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개인적 욕심 ― 포기할 수가 없다 (2)
마교 인근에 위치한 남루한 초옥.
평범하기만 한 초옥의 마당에는 커다란 평상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늙은 노인 하나가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에 꽤나 주름진 얼굴은 그가 제법 나이가 많이 들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새카만 흑의를 둘러 입은 그의 옆에는 밤새 먹은 술상만이 함께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들어 있는 노인의 얼굴에 갑자기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코를 골며 자고 있던 노인은 꿈틀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노인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쉬는 날이니 냉큼 꺼지거라."
"허허, 말투는 여전하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노인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젠장, 이 듣기 싫은 목소리라니. 제발 아니어야 할 터인데."
말과 함께 평상 위에 누워 있던 노인이 슬그머니 눈을 뜨다가 이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 상대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러자 이곳에 나타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기를 이리 박대할 생각인가?"
"지기는 무슨! 이 망할 놈이 여긴 또 무슨 일이야?"
말과 함께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노인의 앞에 자리한 인물.
그는 바로 의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툴툴거리고 있는 이 노인의 정체가 바로 의선과 함께 중원을 대표하는 의원인 마교의 마의(魔醫)였다.
천무진에게서 의뢰를 받았던 의선은 곧바로 마의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었고, 이렇게 그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마의의 옆자리에 착석한 의선이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잘 지냈는가? 그사이에 많이 늙었군그래."
"마지막으로 본 게 육칠 년은 족히 되었는데 당연한 소리를. 그런데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이곳은 마교의 영역이다.
오랜 시간 은거하고 있던 의선이 나타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바로 자신을 만나기 위함이리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마의의 질문.
의선이 답했다.
"웬일은. 당연히 자넬 보러 왔지."
"음흉한 영감탱이가 그냥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뭔 일인데?"
오랜 시간 알아 온 사이여서일까?
마의는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의선이 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의선이 허허롭게 웃었다.
"자네는 역시 못 이기겠군. 맞아,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난 보시다시피 엄청 바쁘다고. 영감탱이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냐."
"그리 바쁜 사람이 밤새 술이나 퍼마셨는가."
"이거야 오랜만의 휴식이지."
둘러대는 마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의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면신의가 자모충을 가지고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했다더군. 그 대상이 된 아이들 대부분이 죽었고."
"……그 미친 새끼가 결국 사고를 쳤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렇지만 의선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의가 진짜 화가 났을 때의 모습이라는 걸.
마교에 몸담고 있지만 마의는 의원이다.
사람의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그런 인물이라는 거다. 하물며 어린아이라니?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애써 화를 내리누르던 마의가 이내 물었다.
"몇 명이나 죽었지?"
"최소 수천이라더군."
말을 끝낸 의선은 씁쓸함을 참기 어려웠는지 옆에 굴러다니던 술병을 들어 안에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마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수천?
몇 명이라고 해도 화가 치솟는 이 마당에 수천이라고?
마의가 갑자기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적면신의 그 새끼 어디 있데?"
"그건 왜?"
"왜긴. 찾아서 똑같은 짓이라도 해 주려고."
"이미 무림맹에 넘겨진 모양이야."
"아쉽네. 마교로 왔어야 했는데. 그럼 내가 놈의 신체를 조각조각 내줬을 텐데 말이야."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마의에게서는 살기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잠시 화를 삭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걸 말해 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
"자모충과 또 함께 실험하던 몽혼약의 해약을 만들 생각이네. 거기에 자네 힘이 필요해."
"무림맹의 부탁이야?"
"아닐세."
"그럼?"
"천룡성의 의뢰야."
"……그들이 나왔군."
무림이 혼란해질 때 모습을 드러내 모든 것을 매듭짓는 전설적인 문파. 그들이 정말 긴 시간 만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룡성의 존재가 나타난 것에 대해 소문이 나고 있었지만 마의는 아직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큰 관심도 없었고, 의방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마의로서는 그 같은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의선은 이내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다름 아닌 백아린에게서 건네받았던 정체불명의 몽혼약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였다.
