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왕도지 ― 우연이라 (1)
적화신루 쪽 사람들을 만나 양가장에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전달받은 백아린과 한천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게 휘몰아칠 생각에 두 개로 일행을 나눴고, 임무를 마쳤기에 최대한 빠르게 천무진과 단엽이 있는 쪽으로 합류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양가장으로 나아가는 도중 한천이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은 벌써 도착했겠죠?"
"아무래도."
시간상으로 봤을 때 지금쯤이면 천무진과 단엽은 양가장에 들이닥쳤을 게다. 좋은 만남이 될 확률이 적으니 지금쯤 뭔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천무진과 단엽, 둘이 같이 있는 이상 위험한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극히 적었으니까.
허나 혹시 모를 일 또한 방비해야 할 터.
백아린이 짧게 말을 이었다.
"서두르자고."
"그러죠, 대장."
그렇게 두 사람이 짧게 대화를 나누며 양가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그때, 맞은편 멀리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방금 전 양가장에서 장주의 목숨을 거둔 왕도지였다.
이 마을에 천무진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왕도지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천무진이 벌써 이 마을에 도착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치잇,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까지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건 천무진의 도착일이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더 걸릴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이곳에 도착했다니,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을 훨씬 웃돌 정도로 빠르게 도착한 천무진 일행.
그랬기에 왕도지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선산에 있는 비밀 거점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련된 흑주염이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를 거치고 있는 흑주염들.
그것이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방금 전 장주인 양석창이 말했던 대로 한 시진에서, 두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것까지 완성을 시키고 옮기는 걸로 이번 임무는 끝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놈들의 정보력이라면…… 언제 선산을 덮칠지 모른다.’
적화신루의 정보를 등에 업은 천무진은 매번 십천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왕도지로서는 다소 과감한 결단을 내린 상황이었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제련 중인 흑주염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을 완성까지 기다렸다가는 뒤를 잡힐 공산이 컸다. 그렇지만 만들어지고 있는 흑주염을 그냥 두고 떠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이렇게 직접 선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직접 만들어지는 그 흑주염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다.
천무진의 손에 제련된 흑주염만큼은 들어가면 안 되었기에 왕도지는 그것들을 직접 없애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천무진 일행이 마을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기 무섭게 양가장을 떠난 그다. 천무진 측이 도착하고 상황을 확인한 직후 선산의 존재를 알아내 바로 움직인다 해도…… 최소 한 시진 이상의 시간은 소요될 터.
그때라면 이미 자신은 제련 중인 흑주염을 없애고 사라져 있을 게다.
현재 완성 막바지에 다다른 제련 중인 흑주염을 포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반나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되었을 터인데.’
아쉬움을 삼키며 왕도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묻혀 움직이는 중이었던 그의 옆으로 백아린과 한천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막 왕도지의 옆을 지나쳐 간 직후.
백아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동시에 한천의 귓가로 그녀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부총관. 방금 지나간 그자 봤어?』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로 날아든 전음. 마찬가지로 한천 또한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그 전음을 받아 냈다.
『냄새 한 번 지독하네요. 숨기려고 애쓴 모양이긴 한데…… 그래도 피 냄새는 쉽사리 감추기 어렵죠.』
옷도 갈아입고, 손에 묻은 피도 닦아 냈지만 미약하게 남아 있던 혈향.
백아린과 한천은 그것을 놓칠 정도로 만만한 무인들이 아니었다.
피 냄새를 확인한 순간 백아린은 잠시 고민했다.
저 피 냄새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저자가 살수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를 죽였을 확률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백아린의 감각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뭔가 수상하다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걸어 나가는 백아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한천이 전음을 날렸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물어 오는 그의 질문에 결국 백아린은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적화신루에서 얻은 양가장의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 더미를 한천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받아.』
『쫓으시려고요?』
『응, 그냥 보내기엔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그 사람한테는 말 잘 전해 줘. 혹시 별일 아니면 금방 양가장으로 갈게.』
『알겠습니다, 대장.』
서류를 건네받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천이 서둘러 전음을 보냈다.
『대장, 조심하시고요.』
『걱정은.』
가볍게 픽 웃음을 흘려 보낸 백아린은 곧장 피 냄새를 감춘 채로 걸어가는 왕도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소 거리가 벌어지긴 했지만 덩치가 큰 탓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너무 가까이 붙을 생각은 없었기에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은 거리였다.
그렇게 백아린은 왕도지의 뒤를 쫓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슬쩍슬쩍 주변을 살피며 나아가는 왕도지의 뒤를 쫓는 백아린의 움직임은 은밀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로 그렇게 쫓아가던 도중 왕도지가 마을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을 바깥으로 빠져나와 인적이 없는 장소에 이르기 무섭게 경공을 펼치며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그 순간.
스윽.
뒤편에서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된 뒷모습.
하지만…….
‘……놓치지 않는다고.’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백아린의 신형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가장 소유의 선산에 자리한 커다란 창고.
