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흑주염 ― 이건 돌이 아니오 (2)
천무진이 마교에서 양가장으로 목적지를 바꾸고 움직이는 그때.
중원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비밀 장소.
그 비밀 장소의 주인인 정체불명의 인물이 내는 목소리가 휘장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으음."
딱히 뭔가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는 상당히 머리가 복잡했다. 최근 있었던 천무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천무진의 아래로 들어간 단엽이 화산파에 갑작스레 나타나서는 그곳에 방문한 우내이십일성 중 하나인 나환위를 쓰러트렸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글쎄.
그것만으로 천무진 일행 전부가 움직인 것은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 섞인 소리를 흘려보내던 그가 휘장 건너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고?"
"네, 어르신. 인근에 사람을 심어 뒀지만 특별히 눈에 튀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의 주인공은 바로 화산파의 자운이었다.
얼마 전까지 화산파에 있는 천무진 일행의 움직임을 직접 감시했던 그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상과는 달리 특별히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천무진이 움직였다면 뭔가 자신들과 관련된 어떤 것 때문일 확률이 컸다.
그런데 화산파에 나타나서 한 일이라고는 고작 나환위를 쓰러트린 것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의아했다.
"화산파 장문인과 따로 밀담을 나눈 건 아니겠지?"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신경 쓰여 장문인 쪽에도 사람을 붙여 뒀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걱정할 만한 일이 없더군요."
"그놈이 허튼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천무진이 움직일 때마다 십천야 내부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해서 참아 왔다.
천무진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부복한 채로 자리하고 있던 자운이 슬쩍 고개를 올려 휘장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리고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천무진 일행 중 한천이라고 있잖습니까. 기억하십니까?"
"뭐 그런 놈이 있다는 것 정도는."
별반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천무진 일행이라 하니 얼추 사람 하나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를 향해 자운이 말했다.
"그놈이…… 제 검을 막았습니다."
"……뭐라고?"
휘장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작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천은 고작 칠급으로 분류되던 자다.
한마디로 일류 수준의 무인으로 판단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운의 검을 막았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휘장 안의 사내를 향해 빠르게 자운이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최소 오급, 최악의 경우 사급 정도의 실력까지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그놈은 고작 적화신루의 부총관이야. 일개 부총관이 사급?"
십천야의 분류표로 쳐서 사급이라고 한다면 우내이십일성 중 다소 실력이 부족한 이들 정도가 속한 수치였다.
오급이라고 해도 무림의 백대고수 수준이니 쉬이 넘길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급이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그 정도라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실력자라는 뜻이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그의 말에 자운 또한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스스로도 기가 막혔으니까.
자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걸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운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도 믿기 어렵지만…… 제가 느낀 바는 그렇습니다."
"잘못 판단했을 확률은?"
되묻는 그를 향해 자운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몇 차례고 검을 겨뤄 봤습니다. 확실합니다."
"하아, 기가 막히는군그래. 언제부터 백대고수 이상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발에 치일 정도가 된 거야?"
백아린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그런 실력자가 하나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계산이 많이 어그러졌다.
헌데 그게 끝이 아니란다. 최악의 경우 천무진의 옆에는 또 다른 엄청난 조력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쉽사리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휘장 너머의 사내는 골치가 아팠다.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무인들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인데 그들 모두가 천무진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적화신루 따위가 이렇게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뛰어난 정보 단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들 정도는 사내에게 안중에도 없던 존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던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는 무척이나 거슬렸다.
휘장 안의 그가 명령을 내렸다.
"상무기에게 전달해. 적화신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특히나 백아린이나 한천이라는 그 두 명에 대해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전해. 이번에도 또 이따위의 정보를 가져다준다면…… 귀문곡 또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라고."
적화신루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보력을 지녔다 판단했던 귀문곡.
그런데 그들은 매번 적화신루를 등에 업은 천무진에게 자신들이 휘둘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이토록 밀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정보전에서 지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막 휘장 안의 인물이 명령을 내린 그때였다.
바깥에서 수하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와 휘장의 앞쪽에 부복했다.
휘장 안에 있는 인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어르신을 뵙기 위해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의아한 듯 말을 꺼내는 바로 그 순간 부복해 있는 수하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자리한 인물.
