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시험 ― 설마…… (2)
산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천무진과 백아린.
두 사람이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 사전에 한천이 전달한 서찰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계획을 모두 전했고, 그 덕분에 다소 늦긴 했지만 천무진과 백아린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천무진의 등장에 자운이 이를 꽉 깨물었다.
‘어디에 있나 했는데 이제야 나타났군.’
애초에 천무진 일행의 목적지를 이곳 화산이었다고 판단한 자운이다. 그랬기에 언제라도 천무진이나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엽이 이렇게 다칠 만큼 싸우는 와중에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기에 혹시나 이곳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졌었다.
허나 마침내 그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천무진과 백아린이 등장하자 한천이 다행이라는 듯 재빨리 검을 거두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가 백아린을 향해 투덜거렸다.
"아슬아슬했잖습니까! 대장!"
"발에 땀나도록 달려오게 해 놓고 무슨."
두서없이 갑작스레 툭 날린 서찰 하나.
그걸 보고 천무진과 백아린이 얼마나 급히 이곳으로 움직였던가.
두 사람이 평소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천무진의 시선이 자운에게로 향했다. 둘은 구면이었고, 그랬기에 자운 또한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자운이 먼저 예를 갖췄다.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그 한마디에 뒤편에 있던 화산파의 무인들과 나환위의 수하들인 비월조 또한 움찔했다.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그 존재를 눈앞에 마주한 탓이다.
화산파 무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양소유 또한 놀란 눈으로 지금 모습을 드러낸 두 남녀를 바라봤다.
최근 무림맹에서 천룡성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야 당연히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소문의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모두가 놀라 있는 그때 천무진 또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자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잠시 자운에게 줬던 천무진의 시선이 이내 단엽과 나환위에게로 향했다.
피투성이에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는 나환위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단엽이었다.
천무진이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며 자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번 기회에 단엽을 죽게 만들어 천무진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천무진이 눈앞에 나타난 지금, 그 계획은 전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우선시할 목표가 단엽의 죽음에서, 나환위를 살리는 걸로 바뀌었다.
마음을 정한 자운이 다급히 말했다.
"대홍련의 부련주와 동료시면 멈추게 해 주시죠."
"……아쉽게도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럼 이대로 죽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답답하다는 듯 자운이 말했다.
옆에 와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에게 천무진이 잠시 시선을 줄 때였다. 자운이 그 시선을 받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개인적 원한이 있다 한들 이곳은 화산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손님으로 왔던 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 일은 화산파 또한 좌시하기 어렵습니다."
자운은 화산파라는 이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아무리 천룡성이라 할지라도 화산파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거라 판단해서다.
천무진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답답한 듯 자운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원한이라기에 어느 정도 화산파도 눈감아 주었습니다만 이젠 도를 넘어섰습니다. 더는 우리 화산파가……."
"백아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천무진이 나지막이 백아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천무진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아린은 천무진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곧장 가지고 있던 족자를 쫙 펼쳤다.
그 안에는 정체 모를 내용이 잔뜩 적혀져 있었다.
바닥을 향해 내려트린 족자를 바라보며 자운이 물었다.
"그게…… 뭡니까?"
물어 오는 자운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저놈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될 이유들이요."
족자에 적힌 십여 개가 넘는 죄목들과, 그와 관련된 사건들. 이 모든 건 바로 나환위가 개입된 일들이었다.
물론 이 족자에 적힌 사건들은 겉보기엔 아름답게 포장되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허나 섬서성으로 들어선 직후 적화신루를 통해 치밀하게 조사를 한 덕분에 나환위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황이다.
단엽이 말해 준 과거의 사건을 기반으로 비슷한 일들을 조사했고,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정보를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
백아린이 족자에 적힌 글자들을 보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살인에 갈취, 거기다 방화에…… 이거야 원 아주 다양하게도 해 먹으셨구만."
"나, 나는 그런 적이 없네. 모함이야."
백아린의 말에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나환위가 애써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백아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봐요, 아니라고 하기엔…… 증거가 너무 많지 않아요?"
백아린은 이내 품 안에 넣어 두었던 꽤나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어 흔들었다.
너무도 확고한 백아린의 말투에 자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나환위가 그리 좋지 못한 자라는 건 자운 또한 알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 있어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그랬기에 더 그를 선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에 드러났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운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네, 이미 무림맹주님께도 이와 관련된 사항이 전달됐을 거예요. 무림맹 쪽에서도 추가적으로 조사를 하겠죠."
백아린의 쐐기를 박는 그 말에 자운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나환위라는 패는 버려야 할 것이 되어 버렸다.
욕심이 난다고 해도 손에 쥐고 있어선 안 될 패.
침묵하는 자운을 향해 백아린이 말했다.
"어때요? 이제는 개인적인 원한이라고만 치부하기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으랴.
아까까지만 해도 개인적인 원한이라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이 같은 죄목과, 증거들을 가지고 나타난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변한다.
가장 큰 건 바로 명분이 생긴다는 거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죽인 것이 아닌, 무림의 악인을 처단한 게 되어 버린다는 소리다.