의선은 그 가죽 주머니를 옆에 있는 마의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그걸 받아 든 마의가 물었다.
"이게 뭐야?"
"풀어 보게. 아까 말한 몽혼약이야.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만든다더군."
아주 잠깐이지만 마의의 눈에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그가 재빠르게 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잠시 눈으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를 바라보던 마의가 물었다.
"이것에 대해 아는 게 뭔데?"
"방금 말한 것 외에는 자모충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정도야."
"정보가 너무 없군."
"그러니 자네를 찾아왔지. 나 혼자선 힘들 것 같아서."
의선의 말에 마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대로 이 가루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마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새로운 것에 대해 알아보는 건 호기심이 많은 마의에게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가 괜스레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영감탱이. 항상 귀찮은 일을 가지고 오는군."
"그래서 돕지 않을 생각인가?"
마의의 성격을 잘 아는 의선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였다.
마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
* * *
천무진 일행은 화산파에서 삼 일간 머물며 전력을 정비했다. 다쳤던 상처도 치료했고, 다시 무림맹이 있는 사천성 성도로 돌아가는 길에 필요한 것들도 준비했다.
화산파 장문인 양우조의 도움으로 모든 건 일사천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가 끝이 났고, 내일은 이곳 화산파를 떠날 마지막 날 밤.
저녁 식사까지 끝내고 잠시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백아린은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그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멈춘 발걸음.
문 건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어나 있어?"
설마 또 자운이 찾아온 건가 하던 백아린은 천무진의 목소리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성큼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서는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은 그런 그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어라? 뭐 급한 일 있어요?"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잠시 시간 괜찮아?"
"당연히 괜찮죠. 들어올래요?"
백아린의 말에 잠시 방 내부를 바라봤던 천무진이 이내 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키며 말을 받았다.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어서 답답한데, 나갈까?"
"저야 좋죠."
며칠을 푹 쉬긴 했지만 그만큼 지루한 것도 사실.
거처를 산책하는 것 정도겠지만 그걸로도 좋은지 백아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이 옆으로 슬쩍 비켜서서 길을 만들어 주자 백아린은 성큼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가 문을 닫고는 밝게 웃었다.
"그럼 갈까요?"
"그러지."
말을 마친 두 사람은 거처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워낙 신경을 쓰고 거처를 배정해 준 탓에 장원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컸다.
굳이 화산파 무인들을 만나지 않게 자신들의 거처를 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산책이 될 정도였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밝았고, 또 별들도 가득했다. 거기다가 거처 곳곳에 걸려 있는 화등(火燈) 덕분에 그리 어둡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란히 걸으며 백아린이 말했다.
"사실 또 자운 대협이 찾아온 줄 알고 식겁했는데 당신이라 다행이네요."
화산파에 머물던 삼 일이라는 시간 동안 백아린은 자운의 방문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처음 찾아와 의뢰의 뜻을 내비쳤고, 그다음엔 사적으로 나타나 괜히 차를 마시고 사라졌다. 그 두 번의 만남을 천무진 또한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하는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천무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자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그러게요. 이득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자운이 의뢰를 하겠다고 나타났을 때 알았다.
생각보다 위험한 느낌을 풍기는 자라는 걸.
그랬기에 계속된 호의가 백아린은 오히려 좋지 않게 느껴졌다.
천무진이 말했다.
"앞으로 또 나타나서 귀찮게 굴면 신호라도 보내. 내가 곧장 가 줄 테니까."
"와서 어떻게 해 주게요?"
"뭐 해 줄 게 있나. 그냥 내가 모습만 드러내도 그쪽이 불편해서 먼저 사라질걸. 그때도 그랬잖아."
"킥킥, 그건 그러네요."
백아린이 웃으며 답했다.
