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입성 ― 바라던 바야 (1)
마교의 소교주인 악준기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끝났다. 허나 그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마교가 이미 천무진이 쫓는 십천야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상태에서 소교주가 자신의 세력을 끌어모아 버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악준기는 교주이자 아버지인 악자헌을 죽이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마 그로서도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자아를 잃어버리고 조종을 당하는 아버지를 보며 차라리 편안하게 보내 주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나을 거라 생각하게 된 게 분명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분노하면서 내뱉은 말.
그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민했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허나 천무진은 악준기와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의선과 마의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흑주염의 해독약과 관련이 있었다. 혹시라도 해독약이 완성된다면 악자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만들어 내는 해독약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것이 오랜 시간 중독되어 온 악자헌을 제 상태로 돌리는 게 가능한지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어떤 결과물이 나온 것은 아니기에 우선은 악준기에게 이 같은 일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에 해독약을 만들 수도 없는 상황.
같은 적을 둔 건 사실이고 힘을 합쳐야 할 때라는 건 알지만 그 한 번의 만남만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꺼낼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가 이 해독약을 만드는 건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할 사안, 아는 이가 많을수록 실패할 확률 또한 커질 수 있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우선적으로 연합을 한 채 사건을 조사하고, 그에 맞춰 흑주염의 해독약을 연구하다가 어느 정도 진척이 되면 그때 이것에 대한 가능성을 악준기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악준기와의 만남이 끝나고 돌아온 거처.
천무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런 그의 곁을 백아린이 지키고 있었다.
악준기와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 그것들이 두 사람의 머리를 꽤나 바쁘게 만들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아린이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꽤나 충격이네요."
"뭐가?"
"귀문곡(鬼問谷)이 십천야와 관련되었을 거라는 말이요."
무림을 대표하는 네 개의 정보 단체 중 하나.
그들이 십천야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악준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마교와 사파의 정보를 주로 담당하는 귀문곡이었기에 당연히 악준기도 그들에게 많은 의뢰를 넣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악자헌의 거처를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조차 감춘 것이 바로 귀문곡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악준기는 이미 진작에 귀문곡이 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악준기를 통해 얻게 된 귀문곡에 대한 정보.
그것은 무척이나 큰 정보였다.
실제로 귀문곡은 현재 십천야 중 하나인 상무기가 곡주로 활동하고 있지 않던가.
백아린이 물었다.
"전부 먹혔을까요?"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아마 상당 부분 십천야의 손에 들어갔을 테지. 이처럼 완벽하게 소교주에게 들어갈 정보를 차단했던 걸 보면 아마도 거의 넘어갔다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귀문곡까지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는데…… 캐면 캘수록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들이네요."
허나 귀문곡 정도로는 이제 놀라기도 민망했다.
마교를 반쯤 손에 넣은 것에 비한다면야 귀문곡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여태까지 십천야에 대해 가늠해 왔던 모든 것들.
허나 오늘 악준기를 만나 대화를 하며 그 모든 것들을 수정해야만 했다. 십천야가 지닌 힘,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컸으니까.
백아린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소교주가 어느 정도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이 컸어요. 만약 그가 무너졌다면 일이 더 어려워졌을 테니까요."
그나마 지금은 악준기의 존재로 인해 마교를 완전히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 그렇지만 천무진은 알고 있었다.
결국 때가 된다면 십천야는 그를 제거할 거라는 걸.
저번 삶에서 자신을 이용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무진이 말했다.
"해독약을 만드는 것에 힘을 더 쏟아야겠어.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 같군."
"의선 어르신에게 다시 한번 말씀은 드릴게요."
말은 그리하고 있었지만 천무진이나 백아린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흑주염의 해독약을 만드는 게 재촉을 한다 해서 빠르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백아린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귀문곡을 그대로 두진 않을 거잖아요."
"물론이지. 귀문곡뿐만이 아니라 악준기에게 들은 그 모두를 뒤집을 생각이야."
악준기에게서 전해 들은 십천야와 연관이 있는 자들은 귀문곡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 외의 자들은 의심 정도의 단계이긴 했지만 적화신루를 통해 보다 깊게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십천야와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그때는 무력을 쓸 계획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백아린. 아무래도 전면전으로 나서야 할 것 같은데."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군요."
백아린은 천무진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숨어서 움직이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아예 대놓고 마교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천룡성의 무인으로 마교에 들어간다.
물론 그만한 후폭풍 또한 불어닥칠 것이다. 마교 내부에 있는 십천야와 관련된 세력에게 표적이 되는 것 또한 감수해야 한다.
허나 천무진이나 백아린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십천야라면 자신들이 마교 인근에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거라는 것 정도는.
천무진은 자신의 생각을 백아린에게 전했다.
"오히려 숨어 있으면 표적이 될 공산도 커. 차라리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면 마교에 심어져 있는 십천야 쪽 놈들이 움직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
"동감이에요. 그리고 마교에 박혀 있는 그들을 건드리려면 외부에서 두드리는 것보다는 내부에서 직접 치는 게 더 타격도 있을 거고요."
천무진이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씩 웃었다.
"자신들의 소굴에 직접 들어와서 헤집고 다니면 꽤나 속이 쓰릴 텐데 말이야."
상대방을 괴롭힐 생각을 웃으며 말하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 은근 성격 안 좋은 거."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무진은 창가 근처에 가서 걸터앉았다. 늦은 밤이지만 곳곳에서 밝은 불빛이 보인다.
