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바꿔치기 ― 끝낸다 (1)
방 내부를 살피던 천무진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혹시나 뭔가가 바뀌었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중요한 건 그대로군.’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는 책장.
그리고 그 책장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장치들까지도 과거의 삶에서 봤던 그대로다.
순간 백아린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어때요? 그 비밀 통로를 찾을 수 있겠어요?』
『응, 내 기억 그대로야.』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부터 계획대로 움직이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이상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소소홍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간 백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제가 서역과의 거래를 맡고 있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뒤편에 있는 이 친구가 서기관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천무진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소홍은 그런 그에게는 별다른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서역에서 건너온 보석과 장신구들이었으니까.
소소홍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서역에 있는 특이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들었다. 맞느냐?"
"네, 맞습니다. 아마 중원에서 저희만큼 많은 물건을 지닌 상단은 없을 겁니다."
"그래?"
자신감 가득한 백아린의 말투에 소소홍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이내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분명 물건을 가지고 온다 들었는데?"
"물론 가지고 왔지요. 이곳 내당의 다른 곳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다른 곳에? 왜 굳이?"
"이 방 안에 풀어 두기엔 양이 꽤나 많으니까요. 거기다가 여기는 오가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백아린의 말에 소소홍의 얼굴이 다시금 밝아졌다.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대상이 뭔가를 아는군. 마음에 들어."
"물건들은 모두 다 각자 정해진 주인이 있는 법이지요. 하물며 그것이 값비싼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소리야."
"그럼 어디 내당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러 가 보실까요?"
"당장 가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소소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내당주님께 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나한테?"
뭐냐는 듯이 천무진을 바라보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 그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품에서 나온 것은 값비싸 보이는 천이었다.
허나 천무진이 보여 주려는 건 그 천이 아니었다.
그가 빠르게 천을 풀었고, 이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나무판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면면이 모두 화려했고, 나무판자의 여러 부분에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것 위에는 새하얀 옥으로 보이는 커다란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물건.
그렇지만 분해가 되어 있는 탓에 소소홍은 이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가 물었다.
"이건 뭐지?"
"보석함(寶石函)입니다."
"이게 보석함이라고?"
"예, 비밀리에 가지고 오기 위해 분해를 해서 한눈에 알아보기 힘드시겠지만, 다시 합치면 커다란 보석함이 됩니다."
"비밀리에 가져오기 위해 분해를 했다고? 왜?"
"그건……."
말을 내뱉던 천무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대상께서 내당주님께 드리기 위해 같이 온 다른 이들도 모르게 가져온 개인적인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선물?"
말을 하며 소소홍이 백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백아린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서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입니다. 사실 보석보다도 보석함의 재질인 나무가 훨씬 더 귀한 것이지요. 어지간한 충격에는 절대 깨지지 않거든요. 저도 어렵사리 손에 넣은 물건인데…… 내당주께서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소소홍이 놀란 눈으로 천무진의 손에 들린 분해된 조각들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화려해 보이는 외형이 무척이나 값비싼 물건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절로 군침을 삼켰다.
화려한 겉모습도 마음에 들지만 중원의 것이 아닌 서역의 물건.
다른 이들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물건이라는 사실이 더욱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완전히 넋을 잃은 듯 바라보는 소소홍을 향해 백아린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내당주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은 개인적 바람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저희 상단과는 별개로 말이지요."
백아린의 그 말에 소소홍의 눈이 이채가 돌았다.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와 관계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바라는 것이 있기에 주는 선물.
그렇지만 소소홍은 상관없었다. 이런 좋은 물건을 구해 줄 수 있는 이라면 자신 또한 언제든 환영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소소홍이 답했다.
"그래서 이 보석함만 따로 빼놓은 게로군."
"그렇지요. 상단의 물건이라면 금액을 받아야겠지만, 이건 제 개인적인 선물이니 딱히 뭔가를 주실 필요도 없고요. 다만 비밀리에 드리는 선물이니 저한테서 받으셨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말을 내뱉는 백아린을 보며 소소홍이 입을 가린 채로 웃었다.
"호호, 이거야 원 어째야 하나."
"그럼 받아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대상이 이리도 권하니 어쩔 수 없군그래. 내 받아서 잘 쓰도록 하겠네."
못 이기는 척 받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소소홍을 보며 백아린 또한 미소를 머금었다.
계획의 일부가 완전히 먹혀들었음을 직감했다.
‘완벽하게 통했네.’
이 모든 작전들은 그냥 단순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다.
적화신루의 많은 정보들을 규합하여 소소홍이라는 인물이 지닌 개인적 습관을 비롯해 좋아하는 것, 취미나 평소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한 후에 만들어진 치밀한 작전이었다.
