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봉함인 ― 어디서 온 거지 (2)
서찰의 내용을 살피고 뭔가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는 천무진의 모습에 옆에 자리하고 있던 백아린이 급히 물었다.
"혹시 당신 사부님한테서 온 서찰인가요?"
"아냐.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긴 하네. 이자가 나한테 연락을 할 줄은 몰랐거든."
"대체 누군데요?"
사부에게서 온 서찰은 아니었다. 허나 꽤나 놀랄 만한 상대에게서 온 연락인 건 분명했다.
이 서찰을 보낸 건 다름 아닌…….
"마교 소교주."
짧은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녀가 급히 물었다.
"악준기(岳俊技)한테서 온 서찰이라고요?"
"응, 맞아."
말을 끝낸 천무진은 손에 들고 있던 서찰을 백아린에게 넘겼다.
안에 적힌 내용은 단순했지만, 굉장히 강렬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마교 소교주 악준기(岳俊技)
단 두 줄의 내용.
그렇지만 백아린은 그 서찰의 내용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악준기가 누구인가?
교주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마교의 이인자가 바로 악준기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알아주는 고수 중 하나.
그런 그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천무진에게 말이다.
백아린이 물었다.
"악준기를 알아요?"
"아니, 본 적 없어.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천무진의 한마디에 백아린이 그를 바라볼 때였다.
천무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저번 생에선 내가 그를 죽였거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이 시켰던 명령 중 하나.
마교 안에 있는 소교주를 죽이라는 임무였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시의 천무진은 단신으로 마교로 쳐들어갔고, 그곳에서 그들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오점을 만들어 주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저번 생에서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다른 이도 아닌 마교 소교주를 죽였다는 말에 백아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당신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대단하긴. 내 의지도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한 한심한 짓일 뿐인데."
무덤덤한 천무진의 대답에 백아린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이게 무슨 연락일까요? 마교 소교주 정도 되는 자라면 주변에 그를 돕고 있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굳이 당신한테 이런 연락을 해야 할 이유라면……."
마교에 있는 수하들로 해결할 수 없는 모종의 문제가 벌어졌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룡성에 도움을 청한다는 건 쉽사리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천룡성은 누군가의 요청을 받고 움직이는 문파가 아니다. 그들 스스로 문제를 의식해 움직여 왔고, 그로 인해 혼란한 무림이 평화를 찾곤 했다.
그런 사실을 마교 소교주나 되는 악준기가 모르지는 않을 터.
천무진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고, 백아린은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천무진이 물었다.
"의선한테 온 연락은?"
"아, 그것도 있었어요. 마의와 만났고, 그의 거처에 잠시 머무르며 연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저번에 추가적으로 전달하기로 한 하얀 가루들도 아예 그쪽으로 보내 달라고 연락 받았어요."
원래대로라면 이 근처에 거점을 만들어 연구를 해 갈 계획이었지만 워낙 연구해야 할 내용이 광범위하고, 마의의 도움도 필요한 상황이라 함께 작업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현재 의선은 마교 근처에서 마의와 함께하고 있었다.
백아린에게 대답을 들은 천무진이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흐음."
천무진에게 있어 악준기에게서 온 연락은 다른 이의 도움 요청과는 그 무게가 조금 달랐다.
그 이유는 역시 저번 생과 연관이 있는 자인 탓이다.
저번 생에서 자신이 죽였던 그 모두는 십천야와 뭔가 관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교의 소교주인 악준기 또한 어떠한 부분에서 연결된 점이 있을 게다.
그런 상황에서 날아든 도움 요청.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천무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휴식은 어제로 끝난 것 같군."
단 하루의 휴식.
그 휴식을 채 즐기기도 전이겠지만…….
"백아린."
"네?"
"모두한테 모이라고 전해 줘."
"그거야 어렵지 않죠. 그런데 마음의 결정은 내리신 거예요?"
백아린의 물음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게 답했다.