두 번째 찾아왔던 날, 자운으로 인해 상당히 귀찮았지만 뭔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바람에 곤란했던 상황.
그때 천무진이 나타나 줬고, 그러자 자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천무진이라는 존재가 불편한 듯싶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도중 천무진이 눈앞에 있는 정자를 발견하고 말했다.
"잠시 저기로 가지."
말을 마친 그는 연못 한가운데 위치한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정자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앉은 백아린이 아래에 있는 연못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와, 며칠은 지냈는데 여기는 처음 와 보네요."
감탄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간 천무진이 마찬가지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연못을 함께 바라보던 천무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가겠군."
"그러게요. 좀 급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소득이 있긴 했어요. 그죠?"
"고생 많았어. 이번에도 신세를 많이 졌네."
"신세는요. 당신이 함께해 주는 것만으로도 적화신루에게는 이득인데요."
무림의 전설인 천룡성이 적화신루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홍보 효과를 보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알게 되며 그것에 관련된 정보들도 모조리 끌어모으고 있는 상황.
그로 인해 얻게 될 금전적 이득도 상당하다.
처음엔 분명 천무진도 그거면 됐다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적화신루도 얻을 것이 있으니,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낄 이유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생각했던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백아린은 해 주고 있었다. 부탁한 의뢰뿐만이 아닌 천무진을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하는 그 모든 것들.
덕분에 몇 번이고 위기를 넘겼고, 또 자신의 계획을 지켜 내 줬다. 아마 이 여인이 없었다면 이번 생을 바꾸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은 이미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어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랬기에 천무진은 자신도 백아린에게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다.
천무진이 여전히 난간에 기댄 채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뭔데요?"
난간 아래에 있는 연못을 살펴보고 있던 백아린이 시선을 돌리며 묻는 그 순간 천무진이 품 안에 넣어 왔던 서책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꽤나 두꺼운 서책을 건네받은 그녀가 농담하듯 말했다.
"이 안에 일거리를 잔뜩 적어서 전달하는 건 아니죠?"
웃으며 서책을 펼치던 백아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앞에 있는 천무진을 올려다봤다.
백아린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거……."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 왔다.
그만큼 놀랐으니까.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답했다.
"맞아, 잔마폭멸류야."
잔마폭멸류.
과거의 삶에서 천무진을 망가트려 버렸던 바로 그 무공. 하지만 자신에게는 독이었지만 백아린에겐 달랐다.
그녀는 검왕 한신의 제자. 그리고 잔마폭멸류의 창시자인 풍운무정검의 무공을 이은 인물이었다.
백아린은 말했었다.
문파의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라진 잔마폭멸류를 오랜 시간 찾았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천무진은 이 무공을 백아린에게 건네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찾았던 무공.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그 무공이 천무진의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어느 날부터인가 서책에 잔마폭멸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의 원본 그대로의 내용을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여유 시간이 많지 않자 생각보다 작업이 더뎠던 상황, 그런데 이곳 화산파에 와서 며칠을 쉬는 사이에 결국 이 서책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백아린이 서책에 적힌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물었다.
"이거 직접 적은 거예요?"
"응,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좀 걸렸어."
"……."
그녀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선뜻 답을 찾지 못했다. 무인에게 무공이란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 가치가 있다.
하물며 그것이 이런 고강한 무공이고, 또 자신이 속한 문파에서 소실되어 오랜 시간 찾던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그 어떠한 일확천금과도 비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배려해 이렇게 손수 잔마폭멸류를 비급으로 적어 줬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욱 기뻤다.
서책을 천천히 덮은 그녀가 손바닥으로 겉면을 어루만졌다.
소중한 걸 만지는 것처럼 서책을 쓸어내리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천무진이 물었다.
"맘에 들어?"
백아린은 서책을 꼭 끌어안고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고마웠다.
이런 무공을 서슴없이 내준 것도, 자신을 생각해 준 그 마음도.
서책을 품에 꼭 안은 그녀가 활짝 웃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