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잔마폭멸류 ― 잘 받아 가지 (1)
백아린을 감싸며 아래에서부터 솟구친 검은 색의 검기들은 한 떨기의 꽃을 연상케 했다.
허나 그것은 꽃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섬뜩했다.
스스스스!
검기가 밀려드는 스산한 소리에 왕도지의 안색이 절로 굳었다.
아직 완전히 펼쳐지지도 않은 무공.
그렇지만 왕도지는 알 수 있었다.
저 무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바닥과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밀려드는 불안감, 동시에 알 수 없는 묘한 감각까지.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 왕도지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했다. 지금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는 저 정체 모를 무공에 자신이 찢어발겨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백아린의 잔마폭멸류를 마주한 상황에서 왕도지가 내린 선택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비격전십이사(飛擊戰十二死).
그가 지닌 최강의 무공이자, 무림에서는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도살객(刀殺客)의 것이다. 도살객은 수십여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살인귀였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베어 넘겼고 심지어 힘없는 이들 또한 도살객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쉽사리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그.
결국 도를 넘어선 도살객의 행동에 무림맹이 나섰다. 허나 무림맹이 추포하기 전 그는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엔 어딘가에 숨어 몸을 감췄을 거라 판단하고 오랜 시간 사라진 도살객을 쫓았지만 결국 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는 중원에서 잊히다시피 한 도살객이라는 별호.
그 도살객의 비전무공이었던 비격전십이사가 지금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두둑.
몰려드는 기운에 왕도지의 몸이 일순 부풀어 올랐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근육들이 팽창하는 그 순간 모든 기운들이 양팔을 타고 손에 들린 도로 몰려들었다.
웅웅웅!
왕도지가 이를 악물었다.
‘죽여야 한다. 아니면…… 내가 죽어.’
전신을 휘감으며 터져 나온 기운에 도에서는 새하얀 도강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것들이 왕도지의 몸을 기점으로 하여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그를 중심으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왕도지의 도를 휘감기 시작한 도강, 그에 비해 백아린의 주변에 피어오르는 연꽃잎을 연상케 하는 검은 기운들은 검기의 형상이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강기는 검기보다 훨씬 더 위의 단계라고 봐야 했다.
물론 어떠한 무공인지, 또 펼치는 무인의 실력 차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있지만 대다수의 상황이라면 강기가 검기를 파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랬기에 왕도지는 지금 자신의 선택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소름이 돋게 만드는 기운.
허나 그건 검기였고, 그렇다면 강렬한 파괴력보다는 날카로움을 가진 공격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은 생각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드러내기 전에 박살을 낸다.’
제대로 무공이 펼쳐지기 전에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빠르게 모여든 도강이 하늘을 향해 찌르고 들어가던 그때.
"으오오오!"
짓눌러 오는 도강의 힘에 왕도지의 근육이 더욱 거세게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 힘을 앞으로 쏘아 내며 왕도지가 날아올랐다.
번쩍!
일순 모든 것이 타오를 듯 왕도지의 도강에 휩쓸리는 그 순간.
백아린의 눈동자는 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밀려드는 도강, 그리고 왕도지까지.
도강과 함께 달려드는 왕도지의 모습에서는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동시에 모든 걸 부술 것만 같은 힘까지.
허나…… 백아린은 웃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위로 튕기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피피핑!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던 검은 검기의 형상들이 쇳소리를 내며 튕겨져 오른 것이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던 그 기운들이 모두 수평으로 누운 채 한 곳을 겨눴다.
왕도지가 날아드는 방향, 바로 그곳이었다.
허공으로 떠올라 한곳을 노리고 있는 검은 기운들은 흡사 날카로운 검 같았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열두 개.
찰나 그녀가 달려드는 왕도지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휘둘렀다.
부웅!
순간 허공에 떠 있던 그 열두 개의 검은 형상들이 날아드는 도강을 향해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열두 개의 검은 기운을 바라보며 왕도지는 이를 악물었다.