밤늦게까지 해독약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의선과 마의 때문이리라.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며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교에 들어가게 되면 교주를 한번 만나 보고 싶어."
"마교 교주를요?"
"응, 들어서 알잖아. 지금 마교 교주의 상태가 어떤지."
현재 그는 완전히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저번 생에서의 천무진 자신과 똑같았다. 그랬기에 보고 싶었다.
"십천야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교주가 어떠한 모습인지 보고 싶어. 그 모습을 보면…… 내가 어땠을지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드문드문 나는 기억들.
그랬기에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를.
그 기억이 천무진에게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는 백아린이다. 무척이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이라 했다. 천무진은 지금 그러했던 기억의 일부를 직접 눈으로 보고자 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진의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백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괜스레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어디 한 번 마교를 뒤집어 볼까요?"
그녀의 씩씩한 목소리를 들은 천무진이 슬쩍 백아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내 씩 웃으며 답했다.
"……바라던 바야."
* * *
곧장 소교주인 악준기에게 자신이 직접 정체를 드러내고 마교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튿날.
마교의 외성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다소 떨어진 관도에 한 명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에 전체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허나 그의 정체를 아는 자라면 그 누구도 이 사내를 만만히 보지 못할 게다.
수라검마(修羅劍魔) 파융.
사람 좋아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싸움을 시작하면 아수라처럼 적을 베어 넘긴다 해서 붙게 된 별호다.
파융은 악준기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마극파천대(魔極破天隊)라는 세력을 이끄는 대주이기도 했다.
마교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인 파융은 나무에 기댄 채로 다소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낮에 갑작스럽게 악준기의 호출을 받았다.
그렇게 찾아간 소교주의 거처.
그런데 소교주는 마교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맞으라는 임무만 주고 그를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다.
상대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악준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중요한 손님이라고만 말했을 뿐.
원한다면 만나서 직접 물으라는 말과 함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악준기다.
그렇게 얼결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파융은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극파천대의 대주인 자신이 손님이나 맞기 위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기에 나보고 나가란 거지?’
소교주의 명을 듣자마자 파융은 수하들 몇 명을 보내겠다고 답했다. 허나 악준기는 고개를 저으며 반드시 직접 나가서 극진히 모셔 오라는 뜻을 재차 전했다.
결국 파융은 악준기의 명대로 직접 나와서 이렇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한 듯 길게 하품을 하던 그때.
파융의 시선에 멀리에서 걸어오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으로 구성된 조합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던 파융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중요한 손님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다가오는 이들이 무척이나 젊어 보였다.
‘저들이 아닌가?’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그 네 명으로 구성된 이들이 파융의 근처에 다다랐다. 거리가 좁혀지자 파융은 더욱 자세히 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시선이 가는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넷 모두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시나 시선을 부여잡는 건 여인의 등 뒤에 걸려 있는 대검이었다.
수라검마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인인 파융으로서는 그 대검을 보며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쯧, 저걸 진짜 사용하는 건가?’
허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나 커서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융의 관점에서 검이란 날렵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크기의 검을 휘두를 정도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대검을 짊어진 것이 네 명의 인원들 중 유일한 여인이라니…….
막 대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그 찰나 갑자기 걷고 있던 그 네 명이 멈추어 섰다.
그들은 바로 오늘 마교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로 결정을 내린 천무진 일행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그제야 파융은 정신을 차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융이 그 넷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물어 오는 그의 말을 자르며 백아린이 질문을 던졌다.
"소교주님이 보내신 사람인가요?"
"아, 맞습니다. 그럼 네 분이 오늘 오신다는 그 귀한 손님이시군요."
이 네 명이 악준기가 모시고 오라고 한 이들이라는 걸 확인한 파융은 이내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누구지? 행색을 보아하니 귀한 무가의 자제 같기도 한데 그런 이들을 소교주님이 직접 나까지 시켜서 모시고 오라 할 리는 없을 테고.’
하나씩 얼굴을 확인하던 파융.
그러던 그의 시선이 이내 한 명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섰다. 슬쩍 낯이 익어 보이는 얼굴, 바로 단엽이었다.
단엽을 확인한 파융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한동안 안 쓰던 머리를 힘껏 굴리던 그가 번쩍하고 눈을 치켜떴다. 미간에 가득했던 주름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생각난 하나의 이름.
‘대홍련 부련주 단엽!’
오래전에 스치듯 본 것이 전부라 바로 기억해 내지는 못했지만 사내답지 않게 곱상한 얼굴과, 볼에 있는 흉터를 보고 단엽을 떠올릴 수 있었다.
파융이 서둘러 단엽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이런, 너무 늦게 알아봤습니다. 오늘의 손님이시란 분이 대홍련의 부련주셨군요."
상대가 대홍련의 부련주 정도라면 소교주인 악준기가 신경을 쓰는 것도 이해가 갔고, 자신에게 기다리고 있다 모셔 오라고 한 것도 납득이 됐다.
허나 포권을 취하는 파융을 향해 단엽이 시큰둥하니 답했다.
"어이, 완전히 잘못 짚었는데. 그쪽이 인사할 대상은 내가 아니야."
그런 그의 말에 파융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대홍련의 부련주님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어 오는 그를 향해 단엽이 답했다.
"천룡성이라고 들어는 봤지?"
말이 나오는 순간 파융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무림에 몸담은 무인으로서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 천룡성이 언급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설마……."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파융을 향해 단엽이 옆에 있는 천무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이쪽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