"마교로 가야겠어."
천무진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아린이 씩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옆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총관이 꽤나 충격을 받을 것 같은데 말이죠."
오랜만의 휴식이라며 놀 계획을 잔뜩 짠 한천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에엑?"
기괴한 비명을 질러 대는 건 역시나 한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도 믿기 어려웠는지 재차 물었다.
"어디를 간다고요?"
"벌써 두 번이나 말해 줬잖아. 마교로 간다고, 마교."
다 이해하고도 계속 물어 대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눈을 부라렸다.
다시금 돌아오는 대답에 한천이 이마를 감싸 쥔 채로 물었다.
"언제요?"
"그건……."
백아린이 슬쩍 천무진에게 시선을 줬다.
그러자 천무진이 바로 답했다.
"준비해야 할 게 좀 있으니 이틀 후에 출발할 생각이야."
"이, 이틀이요? 그럼 제 휴가는요?"
"마교로 가는 동안이 휴가지 뭐. 얼마나 좋아. 좋은 풍경도 보고, 다른 지역에 있는 음식도 먹고."
곧바로 돌아오는 천무진의 대답에 한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거 점점 저희 대장을 닮아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인데……."
"부총관 다루는 법을 배우긴 했지."
피식 웃으며 내뱉는 천무진의 그 말에 한천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던 와중에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단엽이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교라…… 그다지 좋아하는 곳은 아닌데 말이야."
마교나 사파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꽤나 다른 성향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정파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 지내긴 하지만 그만큼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엽 또한 이번 일정에서 빠질 생각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자신의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누구와도 싸울 수준은 충분히 될 정도였다.
거기다 마교까지 가는 거리 또한 상당히 멀었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완벽히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섰다.
단엽이 이처럼 회복에 대해 머리를 굴리는 건 이왕 마교로 가게 되었으니 대홍련의 위신을 위해서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충 일정에 대해 알려 준 천무진은 이내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럼 말해 준 대로 이틀 후 점심 무렵에 출발한다 생각하고 준비들 해. 그리고 백아린은 따로 부탁한 것도 신경 써 주고."
"물론이죠."
본래 의선에게 가져다줄 물건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려고 했었지만, 직접 마교로 가게 된 지금 굳이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직접 가지고 이동할 계획이었다.
가져다줄 물건이라고 해 봤자 하얀 가루와, 처음 무림맹에 들어가 홍천관 관주의 비밀을 캐다 얻게 된 정체불명의 돌멩이.
그리고 검산파에서 얻은 붉은 보석이 전부라 짐의 크기 또한 크지 않았다.
작은 봇짐 하나에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작았기에 이동하는 데 전혀 불편함도 없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자자, 그럼 얼마 안 남은 휴가…… 실컷 즐기라고."
천무진의 그 말에 한천은 그저 울상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떠나기 전 한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남윤이 차려 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막 끝낸 한천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또 언제 남 영감님의 음식을 먹을지 모르겠군요."
"허허, 더 드시지요."
"이미 배가 터질 듯이 차서 말입니다. 도저히 더는 못 먹겠습니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한천이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실실 웃었다. 꽤나 많이 준비되었던 음식들이 어느덧 텅텅 비어 갈 무렵.
식사를 끝낸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교로의 여정은 꽤나 길었고, 그 전에 하나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양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단엽이 잡아 왔던 무인이자, 과거의 삶에선 가장 처음 정체불명 그녀의 부탁으로 죽였던 상대. 잡아 온 지 몇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에 있는 창고에 가둬 둔 그를 이제 슬슬 풀어 주려 마음먹은 것이다.
뭔가를 더 알아낼 것이 없나 몇 번이고 대화를 나눠 봤지만 양휴에게서는 초반에 얻었던 일부의 정보를 제외하고 별다른 건 더 나오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슬슬 내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던 차에 이렇게 긴 여정을 떠나게 되었으니, 아예 그를 이곳에서 내보내기로 정했던 것이다.