‘부순다!’
어차피 이것은 검기일 뿐이다.
특히나 한곳에 힘이 집중된 것도 아니고 여러 개로 나눠진 상황.
파괴력 또한 그럴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힘을 집중시킨 도강으로 날아드는 일부분을 파괴하기만 해도, 그 이후엔 곧장 백아린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부아앙!
왕도지가 자신감 가득하게 도강에 휩싸인 도를 휘두르는 찰나.
드드득!
"……어?"
자신의 도강이 백아린이 뿜어낸 검은 형상들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불안한 느낌에 왕도지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검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왕도지의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말았다.
자신의 도강과 충돌하며 사라져야 할 검은 기운들이 건재하다.
어디 그뿐이랴.
이 기운들을 부수며 자연스레 안쪽으로 파고들 거라는 생각에 무시했던 나머지 것들이 왕도지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지옥에서 쏟아져 나온 악귀가 연상됐다.
‘이런 젠……!’
채 생각을 끝내기도 전.
콰콰콰콰아앙!
왕도지가 있던 공간이 열두 개의 검은 기운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땅이 요동쳤고, 동시에 그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두두두!
요동치듯 떨려 오는 땅.
그곳에서 두 발로 버티고 선 백아린이 소매로 가볍게 얼굴을 닦아 냈다.
"휴우."
한 번의 공격, 그렇지만 백아린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그만큼 이 잔마폭멸류라는 무공에는 어마어마한 내력 소모가 뒤따른다는 소리였다.
사실 지금 이 잔마폭멸류는 완벽하지 못했다.
익히기 시작한 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니…….
실제로 잔마폭멸류를 완벽하게 대성한다면 지금보다 검은 기운들의 숫자가 늘어나 스무 개에 달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실리는 파괴력 또한 지금보다 더욱 거세진다.
사실 열 개까지 늘리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허나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하나를 늘릴 때마다 그 이전에 비해 갑절에 가까울 정도의 노력과 깨달음이 필요했다. 당연히 속도는 점점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처럼 열두 개를 다루는 것 자체가 백아린의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쉬운 부분도 없잖아 있었지만…….
백아린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실로 엄청난 무공이지 않은가.
거기다가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문파에서 사라졌던 무공이다. 사라질 뻔한 그 명맥을 이은 것 자체가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그것이 이런 말도 안 될 정도의 무공이라니.
덩달아 이 무공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내준 천무진에게 고마웠다.
천무진은 항상 말한다.
도움만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 말에 백아린은 언제나 고개를 젓곤 했다. 겉보기에 도움을 주는 쪽은 분명 자신과 적화신루일 것이다.
허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으로 인해 적화신루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무공까지도.
‘……도움을 받는 건 제 쪽인 것 같네요.’
속으로 중얼거리던 백아린이 손에 들린 대검에 내력을 불어 넣었다.
흩날리는 흙먼지 속을 바라보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언제까지 죽은 척하고 있을 거야?"
말과 함께 백아린이 대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대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흙먼지들이 순식간에 밀려 나갔다.
그리고 밀려 나가는 흙먼지들 사이에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도지, 바로 그였다.
왕도지는 도를 땅에 박아 넣은 채로 서 있었는데, 누가 봐도 알 정도로 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잔마폭멸류에 휩쓸렸음에도 불구하고 왕도지가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내린 찰나의 판단 덕분이었다.
그는 백아린이 쏟아 낸 검은 기운을 없애고 달려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기 무섭게 도강을 모두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그 대가는 참혹했지만, 목숨을 건지는 건 성공할 수 있었다.
십천야의 일원 왕도지.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그였기에 그나마 이 정도의 부상으로 끝내는 것이 가능했다.
입에서 연신 피를 쏟아 내던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분명 검기였어! 검기였다고! 그런데…… 충돌하는 그 순간 검기가 아니었어. 대체 뭐지?"