그렇지만 휘장 너머에 있는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휘장 안에 있던 이가 찾아온 손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습니까?"
들려오는 건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인물의 목소리였다. 그런 상대를 향해 휘장 안에 있는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직접 보는 게 얼마 만이지?"
"글쎄요.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군요."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군그래.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네가 이렇게 직접 날 찾아올 줄이야."
"그만큼 급한 일이니까요."
"급한 일?"
"천룡성의 일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천룡성이라는 말에 휘장 안쪽에 있는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나타난 자에게서 천룡성의 정보를 받은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랬기에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정체를 감추려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일은 스스로 피하지 않았던가? 그런 너를 움직이게 할 정도의 정보라 이건가?"
"우선적으로 얼마 전에 천룡성의 작은 용이 섬서성으로 움직인 사실에 대해 아실 겁니다."
"알고 있어. 화산파에 나타났다더군."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진짜 목적지는 화산파가 아니었지요."
"……그럼?"
"검산파. 그곳이 진짜 목적지였을 겁니다."
"뭐? 검산파에 천무진이 나타났다는 보고는 들은 게 없는데? 대체 거기는 무슨 목적으로 간 거지?"
"모릅니다. 그의 진짜 목적은 어르신이 알아내셔야 할 부분인 것 같군요."
천무진의 목적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어둠 속의 인물은 자신이 아는 정보에 한해서만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휘장 속 인물이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인 건 사실이지만 이것이 네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겨우 검산파에 대한 정보를 전할 생각이었다면 번거롭게 직접 찾아오기보다는, 전서구를 통해 전달했을 게다.
이곳에 찾아온 진짜 이유.
그건 바로…….
"작은 용이 양가장으로 움직였습니다."
"……!"
보고를 듣는 순간 휘장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인물이 놀란 듯 움찔했다.
잠시 이어진 침묵, 이내 휘장 안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흑주염의 정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게 양가장의 물건이라는 것도요."
"이런 망할!"
쾅!
소리와 함께 휘장 안에 있던 탁자가 단번에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천무진이 양가장으로 움직였고, 흑주염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말에 반응한 건 비단 휘장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자운 또한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흑주염이 무엇인가?
십천야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이 바로 그 흑주염을 통해 만들어지는 몽혼약이다.
그런데 그걸 천무진이 알아차렸단다.
여태까지 이런저런 타격을 입어 왔지만 그 어떠한 것도 지금 이것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천무진이 움직였다는 정보를 가지고 온 인물이 이내 입을 열었다.
"여유 시간은 나흘 정도입니다. 아마 그 시간이 지나면 작은 용이 양가장에 도착할 겁니다."
남은 시간까지 전해 듣게 된 휘장 안쪽에 있는 인물은 더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자운!"
"예, 어르신."
"지금 양가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십천야가 누구지?"
"왕도지(王島至)입니다."
십천야에게 양가장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고, 그랬기에 가까운 곳에 언제나 한 명 정도의 인물을 준비시켜 놓곤 했다.
그리고 지금 양가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십천야 중 왕도지라는 자였다.
휘장 안의 그가 곧바로 말했다.
"당장 전서구를 통해 왕도지에게 전해. 천무진이 그곳으로 간다고.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것들을 모두 옮기라고.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알겠습니다."
말을 끝낸 자운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급박한 일이었고,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왕도지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해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자운이 사라진 거처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휘장 안의 인물과, 지금 이곳을 찾아온 인물.
잠시 침묵을 지키던 휘장 안의 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져온 정보 덕분에 위기는 면했군. 이 일은 잊지 않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무덤덤하게 돌아오는 상대의 대답.
그런 그를 향해 휘장 안에 자리한 사내가 물었다.
"그쪽도 천운백에 대한 정보는 뭐 없고? 매번 그랬지만 이번에도 행방이 영 묘연해서 찾을 수가 없단 말이야."
"언제나 그랬지 않습니까.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때가 되면 또 어디에도 있는 그런 자니까요."
"혹시라도 천운백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곧바로 알리는 것 잊지 말고."
"물론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 휘장 안에 자리한 인물이 물었다.
"바로 돌아갈 생각인가?"
"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말을 끝맺은 그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창을 통해 쏟아진 달빛이 그자에게 스며들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얼굴.
천룡성의 하나뿐인 가솔.
남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