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봉함인 ― 어디서 온 거지 (1)
길었던 섬서성에서의 여정.
검산파와 화산파를 오가며 나름 많은 일들이 있었던 이번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목적지였던 화산파에서 천룡성의 사천 비밀 거점까지의 거리는 꽤나 되었고, 그로 인해 돌아오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게 먼 거리를 돌아와 마침내 비밀 거점의 앞에 천무진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 위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자리하고 있던 한천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거점을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이고, 드디어 보이네. 며칠은 꼼짝도 안 하고 쉴 테니 절대 방해하지 마십쇼, 대장."
긴 여정에 무척이나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며칠은 푹 쉴 거라고 다짐하는 한천에게로 다가간 백아린이 손바닥으로 그의 등짝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짝!
"으앗!"
말 위에서 껑충 날아오를 듯 튀어 올랐던 한천이 이내 자신의 등을 마구 어루만지며 죽는소리를 이어 나갔다.
"어휴 등짝이야. 왜 때리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힘든 사람이 어제 몰래 빠져나가서 밤늦게까지 그렇게 술을 퍼마셨데? 그것도 환자를 데리고?"
"흠흠."
핵심을 짚고 들어오는 백아린의 한마디에 한천은 어설픈 기침을 해 댔다. 그러고는 슬쩍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단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너도 뭔가 말 좀 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
단엽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한천의 시선을 알면서도 괜히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괴물 같은 회복력 덕분에 나환위와 싸우며 입었던 외상과 내상의 상당 부분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할 때.
그런데 그런 단엽이 어젯밤, 한천과 몰래 빠져나가 늦게까지 술판을 벌이다가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천무진과 함께 들이닥쳤던 백아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보통 여자가 아니라니까.’
어떻게 알아냈는지 외곽에 있는 기루에 정확하게 나타난 그녀는 술을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을 끌고 객잔으로 돌아갔었다.
덕분에 아까운 술을 꽤나 많이 남기고 돌아오긴 해야 했지만…….
처음엔 백아린에게 쩔쩔매는 한천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왠지 모르게 그때 한천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천의 시선을 피하던 단엽은 이내 허리를 펴며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자신들의 거점을 바라봤다.
처음엔 무척이나 낯설었던 곳.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푹 쉬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걸 보면 이제는 이 천룡성의 비밀 거점이 어느 정도 집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단엽은 뭔가 말을 하려는 한천의 모습을 눈치채고는 괜히 더 빠르게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빨리들 가자고!"
말과 함께 단엽이 재빨리 말을 몰며 멀리에 있는 거처를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천이 빠르게 뒤쫓으며 소리쳤다.
"치사하게 혼자 도망치냐?"
그렇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처로 내달리는 두 사내들의 뒷모습을 보며 백아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때 보면 참 죽이 잘 맞는다니까."
"그러게. 대화조차 잘 안 하던 처음 모습이 이제는 기억이 안 날 정도야."
"그죠?"
옆에 자리한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단엽이 습격을 당했던 그날, 그때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놀라울 만큼 크게 달라졌다.
마치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붙어 다니는 두 사람.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옆에 있는 백아린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달라진 건 저 두 사람뿐만이 아닌가."
"네?"
"아냐, 아무것도."
말을 마친 천무진은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가 짧게 소리쳤다.
"이럇!"
외침과 함께 말은 거점을 향해 나아갔고, 그 뒤를 백아린 또한 놓치지 않고 뒤따랐다.
* * *
"식사는 어떠십니까?"
천룡성의 가솔인 남윤이 다가오며 물었다.
커다란 뼈가 달린 고기를 손으로 든 채 뜯어먹던 단엽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최고야, 영감."
"남 영감님의 음식은 언제나 좋군요."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식사를 해 대던 한천 또한 칭찬의 말을 던졌다.
오랜 시간 천룡성의 잡무를 맡아 온 남윤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 으뜸은 역시나 요리 실력이었다.
어지간히 입맛이 까다로운 이들조차도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두 사람의 칭찬에 남윤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 천룡성 소속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대홍련으로 납치해 가고 싶을 정도라니까? 영감이 원하면 내가 대홍련에 자리 하나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는데. 이 기회에 갈아타 보는 건 어때?"
단엽이 장난스럽게 말했고 남윤은 그런 그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어휴, 전 이곳에 있어야지요. 여기가 저의 집입니다."
"거, 사람이 너무 좋기만 해도 못 쓴다고."
단엽이 손에 쥔 음식을 먹으며 말을 이어 가던 그때였다.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백아린이 물었다.
"천룡성에 몸담은 지 오래신가 봐요?"
"……꽤 됐지요?"
정확히 시기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지 남윤이 웃으며 말을 흘렸다.
그만큼 오랜 시간 이곳 천룡성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천운백과 천무진의 뒷바라지를 해 왔던 그다.
남윤은 식사를 하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씻으실 따뜻한 물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식사 마치시고 여독을 좀 푸시지요."
"고마워, 영감."
"고맙긴요. 제 일이지요."
"아, 그런데 사부님한테서 연락은 아직도 없어?"
"아쉽게도요."
"그래? 생각보다 길어지시는군."
말을 하며 천무진은 손에 쥔 젓가락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사실 크게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천무진의 마음은 다소 조급했다.
뭔가 그들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은 들었지만 지금 자신의 실력만으로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미 천하제일인이 되었던 경험 덕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전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 천룡성의 무공인 천룡비공을 완벽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천무진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천룡비공의 거의 모든 걸 익힌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천하에 적수가 몇 없다 자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된 건 사실이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이것만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냉정하게 지금의 자신은 평가하면 아직까지 저번 생에서 이룬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머지 천룡비공을 배우지 못하는 이상 한계는 분명 찾아오고 말 것이다.
