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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59화 (158/293)

159화. 양가장 ― 벌써? (1)

"크아, 좋구만!"

소매로 입가를 거칠게 닦아 내고 있는 건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커다란 체구에 옷 사이사이로 드러난 신체는 무척이나 다부졌다.

양팔은 바위라도 으깨 버릴 것만 같은 근육이 꿈틀거렸고, 어깨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는 왠지 모를 야수의 느낌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커다란 기루의 방.

그의 앞으로는 수십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이 탁자 위에 즐비했고, 양옆에는 여섯 명에 달하는 기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술을 들이마신 그는 익숙하게 양옆에 있는 기녀들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는 왼편에 자리한 여인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이내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넌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예,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닷새 전쯤에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기녀가 속삭이듯 말했고, 그런 그녀를 사내는 기분 좋은 얼굴로 바라봤다.

"그래? 넌 참 운이 좋구나. 내 마음에 들었거든."

"영광이에요. 왕 대협."

기녀는 자신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근육질의 사내를 향해 가식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왕 대협이라 불리는 사내는 이곳 기루에서 가장 큰손으로 꼽혔다.

열흘에 한 번꼴로 기루에 찾아와서 혼자 쓰는 돈이 가히 이곳의 평소 하루 매상에 필적할 정도니 당연히 꽤나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은 얼굴로 그가 손에 든 잔을 내밀었다.

"자, 어디 한 잔……."

왕 대협이라 불린 자가 기녀에게 술을 받으려고 하던 그 찰나 갑작스럽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

그 시끄럽던 발소리가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방 앞에서 멈춘 순간 사내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이내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야?"

드르륵.

대답을 하기 무섭게 방문이 소리 나게 열렸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사내 하나가 왕 대협이라 불리는 그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자신의 수하를 향해 그가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방해하지 말랬잖아? 대체 뭐 그리……."

"상부에서 날아온 급보입니다, 대장."

곧장 돌아오는 수하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꿈틀했다. 이곳에 있는 자신에게 날아들 만한 급보라면…….

쉬는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짜증만이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부 나가."

"……예?"

술을 따르려고 병을 들고 있던 기녀가 되물었을 때였다.

쾅!

탁자를 치며 그가 소리쳤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나가라고!"

눈을 부라리며 떨어트린 불호령에 방 안에서 웃고 있던 기녀들이 사색이 되어 뛰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돌변한 그에게서는 매서운 기운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왕 대협이라 불리는 사내, 그의 정체는 바로 십천야의 한 명인 왕도지였다.

자리에 앉은 채로 왕도지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빨리."

그의 재촉에 수하가 품 안에 넣어온 서찰을 꺼내 빠르게 건넸다. 서찰을 받아 든 왕도지는 급히 그걸 펼쳐 안의 내용을 살폈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양가장을 담당하고 있던 상황, 당연히 그 급보가 그곳과 관련되었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그랬기에 이토록 급하게 모두를 물리고 서찰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상황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좋지 못했다.

‘천룡성이 꼬리를 잡았다고?’

서찰 안에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적혀져 있었다.

천룡성의 무인이 흑주염에 대해 알아차리고 동료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급히 대비하라는 게 주요 골자였다.

서찰의 정확한 내용까지 확인한 왕도지에게 더는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서찰 내용에 의하면 천무진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도지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끌어모을 수 있는 인원은 모두 모아서 준비시켜. 양가장 내부에 있는 물건들을 최대한 옮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싸움에 대비해."

"알겠습니다, 대장. 곧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말을 마친 수하가 곧바로 기루의 방을 박차고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왕도지는 이내 옆에 내려 두었던 커다란 도를 등에 짊어졌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기루의 음식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열흘에 한 번 있는 휴식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허나 지금은 그런 걸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양가장은 자신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의미가 있는 곳. 그곳을 잃을 순 없었으니까.

왕도지가 중얼거렸다.

"……버러지들 때문에 귀찮게 됐군."

섬서성 녕강(寧强) 인근에 위치한 준양이란 마을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섬서에서 꽤나 알아주는 상단도 자리하고 있었고, 무림에서 크게 비중이 있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구색을 갖춘 문파인 양가장 또한 터를 잡고 있어서였다.

양가장은 꽤나 긴 역사를 지녔지만, 그에 비해서 그리 뛰어난 무림 문파는 아니었다.

무인의 숫자도 바깥에 나가 있는 이들을 다 포함해서 채 육십 명이 되지 않는 규모. 그런 그들의 가족까지 해서 얼추 삼백 명 정도로 구성되어진 문파가 바로 양가장이었다.

허나 크지 않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법 재력을 지닌 문파였다. 섬서 지역의 몇몇 특산품들을 중원 곳곳으로 팔아 돈을 벌었고, 준양에 있는 유명한 상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거래를 이어 온 덕분이다.

양가장은 원래부터 어느 정도의 명성은 지니고 있었는데, 눈에 띌 만큼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것은 수십 년 전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주인 양석창(楊析昶)의 힘이 컸다.