그 말은 곧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의견은 나오겠지만 최소한 단엽에게 나환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그때였다.
파라라라락!
들려오는 요란한 바람 소리.
하지만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다. 옷자락이 휘날리고, 그것들이 부대끼며 나는 인기척이었다.
이미 단엽과 나환위의 싸움으로 주변은 초토화된 상태였지만, 그나마 멀쩡한 나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하나둘씩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산파군.’
옷에 새겨져 있는 매화 장식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대들. 그때 뒤편에서 한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파의 장문인 양우조였다.
양우조의 등장에 양소유가 급히 소리쳤다.
"아버지!"
자신을 향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치는 양소유를 확인하며 양우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 양소유가 이곳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수하들 중 하나를 화산파로 돌려보냈었고, 그로 인해 지금 이곳에 양우조가 나타날 수 있었다.
물론 양소유가 굳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도 화산이 울릴 정도로 격렬했던 싸움.
아무리 화산파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해도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을 게다.
모습을 드러낸 양우조가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얼추 흘러가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피투성이가 된 두 명의 사내들.
나환위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장문인! 날 좀 도와주시오!"
"……."
나환위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난 양우조라는 존재는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그의 목소리에 양우조의 표정은 냉랭했다.
이미 이곳으로 다가오던 과정에서 백아린이 했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무인인 양우조가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채로 거리를 좁히던 중이었다.
백아린의 목소리를 놓쳤을 리가 없다.
그녀의 손에 들린 족자를 바라보던 양우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는 것이 도리요."
"모, 모함이오! 난 절대 저런 짓을 한 적이 없소이다!"
나환위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며 소리치는 그 순간 단엽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끝까지 오리발이네."
말과 함께 단엽이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상처는 더욱 벌어졌다.
"으어어억!"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며 나환위가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그때 양우조의 귓가로 양소유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버지, 지금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만 있는 저 사람이 천룡성의 인물이래요.』
『천룡성?』
천무진과 자운이 인사를 나눌 때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랬기에 저 사내의 정체를 몰랐거늘…….
정체를 알게 된 양우조는 곧장 천무진을 향해 다가갔다.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이시군요."
"무림맹에 나타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상당히 젊은 분이라 듣긴 했는데…… 제 생각 이상이군요."
작금의 무림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인 천무진이라는 존재를 양우조가 모를 리 없었다.
천무진이 다가온 그에게 말했다.
"화산에서 이 같은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리 간단치 않더군요."
"오면서 들었는데 무림맹주님께도 연락이 갔을 거라 하시더군요. 그럼 이 일은 무림맹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였고, 정보를 얻게 돼서 곧바로 보내 놓은 것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혈우일패도를 죽이실 생각인 겁니까?"
물어 오는 양우조의 질문에 천무진은 슬쩍 단엽을 바라봤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천무진이 단엽의 이름을 불렀다.
"단엽."
"왜 주인?"
천무진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가 물었다.
그러자 천무진이 단엽의 앞에 무릎 꿇은 채로 헐떡이고 있는 나환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선택지는 두 개야. 네 앞에 있는 그놈을 죽일 거야 아니면 살려서 모든 것을 잃고 망가지는 걸 볼 거야? 선택은 네 자유고, 어떤 판단을 내리든 존중하지."
천무진은 단엽이 어떻게 정하든 그 결정을 함께해 줄 생각이었다.
물어 오는 천무진의 질문.
단엽은 잠시 눈앞에 있는 상대를 바라봤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예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죽은 누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으며 실수였다 말하던 나환위의 모습까지도.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죽여 왔던 상대다.
그리고 결코 죽는 그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을 자이기도 했다.
저 더러운 낯짝을 보고 있노라면 살의가 치밀었지만…….
단엽이 갑자기 어깨로 밀어 넣던 도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곧장 발로 나환위의 복부를 걷어찼다.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환위가 뒤로 넘어가며 그대로 혼절했다.
쓰러진 그를 뒤로한 채로 단엽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천무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단엽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죽이지 않고 영원한 지옥 속에서 살도록 말이다.
나환위의 목숨을 거두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 안에 박아 넣은 도를 한 치만 더 깊게 밀어 넣었다면 심장을 관통했을 테니까.
처음엔 죽일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아린이 가져온 저 많은 양의 서류를 보고 단엽은 생각을 바꿨다.
왜 그녀가 저런 뒷조사를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다.
아마 저런 증거들 없이 나환위를 죽였다면 그와 관련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적으로 여겼을 것이다.
옳은 일이었지만 나환위의 악행들을 모르는 이들은 단엽을 단순한 살인마라 여겼을 테고, 그로 인해 또 새로운 원한들이 생겨났을 게다.
물론 그런 원한들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누가 됐든 덤빈다면 싸워 주면 그만이니까.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준 백아린.
그리고 천무진과 한천까지.
그 덕분에 단엽은 나환위를 죽여도 전혀 문제 되지 않을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힘겹게 모아온 정보들.
그걸 단순한 명분용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천무진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답을 내린 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이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단엽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