승낙이 떨어지자 백아린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보석함을 다시금 조립해야 할 터인데 그건 서기관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보통 물건이 아니라 아무나 조립하기엔 어렵거든요."
"그렇게 하도록 해."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받아 한층 기분이 좋아진 소소홍이 흔쾌히 대답할 때였다.
백아린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섰다.
"그럼 서기관을 이곳에 두고 가도 될는지요?"
"여기에?"
"네, 비밀리에 드리는 선물이라 다른 상단 식구들 앞에 노출시키긴 어려워서요. 정 불편하시다면 인근의 다른 장소를 잡아 주셔도 되긴 합니다. 어차피 제가 가져온 물건을 다 보신 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싶긴 한데……."
백아린이 말꼬리를 흐렸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냐는 듯한 말투.
이곳은 소소홍의 방이었지만 값비싼 물건들을 놔두는 곳은 아니었다.
이 방은 잠을 자고 시간을 보내는 곳일 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같은 제안을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천무진에게서 들은 하나의 이야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이 방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의 존재를 소소홍이 몰랐다는 거다.
만약에라도 그 비밀 통로에 대해 안다면 설령 이곳에 아무런 물건이 없다 해도 외부인 혼자만 두는 것이 탐탁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
그래서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백아린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계획과 달리 그녀가 천무진을 다른 곳에 보내려고 한다면 결국 이곳에 다시금 잠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그에 맞는 다른 작전을 펼칠 생각이지만 그럴 경우 외부에서 침입자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완벽히 감추긴 어렵다.
그 말은 곧 최악의 경우 애써 바꿔치기한 가짜 보석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백아린이 긴장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바로 그때.
"……그렇게 하지 뭐."
그리 긴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소소홍의 모습을 보며 백아린은 천무진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런 보석함을 핑계 삼지 않고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말했어도 들어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고민 없는 모양새였다.
물론 이 모든 건 비밀 통로의 존재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반응이었겠지만 말이다.
소소홍이 천무진을 향해 말했다.
"다녀올 때까지 잘 만들어 두도록 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도록 하지, 대상."
"예, 그럼 눈이 휘둥그레지실 만한 물건들을 보여 드리러 가지요."
"호호, 기대할게."
말과 함께 걸어나가는 두 사람의 뒤로 천무진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리고…….
탁.
문이 닫히는 순간 천무진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우선 손에 들려 있던 보석함의 나무를 움켜쥐었다. 조립하는 데 어렵다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도 수월하게 모서리들을 맞춘 채로 천무진은 빠르게 보석함을 조립해 나갔다.
팍팍팍.
단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완성된 보석함을 천무진은 탁자 한 곳에 가볍게 던져두었다.
그러고는 곧장 들어오자마자 확인했던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툭툭.
손으로 쳐 본 책장은 무척이나 단단하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책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책들까지.
방의 주인인 소소홍이 읽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어지지 않는 낡은 고서들을 바라보던 천무진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이내 한 권의 서책을 꺼내어 들었다.
천무진의 손에 들린 서책은 부드러운 종이로 된 평범한 것들과는 달리 겉표지가 다소 딱딱한 재질이었다.
마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천무진은 서책이 꽂혀 있던 쪽으로 몸을 밀착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안쪽에 있는 자그마한 구멍 사이로 검지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단단한 서책의 앞과 뒤를 반대로 돌리더니 아래쪽에 있는 빈 공간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걸 벽 쪽을 향해 강하게 눌렀다.
그러자…….
끼릭.
서책이 갑자기 밀리듯이 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순간 천무진이 책장 안쪽 빈 공간에 박아 넣었던 검지의 끝자락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기다렸다는 듯 천무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탁.
이음새가 풀리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책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벽에 박아 넣었던 서책은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크르릉.
아주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천무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내 어두운 아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까지 내려선 천무진이 반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둠.
그렇지만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 있을 그 붉은 보석의 존재를 말이다.
천무진이 옆에 있는 벽을 어루만지자 열려 있던 비밀 공간이 닫히며 지하 공간에 존재하던 자그마한 빛조차 사라졌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천무진의 두 눈동자만 빛나던 그 순간.
탁.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천무진의 손바닥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치 횃불을 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소소홍이 돌아올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짧으면 이 각. 길면 반 시진.’
그 안에 천무진은 이곳에 감춰져 있는 붉은 보석을 훔치고,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어야만 했다.
이 길에는 꽤나 많은 장치들이 존재한다.
차라리 힘으로 돌파를 하라고 하면 오히려 쉽겠지만 지금 천무진의 목적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이곳을 지나갔다 나가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어떠한 기관진식도 펼쳐지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런 연유로 그리 여유가 있진 않았지만…….
‘일각으로 끝낸다.’
천무진이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