과거에 그만큼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마공에 손을 댄 탓이고, 그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그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지금,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나머지 천룡비공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
그것이 바로 사부였다.
식사를 멈추고 상념에 잠겨 있는 천무진을 향해 남윤이 다독이듯 말했다.
"백방으로 연락을 주실 수 있도록 흔적을 남겨 두었으니 때가 되면 찾아오시겠지요."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나."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찾을 방도가 없는 상대니만큼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천무진 본인이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천무진이 스윽 주변을 둘러봤다.
시끌벅적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단엽과 한천의 모습, 그리고 한쪽에서 식사를 멈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아린까지도.
바로 이들이다.
저번 생엔 없었던 이 세 사람.
이들이 있기에 자신의 모자람을 채울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조금 마음이 편해진 천무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영감 말대로 식사들 하고 오랜만에 푹 쉬어. 검산파에 화산파까지 정신없는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잘 마무리됐고. 추후에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잠깐은 여유가 있을 것 같으니까."
십천야의 뒤를 쫓는 일은 당분간 소강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그동안 얻은 단서들을 조사하고, 그들을 더욱 옥죄어 나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선의 활약이 필수였다.
그에게 의뢰한 것들에 대한 조사가 되어야 했고, 거기다 이번에 검산파에서 얻게 된 붉은 보석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푹 쉬라는 말에 한천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랍니까."
"언제 또 이렇게 쉴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후회 없을 정도로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마시죠. 노는 건 자신 있거든요."
한천이 스스로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허나 한천은 알지 못했다.
길 거라고 생각했던 그 휴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룡성의 비밀 거점에서 하루를 푹 쉰 백아린은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후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었기에 일찍 적화신루에 다녀올 계획이었던 것이다.
항상 이것저것 바쁜 백아린이지만 최근 들어 또 하나의 업무가 생겼다.
그건 바로 천무진에게 받은 무공인 잔마폭멸류(殘魔爆滅流)를 익히는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계속 움직이느라 수박 겉 핥기 식으로밖에 익히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기에 제대로 이 무공을 습득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기본적인 부분은 모두 머리에 들어가 있는 상태. 이제는 실제로 시간을 들여 그것을 습득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하, 긴장되네.’
문파의 오랜 염원이었던 잔마폭멸류를 천무진 덕분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이 무인인 백아린으로서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들뜬 마음을 애써 달래며 찾아온 적화신루의 거점.
익숙하게 들어서는 그녀를 발견한 사내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총관님."
"오랜만이네. 그간 별일 없었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이곳 사천 성도에 있는 적화신루의 거점에 문제가 생겼다면 백아린이 모를 리가 없을 터.
사내의 말에 픽 웃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뢰했던 정보 중에 뭐 들어온 건 없어?"
"의뢰하셨던 부분 중에서는 딱히 뭐가 없습니다. 다만 의선 어르신 쪽에서 연락이 온 게 있습니다."
"잘됐네. 마침 그게 제일 궁금했거든."
말과 함께 백아린이 손을 내밀자 사내는 재빨리 한 곳에 넣어 두었던 서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서찰을 받아 든 백아린이 그걸 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추가적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면……."
"아 참, 하나 더 드릴 게 있었습니다. 성도를 떠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온 서찰입니다."
말을 끝낸 사내는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또 한 장의 서찰을 꺼내 백아린에게 전달했다. 서찰을 받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깔끔하게 접힌 서찰.
그런데 서찰의 중앙에 접혀 있는 부분은 촛농으로 찍은 듯한 검은 인장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명 봉함인.
서찰을 뜯지 못하도록 접합한 부분에 찍는 인장인 셈이다. 한마디로 서찰을 받을 이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먼저 이것을 열지 말라는 의미였다.
백아린이 물었다.
"어디서 온 거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예, 상부에서 갑자기 전달받은 물건입니다. 그리고 보시면 알겠지만 봉함인이 찍혀 있어 안의 내용은 저희 쪽에서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내용을 확인 못 하는 물건인데도 상부에서 전달했다고?"
적화신루에서 안의 내용을 보지도 못하는 서찰을 자신에게 건넸다. 그 말은 곧 서찰을 보낸 이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과연 그가 누구기에?
백아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누구에게 온 건데?"
"천룡성의 무인분께 전달해야 하는 물건이랍니다."
"그 사람한테?"
천무진에게 온 서찰이라는 사실을 듣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천무진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사부의 존재였다.
‘설마……!’
사부인 천운백의 서찰일 가능성을 떠올리며 백아린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간에 이 서찰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천무진을 만나야만 했다. 그녀는 곧바로 적화신루 쪽 사람과 헤어지고는 빠르게 비밀 거점으로 돌아왔다.
막 입구에 들어서자 바깥에 자리하고 있던 한천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반갑게 손을 들어 올리며 백아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 대장. 좋은 아침……."
"나중에!"
빠른 대답과 함께 백아린이 한천의 앞을 쌩하니 지나쳐 갔고, 그녀는 곧바로 천무진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도착한 천무진의 거처.
백아린은 곧장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백아린의 급한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천무진이 벌컥 문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천무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평소와는 다른 발걸음만으로 이미 뭔가 일이 있음을 눈치챈 천무진이다.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적화신루에서 가져온 검은 봉함인이 찍힌 서찰을 내밀었다.
얼결에 서찰을 받은 천무진은 그걸 들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뭐야, 이 서찰은?"
"저도 몰라요. 당신에게 온 서찰이라고 하던데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그가 급히 손을 움직였다.
툭.
살짝 힘을 주자 서찰을 열 수 없도록 찍혀 있던 촛농으로 된 봉함인이 뜯어져 나갔다.
그렇게 펼쳐진 한 장의 서찰.
그 안의 내용을 바라본 천무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