먼저 일어난 천무진이 말했다.
"난 양휴를 풀어 줄 계획이니 나머지 인원들은 짐들 챙겨서 그쪽으로 모여. 영감은 양휴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 마차 준비해 주고."
"알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명령을 전달받은 남윤이 곧장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이곳 천룡성의 비밀 거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전에 방건을 내보냈던 방식처럼 양휴 또한 눈을 가리고 마차에 태워 이곳에서 나가게 할 계획인 것이다.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긴 천무진은 곧장 뒤편에 위치한 창고로 움직였다.
꽤나 두꺼운 벽을 지닌 창고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는 기대어 자고 있는 양휴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양휴에게로 다가간 천무진이 발로 그를 툭툭 쳤다.
무릎에 닿는 발길에 놀란 양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곧 천무진을 발견한 양휴가 놀란 어조로 더듬거렸다.
"무, 무슨 일이오?"
"팔자 좋네. 이 시간까지 자고 있고."
"그거야 할 게 없으니까……."
내공까지 제압당하고 이곳 창고에서 갇혀 지낸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식사를 가져다주는 남윤과는 어느 정도 안면을 텄지만, 그 외의 인물이 나타나면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양휴가 또다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이제 날 주, 죽이……."
오랜 시간 가둬 둔 채로 이것저것 조사를 했지만 신통치 않은 대답만 이어 왔다는 사실을 양휴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사실도.
이런 와중에 찾아온 천무진.
당연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양휴의 모습에 천무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양휴의 긴장은 더욱 심해졌다.
새하얗게 변한 얼굴은 자신이 당장이라도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도, 도망쳐야 하나?’
창고의 문은 열려 있었고, 거리도 가깝다.
하지만 저곳까지 달려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자신은 내공조차 쓸 수 없고, 이곳에 있는 저 사내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내공을 쓸 수 있는 몸 상태였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라는 소리였다.
결국 이렇게 가만히 앉아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한 양휴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순간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힉!"
놀란 양휴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단엽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 딱히 본 적 없었던 단엽의 등장에 양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끌고 온 바로 그 당사자가 단엽이었으니까.
슬쩍 창고 안으로 들어서던 단엽이 양휴를 보고는 이내 반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여, 오랜만이네."
"오, 오……."
차마 대답조차 못 하는 그 와중에 단엽의 뒤편에서 또 다른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진과 몇 차례 이곳에 찾아왔던 백아린이었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힘을 몇 번 봤던 양휴로서는 급하게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들이 모두 자신의 앞에 모인단 말인가.
대체 자신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창백한 양휴의 속내도 모르고 창고 안으로 들어선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말했다.
"대충 다 준비 끝났어요."
"그래? 그럼 부총관이 오면 바로 출발하지."
"그렇게 하죠. 그런데 대체 뭘 하기에 이렇게 늦는지, 원."
백아린이 슬쩍 투덜거릴 그 무렵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이내 뒤편에 있는 입구에서 한천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백아린이 한천을 향해 짧게 말했다.
"늦어!"
"하하, 깜빡하고 중요한 물건을 빼먹었지 뭡니까. 가져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말과 함께 한천은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백아린을 향해 가볍게 휙 던졌다. 허공에서 날아오는 어린애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뭔가를 백아린은 가볍게 잡아챘다.
그건 바로 홍천관 관주 금호와 연관되었던 무림맹 창고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돌멩이였다.
돌멩이를 쥔 백아린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이렇게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다고?"
찾고 있는 몽혼약 가루의 원료가 되는 걸로 파악되는 이 돌멩이 또한 의선에게 전달해야 할 물건 중 하나였다.
작게 고개를 저으며 백아린이 막 그 돌멩이를 품에 넣고 있는 바로 그때…….
"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아린이 움직임을 멈추고 힐끔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양휴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백아린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양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그건 바로…… 자신의 손에 들린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