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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51화 (150/293)

151화. 화산파 ― 생각났을 뿐이야 (1)

자하동(紫霞洞).

화산파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동굴로 수행을 위해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자하동의 문은 거의 십 년째 열리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굳건히 닫힌 자하동의 현재 주인은 다름 아닌 여인이었다.

자하동은 초입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깊숙한 부분은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했다.

그 깊은 어둠 속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그리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에 빠져 있는 여인은 오십 대 정도의 미부(美婦)로 보였다.

허나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과는 대조적인 새하얀 백발, 놀랍게도 이 여인의 진짜 나이는 칠십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화산옥녀(華山玉女) 조수아(曺秀雅)였다.

현 화산파 장문인의 사매로 문파 내에서도 배분이 꽤나 높은 그녀는 오랜 시간 이곳 자하동에서 지내고 있었다.

최근에 있었던 장문인의 팔순 잔치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을 만큼 오랫동안 칩거 중인 그녀의 거처 앞에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식사를 책임지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전해 주는 임무를 맡은 인물이었다.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황급히 자하동의 입구 인근에 도달한 그녀가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화산옥녀를 뵈어요."

동굴 안쪽으로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올 그 무렵.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조수아가 눈을 감은 채로 슬며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식사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이미 저녁 식사를 끝마친 시간.

자신의 수하가 정해진 시간 외에 이렇게 나타나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물어 오는 조수아의 질문에 여인이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 천룡성의 무인이 나타났어요."

"……!"

그 말이 떨어지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찰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십여 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조수아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백발을 길게 늘어트린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 * *

시끄러웠던 싸움은 단엽이 상대를 압도하며 그렇게 마무리됐다. 제아무리 우내이십일성 중 말석에 위치한 인물이라고는 하나 중원을 들썩이게 하는 고수인 나환위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이처럼 일방적인 패배라니…….

비록 단엽 또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나환위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이었다.

다친 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단엽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아프다고! 살살 좀 해!"

"거참, 엄살은."

짝!

단엽의 팔에 붕대를 감아 주던 한천이 손바닥으로 그의 등짝을 강하게 후려쳤다. 앉은 상태에서 날아오를 정도로 펄쩍 뛰어올랐던 단엽이 죽는소리를 해 대기 시작했다.

"미쳤어? 환자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환자는 무슨. 이렇게 팔팔한 환자도 있냐?"

몸 곳곳에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단엽은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뛰어난 고수인 나환위의 싸움에서 끓어올랐던 가슴이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아서다.

거기다 십수 년 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복수까지 끝마쳤다.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랴.

아프다면서도 싱글벙글하는 단엽을 보며 한천이 피식 웃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맞아도 좋다고 웃네. 변탠가."

"뭐? 변태? 너 지금 대홍련을 적으로 돌릴 수준의 발언을 한 거 아냐?"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단엽의 모습에 한천이 괜히 겁먹은 듯이 손사래 치며 말을 받아 줬다.

"어이쿠, 그건 사양할게."

둘이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백아린과 함께 천무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단엽이 치료를 하는 동안 이번 일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나환위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그의 죄를 밝혀냈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물을 생각이었지만 그걸 화산파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이곳 화산파와 가장 인접한 곳에 위치한 무림맹의 섬서 분타로 보내는 걸로 우선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물론 그 전에 어느 정도의 치료로 생명을 유지시켜 두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일을 끝내고 단엽이 치료를 받는 이곳으로 돌아온 천무진과 백아린.

이곳은 바로 화산파 내부에 있는 의방이었다.

들어선 두 사람을 향해 단엽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 주인하고 백아린. 고생들 했어."

"좀 살살 패지 그랬어. 입을 못 열 정도로 패 놓는 바람에 더 번거로웠다고."

툴툴거리는 백아린의 말에 단엽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알잖아. 내 주먹엔 적당이라는 게 없다는 걸."

"좋겠다. 무식해서."

"무식한 걸로 네가 남 말할 처지냐?"

단엽이 백아린의 등 뒤에 달린 무식할 정도로 큰 대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흠흠."

그때 천무진이 다가오며 물었다.

"몸은 어때?"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해."

들어 올린 자신의 팔을 툭툭 치며 자신 있게 말하는 단엽을 보며 옆에 앉아 있던 한천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는 환자라고 떠들어 대더니만."

그런 한천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단엽이 물었다.

"나환위는 어쩌기로 했어?"

"무림맹의 분타에 우선 보내기로 했어. 맹주에게도 말은 해 뒀으니, 아마 그곳에서 조사를 하고 그 후에 처분 결정도 내려지겠지."

"설마 풀어 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큰맘 먹고 살려 준 건데 그러면 곤란한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워낙 증거들이 확실해서."

말과 함께 천무진이 옆에 있는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적화신루에서 긁어모은 정보들.

그리고 아직까지도 추가적으로 그 일들을 확실히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을 더더욱 찾아 보강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꼬리가 잡힌 이상 나환위는 결코 편안한 말년을 보내긴 어려워졌다.

천무진의 확실한 대답에 단엽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백아린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단엽이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이 정도로 신경 써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고마워."

단엽의 말에 백아린이 놀란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말을 받았다.

