져 오는 몽혼약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얀 가루에서 시선을 뗀 의선이 말했다.
"단순히 이 가루의 정체만 밝히길 원하시는 건 아니지요?"
그런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한 건 백아린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저희는 이 가루의 해독약도 원합니다."
단순히 조사만을 원했다면 의선이 아닌 사천당문에게 이와 같은 의뢰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사천당문 내부에 그들과 연관된 이들이 남아 있을 거라는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모습을 감춘 의선을 찾는 것보다는 더욱 현실적인 일이었다.
물론 천무진의 사부인 천운백의 도움으로 의선을 쉽게 찾긴 했지만, 그걸 미리 알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으니까.
정체와 더불어 이 몽혼약의 해독약을 필요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선의 능력이 있어야만 했다.
백아린의 말에 의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면 이 가루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보다, 성분을 조사해서 해독약을 만드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다만 해독약을 만들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의선이 가루가 든 주머니를 든 채로 천무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양이 너무 적습니다."
해독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표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갖은 방법으로 실험을 하고, 독성을 죽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받은 이 정도 양이라면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백여 번의 실험조차 가능할지 모르겠다.
수천, 수만 번의 실험으로도 알아낼 확신이 없는 물건이다. 겨우 이 정도 양으로 해독약을 만들어 내는 건 정말 천운이 따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무진이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백아린에게 물었다.
"우리가 더 구한 양이 얼마나 되지?"
흑마신의 거처인 사해도에서 적면신의가 실험을 자행하던 그 비밀 장소.
그곳에 있는 창고에 이 몽혼약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둘러 무림맹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직접 챙기지 못했고, 곧바로 그곳으로 들어간 적화신루 쪽에서 사해도를 정리하며 얻은 재료들을 현재 이 근처로 이송 중인 상황이었다.
백아린은 자신이 전해 들은 양을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만족스러운 양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거에 몇 배 정도는 될 거예요. 추가적으로 더 찾아내기 위해 조사 중이긴 한데…… 당장은 이게 최선이에요."
"이것의 몇 배 정도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선이 중얼거렸다.
그나마 이 주머니의 것이 전부가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족스러울 정도의 양은 분명 아니었다.
허나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면 우선은 이것만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의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선 지금 받은 것과 추가적으로 올 물량들을 가지고 조사를 먼저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고생스럽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천 대협께서 절 이리 보내신 이유가 다소 궁금했는데…… 그분은 역시 대단하시군요."
대체 이곳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어찌 알고 이 같은 일을 벌였는지 놀라웠지만, 언제나 천운백은 그래 왔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잘 묶어 품 안에 집어넣으며 의선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람을 한 명 만나야겠군요. 아무래도 잠시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꽤나 먼 곳에 있는 친구라서요."
"필요하면 저희 쪽에서 연락을 취해 이쪽으로 모시도록 할게요."
백아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의선이 답했다.
"그리 부른다고 올 친구는 아니라서 말이네. 내 연락을 그리 반기지도 않을 것 같고 말이야, 허허."
"그게 누구죠?"
"마의(魔醫), 그의 힘이 필요하네. 나 혼자의 힘으론 그리 간단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일세."
마교 제일의 의원인 마의, 당연히 그는 정도 무림의 심장부인 이곳 성도와 꽤나 먼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그녀가 말했다.
"그럼 다녀오시는 동안 연구를 하실 만한 거처를 마련해 둘게요."
"그리하게."
"언제 떠나실 생각이시죠?"
"급한 일이니 빠를수록 좋지 않겠는가. 내일 당장 떠날까 생각 중이네. 다음 만남은 아무래도 그 친구를 만난 이후로 해야겠군."
말을 마친 의선의 시선이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포권을 취하며 그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한시가 급한 일, 의선 또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 * *
의선이 있는 화연관을 빠져나온 천무진 일행은 거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대략 거리의 절반보다 조금 더 이동했을 무렵이었다.
단엽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무진과 백아린을 뒤따르고 있던 한천이 갑자기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어디 갔지?"
갑작스러운 행동에 앞장서서 걷던 천무진과 백아린 또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 한천이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이고, 전낭 주머니를 잃어버려서요. 분명 올 때까지는 가지고 왔었는데 어디에다가 놓고…… 아! 이런, 아무래도 그 다관에다가 두고 온 거 같은데요?"