목적지인 창고에 도착한 왕도지가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들어선 창고 내부에는 그 누구도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오전 중에 이미 기술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 뒀기 때문이다.
창고 내부에는 마지막 단계로 향해 가고 있는 흑주염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긴 비단 위에 쌓여 있는 흑주염을 향해 다가간 왕도지는 손으로 그것들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이내 짧게 소리를 내뱉었다.
"끙, 거의 다 되었는데 말이야."
정말 조금의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완성될 상황이었지만 왕도지는 욕심을 버렸다.
이만한 양을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금전적인 손해를 보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천무진의 손에 들어갈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막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말과 함께 왕도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술통을 꺼내어 들었다. 제법 많은 양의 술이 담긴 그 술통의 뚜껑을 연 왕도지가 막 그걸 흑주염의 위로 들이부으려는 바로 그 찰나.
움찔.
순간 뒤편에서 묵직한 무엇인가가 날아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우웅!
황급히 몸을 돌린 왕도지는 서둘러 도를 꺼내어 들며 날아드는 정체불명의 뭔가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날아드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왕도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검?’
무식할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커다란 대검이 번개처럼 자신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검을 쥐고 흔드는 여인의 모습도 덩달아 눈에 들어와 박혔다.
백아린, 그녀가 성난 맹수처럼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카앙!
가까스로 막아 낸 공격, 그렇지만 대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컸는지 왕도지의 몸은 그대로 창고의 벽을 뚫고 바깥까지 날아가 버렸다.
황급히 바닥에 착지해 내긴 했지만 파괴력이 얼마나 강한지 몸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 나갔다.
콰드드득.
땅에 두 개의 긴 줄이 만들어지면서 왕도지가 가까스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앞에 위치한 창고를 응시했다. 그리고 때마침 왕도지와 충돌하며 부서진 벽의 구멍으로 백아린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 앞에 선 그녀가 대검을 어깨 위에 떡하니 걸쳐 놓은 채로 왕도지를 응시했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어쩌지. 그 술병에 담긴 게 뭔가 중요했던 것 같은데……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 버려서."
그녀의 말에 왕도지는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바라봤다.
백아린의 공격의 충격파 때문인지 술병은 이미 쥐고 있던 주둥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깨져 나가 버린 상태였다.
그 때문에 안에 담긴 내용물 또한 모두 쏟아져 버린 상황.
왕도지가 백아린을 향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그쪽이 날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날 죽이려고도 했던 자들이잖아."
다른 십천야였던 주란의 일을 떠올리며 내뱉은 백아린의 말에 왕도지는 잔뜩 표정을 구겨야만 했다.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으니까.
적화신루의 총관 백아린.
왕도지는 쥐고 있던 술병의 주둥이 부분을 옆으로 휙 내던졌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십천야 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었으니까.
‘……역시 그 백아린이라는 계집이구나.’
천무진의 옆에서 큰 조력자로 활약하는 여인.
왕도지가 물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어 오는 왕도지를 향해 백아린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고 나타나긴. 네가 여기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줬잖아."
"……내 뒤를 쫓아왔다고?"
"응, 마을에서부터."
돌아오는 백아린의 대답에 왕도지는 놀란 속내를 감추기 어려웠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덩달아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십천야의 인물이라는 걸 알고 뒤를 쫓았는가다. 천무진 일행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양가장을 빠져나와 눈에 뜨이지 않게 움직인 그다.
왕도지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날 어떻게 알아보고?"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렇게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백아린의 대답에 그제야 왕도지는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딴에는 완벽하게 지웠다 생각했거늘 미세하게 남은 그 피 냄새 때문에 이처럼 뒤를 잡혀 버린 모양이다.
‘버러지 같은 놈이 끝까지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군.’
자신이 죽인 양가장의 장주 양석창을 떠올리며 왕도지는 이를 갈았다. 결국 그를 죽이며 묻은 피 때문에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생각돼서다.
이를 꽉 깨물던 왕도지가 이내 주변을 확인했다.
뒤를 잡혀 꼴이 우습게 되어 버렸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백아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천무진까지 이곳에 나타났다면 정말로 곤란했을 테니까.
도를 움켜쥔 왕도지는 자신의 앞에서 한 치의 긴장도 없이 서 있는 백아린을 응시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저 시선이.
마치 자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저 자신감이 말이다.
왕도지가 입을 열었다.
"주란이 네게 당했다며? 그거 하나 믿고 이리 까부는 모양인데…… 난 그렇게 우연이라는 게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왕도지는 처음부터 적화신루의 총관에 불과한 백아린이라는 인물에게 주란이 졌다는 사실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그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적화신루의 사총관 따위에게 십천야가 지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뭔가 우연이 겹치지 않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런 왕도지의 말에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우연이라……."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대검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쩌지? 그 우연이라는 것이 오늘도 당신들 편은 아닐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