그가 가주가 된 이후 양가장은 예전에 비해 훨씬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양석창의 뒤에는…… 십천야가 있었다.

가주 양석창의 집무실.

그곳에서 양석창은 누군가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근육질에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사내, 십천야의 일원인 왕도지였다.

육십이 훌쩍 넘은 양석창은 눈앞에 있는 왕도지의 말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만큼 지금 그에게서 들은 말이 충격적이었으니까.

잠시 당황했던 양석창이 이내 정신을 추스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서둘러 흑주염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술자들도 마찬가지고."

"그걸 지금 당장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당장에 모든 걸 외부로 돌리는 건 무리가 있소. 시간을 며칠만 주면……."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에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천무진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출발한 시기와, 가장 마지막에 그들 무리를 확인한 곳을 계산해 보건대 여유가 없었다. 이르면 사흘 이내에 당장 이곳 양가장에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딱 잘라 말하는 왕도지의 말에 양석창은 잠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내 양석창이 말했다.

"알겠소. 그렇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모든 흑주염을 빼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소."

"상관없습니다. 기술자와 재료만 있다면 다시금 물건을 완성시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건을 다시금 제조하는 데 있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시간 내에 빼낼 수 있는 만큼 회수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하리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급한 결정을 내린 거요?"

물어 오는 양석창의 모습을 보며 왕도지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별거 아닙니다. 다만 천룡성이 이번 일에 달려들어서 말이지요."

"천룡성이 말이오? 허어, 이거야 원. 양가장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 벌어진 듯하오. 천룡성이 우리 양가장을 들쑤시고 다니면 피해가 적지 않을 터인데."

양석창이 말을 하며 슬쩍 왕도지의 표정을 살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왕도지는 잘 알았다.

돈이다.

자신들이 입을지도 모를 피해를 언급하며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게다.

허나 그런 양석창의 행동에 왕도지는 조금의 표정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양석창의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양가장의 가주 양석창.

젊었을 때부터 대단한 야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십천야의 입장에서도 손을 잡기에 여러 가지 용이했다.

욕심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조종하기 편하니까.

허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며 양석창은 보다 많은 걸 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야 어느 정도 허용 범위 안이었으니 용서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선을 넘는 순간 십천야의 입장에서도 더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너무도 손쉽게 목을 비틀어 버릴 정도의 상대였지만 아직은 이용 가치가 남아 있는 자다. 그랬기에 속내를 감춘 채로 왕도지가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당연히 적절한 보상은 해 드릴 생각이니 말입니다. 저희가 한 번이라도 양가장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허허, 걱정이라니 난 그런 것을 한 적이 없소. 이리 신경을 써 주니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고맙다는 듯 말하는 그를 향해 왕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서둘러 작업을 시작하죠. 제련된 흑주염이 천룡성의 손에 들어가면 곤란해서 말이지요."

어차피 완벽하게 빼돌리는 건 시간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상대에게 내어 줄 건 내주면서 중요한 것만큼은 모두 회수한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상대를 보다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무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건 제련된 흑주염과 기술자들이다. 그들만 지켜 낸다면 나머지는 어느 정도 내어 줄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꽤나 타격이 크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다.

서두르자는 왕도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양석창이 급히 수하를 불러 뒤처리를 위한 명령을 내렸다.

왕도지가 자신의 부탁대로 일 처리를 끝낸 양석창을 향해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당장에는 우선 제련 중이던 흑주염의 마무리가 급하다 판단하여 그쪽에 인원을 투입할 생각이오. 그 이후에 곧바로 바깥으로 빼낼 생각이니 아무래도 내일 오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전 중에 시작해 주시죠."

"허어, 좀 버거울 것 같은데."

말을 내뱉는 양석창을 향해 왕도지가 준비해 두었던 전낭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양석창은 슬쩍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샛노란 금화를 확인한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순간 웃음을 흘리다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뒤늦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니 한번 해 보리다."

"부탁드리죠. 그럼 내일 오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왕도지는 짧은 인사를 끝내고 양석창과 헤어졌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와 합류한 그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지."

말을 끝내고 나아가는 왕도지의 뒤편으로 수하가 따라붙었다.

장주인 양석창의 거처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야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돈에 미친 영감 같으니라고."

필요해서 손을 잡고 있긴 했지만 자신이 저런 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왕도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도지의 중얼거림에 수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돈이라도 요구한 겁니까?"

"그놈이 항상 그렇지."

익숙한 일이다 보니 왕도지도, 그의 수하도 그것에 대해 별반 특별한 감정이 일지는 않았다.

수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따라 요구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슬슬 불쾌감이 밀려들어 왕도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상관없었다.

다시 표정을 푼 왕도지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어디 마음껏 욕심내 보거라."

발걸음을 멈춘 그가 이미 멀어져서 보이지도 않는 양석창의 거처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니까."

뜻 모를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와 함께 왕도지는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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