악에 받친 듯 왕도지가 소리쳤다.
분명 검기의 형상이었고, 기의 흐름도 그러했다. 그런데 충돌하는 그 순간 느껴진 감각은 강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백아린이 펼친 무공이 검기를 기반으로 하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공격일 거라 판단하며 오히려 달려들었던 판단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스스로가 맹수의 입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꼴이었으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소리쳐 대는 왕도지를 향해 백아린은 그저 의미심장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글쎄. 궁금한가 보지?"
답을 듣고 싶냐고 물어 오는 백아린의 모습에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도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지가 궁금해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무인이니까.
무공에 대한 궁금증이 치미는 건 당연했다.
허나…… 가르쳐 줄 이유 따위는 없었다.
백아린이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든 채로 말을 이었다.
"그냥 궁금한 채로 죽어."
성인 장정만 한 크기의 대검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그녀를 보며 왕도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처음부터…… 내 적수가 아니었다.’
잔마폭멸류에 당하면서 보다 쉽게 승부의 추가 넘어가긴 했지만 그게 없었다고 해도 결국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으으으!"
왕도지가 분한 듯 땅에 박은 도를 뽑아 들었다.
이미 온몸이 엉망이었고,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토해 냈는지 정신마저 멍할 정도다.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도를 뽑아 들고 거리를 좁혀 오는 왕도지의 모습에 백아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역시 생포는 의미가 없을 것 같네.’
이 정도의 무인이라면 어떠한 고문을 한다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십천야의 일원이라는 걸 눈치채면서부터 그 같은 방법으로 정보를 얻는 건 불가능할 거라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검을 든 백아린이 짧게 말했다.
"오라고."
그런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걸까?
우웅!
왕도지의 손에 들린 도에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력을 끌어올린 왕도지가 멀쩡할 순 없었다.
"쿨럭."
피를 토해 내는 그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내상까지 입은 상황에서 억지로 내력을 끌어모으고 있으니 그 속이 뒤집히는 건 당연했다.
거리를 좁혀 오는 그를 향해 백아린 또한 성큼 다가섰다.
그 순간 왕도지가 도기에 휩싸인 도를 휘두르며 날아올랐다.
번쩍!
날아드는 왕도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백아린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
스스슥!
대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그녀가 재빠르게 왕도지와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몸이 빠르게 겹쳐졌다가 이내 서로가 있던 반대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왕도지의 손에 들린 도가 균열을 일으키며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왕도지의 가슴에 긴 검상이 드러나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쿠웅.
버티지 못한 그의 신체가 곧바로 뒤로 쓰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백아린은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옆구리 부분을 어루만졌다.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은 했는데, 예상대로 옷이 찢겨 나가 있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손바닥에는 소량의 피가 묻어 나왔다.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감싸 쥐고 있던 그녀가 슬쩍 몸을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미 숨을 거둔 왕도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일격은 쾌나 날카로웠다.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자그마한 상처를 남길 정도로. 일방적으로 패하긴 했지만 그만큼 왕도지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백아린 그녀가 너무 강했을 뿐.
백아린은 천천히 시신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숨을 거둔 왕도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을 상대라는 걸 알기에 곧바로 목숨을 거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시체가 있으니까.
적어도 이자의 얼굴을 아는 자를 찾다 보면 뭔가 추가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왕도지를 바라보던 백아린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창고였다.
백아린은 구멍 난 벽을 통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는 여유가 없어 제대로 살펴보기 어려웠던 내부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이내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가루들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이 가루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십천야의 일원이 어떻게든 흔적을 지우려 하던 물건이다.
그것이 무엇일지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련된 흑주염의 가루.
백아린이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때 왕도지와의 싸움을 피해 잠시 소매 바깥으로 나와 있었던 치치가 그녀의 옷자락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섰다.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선 치치와 시선을 맞춘 백아린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찾은 거 같지?"
"끽끽."
백아린의 질문에 치치는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