"별것도 아닌데 감사 인사는 무슨. 그냥…… 네가 손해 보는 게 싫었을 뿐이야."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만으로도 이미 아픈 기억일 터인데, 그로 인해 행한 일로 다시금 단엽에게 뭔가 피해가 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단엽의 부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움직여서 얻어 낸 결과물.

그것이 단엽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백아린은 그걸로 족했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나환위를 이겼으니 이제 우내이십일성에 네가 들어가게 되는 거 아냐?"

"아, 그런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영광일 수도 있는 칭호.

허나 단엽은 그것이 별반 대수롭지 않았다.

우내이십일성이라는 칭호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향해 한천이 말했다.

"별로 안 좋은가 보네."

"그게 뭐 대수라고. 사실 허울뿐인 이름 아냐?"

말을 끝낸 단엽이 의방에 모여 있는 다른 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우내이십일성 중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잖아?"

자신을 이긴 천무진.

그리고 언제라도 싸워 보고 싶은 두 사람인 백아린과 한천.

단엽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아닌 이 셋 중 누구였다고 해도 오늘 나환위를 상대했을 때 그 결과는 같았을 거라는 걸.

그런 확신을 주는 이 셋이 포함되지 않은 우내이십일성이라니 실로 우습지 않은가.

단엽이 진짜로 겨뤄 보고 싶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들 대부분은 우습게도 이곳에 있었다.

단엽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지만 한천은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백아린과 한천, 두 사람 모두 실력을 보인 경력이 있으니 저 말에 아니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런 두 사람의 대답 따윈 애초에 필요치 않았다.

천무진이나 단엽 모두 직접 봐서 알고 있으니까.

그건 그 어떠한 대답보다 확실했다.

그때 의방으로 향하는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향할 무렵이었다. 이내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쉽사리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화산파의 장문인, 양우조 바로 그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천무진이 답했다.

"들어오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양우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방 안쪽의 모습을 잠시 살피는 듯싶더니 이내 단엽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허허, 몸은 좀 어떠신가?"

"뭐 그럭저럭 괜찮소."

단엽은 옆에 놓여 있던 상의를 걸쳐 입으며 짧게 답했다. 어쩌다 보니 화산파에서 치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지금의 이 만남은 쉽사리 있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대홍련의 부련주인 단엽이 정파를 대표하는 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의 의방에서 치료를 받는 일은 아마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일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한 건 역시나 천룡성의 존재 때문이었다.

대홍련의 부련주이기도 했지만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의 동료였던 것이 컸다. 거기다가 이번에 상대한 나환위가 무림인으로서 해선 안 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기도 해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옷을 걸쳐 입는 단엽을 바라보는 양우조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사파를 대표하는 젊은 무인이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실력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이 정도 나이에 이런 실력이라니.

그랬기에 두려웠다.

‘나환위를 상대하고 고작 저 정도의 부상이라…… 앞으로 정도 무림의 미래가 걱정이로군.’

과연 정도 무림에서 이런 젊은 재목이 나타날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내 양우조는 그런 불안감을 애써 거두며 천무진에게 이야기를 돌렸다.

"뭐 부족한 건 없으신지요?"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일 처리도 끝냈고, 보시다시피 치료도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무림에서 위치도 높고 나이도 많은 양우조였지만 천룡성의 인물인 천무진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천무진의 대답에 양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럼 다행이군요. 아, 숙소도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며칠 머무시다가 가시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화산파에는 빈방이 많습니다."

양우조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치명상은 아니라고 해도 단엽의 치료 또한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천무진은 양우조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천무진이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그럼 며칠만 신세 지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마찬가지로 양우조가 포권을 말아 쥐며 화답하는 바로 그때였다.

휘익!

거의 날아오다시피 이곳으로 달려오는 누군가의 움직임에 천무진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열려 있던 문으로 새하얀 백발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의 중년 여인.

자하동에서 기거하고 있던 화산옥녀 조수아였다.

그녀가 수행을 깨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양우조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사매?"

조수아를 보고 놀라는 양우조.

하지만 그녀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양우조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조수아를 마주하던 천무진의 미간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그리고 순간 그의 머리에 깨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천무진이 비틀거리며 옆에 있는 벽면을 손으로 짚었다.

"큭!"

천무진은 벽을 짚은 반대편 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갑자기 주변이 빙글빙글 돌았고, 머리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순간적으로 찾아온 고통에 구역질까지 치밀었다.

그런 천무진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백아린이었다. 그녀가 황급히 다가오며 비틀거리는 천무진을 껴안듯 잡아 냈다.

놀란 백아린은 쓰러지지 않도록 껴안은 천무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설마 또 아파요?"

"……."

천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며칠 전 검산파에서 느꼈던 그런 고통이 아니었다.

천무진의 눈에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중년 여인, 조수아의 얼굴이 들어왔다.

천무진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냐…… 그냥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 생각난 것뿐이야. 괜찮아."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천무진의 기억은 완벽하지 못했다. 듬성듬성 일부만 기억할 뿐이고, 나머지는 새카만 어둠에 휩싸인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그처럼 완벽하지 못했던 기억들 중 하나.

바로 사부의 죽음이었다.

사부가 죽었고, 그 때문에 무척이나 슬퍼했던 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건 바로 ‘사부가 왜 죽었는가’였다.

그런데 떠올라 버렸다.

사부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화산옥녀 조수아.’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여인.

사부는…… 저 여인 때문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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