"하여튼 덤벙거리긴."
백아린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천이 웃었다.
"하하, 제가 정신머리 없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서둘러 가서 가져오도록 할 테니 먼저들 가시죠."
"굳이 직접 갈 필요 있어? 사람 시켜서 적화신루의 거점으로 가져다 두면……."
"그리 멀지도 않은데 그게 더 번거로운 것 같은데요."
"흠, 그런가?"
"예, 그냥 지금 후다닥 가서 가져오죠, 뭐."
별반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한천을 바라보던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아 참,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곧바로 돌아오고. 괜히 핑계 대고 술집이나 이런 곳으로 빠지기만 해 봐."
"그럼요. 절대 그러지 않고 가서 전낭만 딱 찾아서 오겠습니다."
자신을 믿으라는 듯 호언장담을 하는 한천의 모습에 오히려 백아린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한천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말과 함께 그가 후다닥 온 길을 거슬러 달려갔다.
그리고 그런 한천의 뒷모습을 백아린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전낭을 찾겠다며 한천이 화연관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방금 전에 나갔던 한천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자 천무진 일행을 안쪽으로 안내했던 사내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찾고 있는 게 있는데 안쪽에 두고 온 것 같아서 말이야."
"아, 그러십니까?"
말을 마친 사내가 막 몸을 돌려 안쪽의 입구를 지키는 이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바로 그 찰나였다.
한천이 근처에 있는 의자 아래로 뭔가를 가볍게 던져 넣었다.
툭.
그가 던진 물건은 놀랍게도 이곳에 두고 온 것 같다 말했던 바로 그 전낭이었다.
애초부터 한천은 전낭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천이 전낭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넣은 직후 사내가 몸을 돌려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네."
한천이 씩 웃으며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자 그곳엔 아직까지도 연못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의선의 모습이 보였다. 한천은 곧장 의선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가간 한천이 입을 열었다.
"의선 어르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의선은 방금 전 헤어졌던 한천의 등장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뭔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는 모양이로군."
방금 전에 대화를 나누던 과정에서 뭔가 전하지 못한 것이 있다 여긴 의선이었다. 허나 그런 그의 말에 한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개인적인 일입니다."
말을 마친 한천이 자신의 오른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의선이 당황하는 그때였다.
한천이 말을 이었다.
"실례일 수도 있지만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제 오른손의 상태를 한번 봐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깐 놀랐던 의선이었지만 진지한 한천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손목의 맥을 짚었다.
허나 맥을 짚는 순간 의선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이내 의선의 손이 한천의 오른팔 곳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팔목을 시작으로 해서 팔꿈치와 어깨까지 곳곳을 만질수록 그의 놀람은 커져 갔다.
의선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직접 손으로 만져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오른손.
하지만 그 상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기혈이 모두 뒤틀렸고, 근육들 또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남아 있는 뼈들 또한 엉망으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힘을 쓰기도 어려워 보였다.
몸이 이 정도로 망가지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을 게다. 온몸을 불로 지지는 것 이상의 고통.
그런 고통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고통은 아마도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독했을 것이다.
지옥과도 같았을 그 시간을 버티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의선을 바라보던 한천이 오른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제 팔 상태가 어떤지 말입니다."
"……어찌 사람의 몸이 이리도 망가질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의선은 너무도 놀라 있었다.
이런 상태의 오른손을 다소 불편해 보이기는 해도 이 정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의선의 질문에 한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겨우 어쩌다 보니 라고 말할 수 있는 부상이 아니지 않은가. 이 팔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엄청난 지옥을 맛봤을 거라는 걸 알고 있네."
의선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고통을 언급했을 때였다.
한천이 말했다.
"버틸 만했습니다. 그보다 더한 지옥에서 살아왔으니까요. 그리고 오른팔을 잃은 덕분에…… 더 많은 걸 얻었으니까요."
"이렇게 엉망이 되면서까지 얻은 게 있다고? 대체 그게 뭐기에 이런 끔찍한 대가를 치렀단 말인가."
물어 오는 질문에 한천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허나 상관없다.
이 오른팔을 잃고 고통으로 가득 찼었던 그 시간을 다시 한 번 보내야 한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았으니까.
한천이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오른팔을 내준 대가로 얻은 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
이해하기 어려운 그 말에 의선이 되묻는 그때였다.
오른팔로 시선을 주던 한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족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