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입성 ― 바라던 바야 (2)
천룡성의 무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난 직후 천무진은 파융을 통해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마교에 입성할 수 있었다.
파융은 앞장서서 내성까지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줬다.
그렇게 들어오게 된 마교의 내성.
웅성거리는 주변의 광경을 스윽 둘러보며 한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마교는 하나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커다란 외성, 그리고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성벽이 존재한다. 그곳을 통과해야만 드러나는 내성까지.
외성과 내성을 가르는 벽 하나를 넘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 같았던 외성에 비해 내성에 들어서서 보게 되는 이들은 대부분이 무인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마교의 내성, 실력 좋은 무인들이 즐비했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한천에게 다가온 단엽이 그를 툭툭 치며 말했다.
"촌스럽게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살다 살다 내가 언제 여길 또 와 보겠냐?"
말과 함께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는 한천을 보며 단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참다못한 단엽이 그의 옷소매를 끌며 말했다.
"우리 두고 그냥 가잖아. 빨리 오라고."
결국 그렇게 한천은 단엽에게 끌려가다시피 앞장서서 걸어가는 일행의 뒤를 쫓아야만 했다.
그렇게 파융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
귀림원(貴林院).
그곳은 다름 아닌 마교를 찾는 귀빈들이나 모시는 장소였다.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절대 배정받을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귀림원이었다.
파융은 천무진 일행을 망설임 없이 귀림원으로 안내한 것이다.
그렇게 들어서게 된 귀림원은 귀한 손님들만 모신다는 명성답게 무척이나 잘 꾸며진 장소였다.
입구에서부터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길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곳곳에 편안히 쉴 만한 장소들이 준비된 모습이었다.
커다란 연못과, 그 위에 자리한 정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해도 충분할 정도로 넉넉한 크기였다.
거기에 곳곳에 장식하듯 심어진 나무들은 쉬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조차도 값비싸 보이는 장소.
귀림원으로 천무진 일행을 데리고 온 파융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에서 지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 그럼 소교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해서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여기를 담당하는 이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파융은 빠르게 사라졌다.
단엽은 보이는 곳 한쪽에 자신의 짐을 휙 던져 놓으며 근처 의자에 걸터앉았다.
자리에 앉은 단엽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크네."
중얼거리던 단엽의 시선이 이내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단엽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이, 주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무진은 물론이고, 그 옆에 있던 백아린까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단엽이 물었다.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야?"
마교 내부로 들어가 적들에게 치명타를 가할 거라는 이야기 정도는 전해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질문에 답한 건 백아린이었다.
"우선 의심스러운 곳들은 조사에 들어갔으니 조만간 하나씩 결과가 나올 거야. 그걸 기반으로 건드려 볼 생각이고. 거의 확실해 보이는 곳은…… 곧 뒤집어야지."
혹시나 말이 새어 나갈까 봐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거의 확실해 보이는 곳이 정보 단체인 귀문곡이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단엽이 물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 당장은 뭘 하면 되는데?"
"뭘 하긴."
백아린이 슬쩍 옆에 있는 천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무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우리가 온 걸 빠르게 알려야지. 마교의 아이들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끄럽게 말이야."
"시끄럽게라……."
중얼거리던 단엽이 히죽 웃었다.
그는 옆에 있는 한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끄럽게 만드는 건 자신 있지. 사고 치는 건 우리 전문이잖아. 안 그래 한천?"
물어 오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왜 맨날 나쁜 건 나랑 엮으려는 거야."
* * *
적화신루의 지부에 한 명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육총관 어교연이었다.
백아린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곧 비게 될 적화신루 삼총관의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요즘 따라 더더욱이나 기분이 좋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점점 두각을 드러내는 백아린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적화신루의 총관으로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그녀다.
그랬기에 최근 백아린이 벌인 수많은 일에 대해 전해 들은 건 물론이고 그로 인해 적화신루 내에서 계속해 거론되는 그녀의 이름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더군다나 백아린을 견제하기 위해 그녀의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는 어교연이 아니던가.
그랬기에 지금 백아린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나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 이틀씩 지나고 있는 지금, 어교연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에 대한 정보가 잔뜩 적힌 자료를 확인하던 어교연은 짜증스레 그 종이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망할! 백아린, 백아린! 시끄러워 죽겠네, 정말.’
어교연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백아린이라는 존재가 점점 이렇게 부각되는 것은 전부 천룡성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라고.
그러자 자연스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교연이 직접 사천성으로 가 천무진을 만났던 그 일 말이다.
그때 그녀는 천무진에게 자신과 함께하자고 청했다. 백아린보다 자신이 훨씬 나을 거라 장담하며 말이다. 허나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
명백한 거절.
그는 자신이 내민 조건을 듣지조차 않았다.
천룡성 무인인 천무진은 확신했었다. 어교연 자신보다 백아린이 더 뛰어날 거라고. 아무런 것도 보여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 더 불쾌했었다.
그날 일을 떠올리며 어교연은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그때 천룡성 무인을 내 손에 넣었어야 했는데…….’
천무진만 자신의 관리 하에 넣을 수 있었다면 지금 백아린이 해내고 있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활약이 되었을 거라 확신하는 어교연으로서는 그날 일이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퉁퉁.
어떻게든 백아린을 밀어내기로 결정을 내린 지 오래였지만, 지금에 오자 더는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이대로 조금 더 날뛰게 뒀다가는 자신과 백아린 사이에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되든 좋다.
백아린을 적화신루의 요직에서 밀려나게 만들어도 되고, 아예 쫓아낼 수 있다면 더더욱 좋았다.
허나 이내 어교연은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백아린의 직위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적화신루 루주의 확고한 믿음.
그리고 천룡성이라는 든든한 배경까지.
그 두 가지가 있는 이상 정말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그녀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백아린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명을 씌우거나 그게 불가능하면…… 죽여야지.’
자신의 앞길을 계속해서 막는 백아린이다.
백아린이 그 자리에서 계속 자신을 막는다면 결국 어교연은 지금 이 자리에서 머물러야만 한다. 허나 그건 어교연이 바라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욕심이 있었다.
그걸 방해하는 자라면…… 죽어도 상관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총관님, 경패입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교연의 부총관 경패였다.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가 짧게 답했다.
"들어와."
승낙이 떨어지자 바깥에서 경패가 걸어 들어왔다.
어교연이 그런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명령하신 정보가 들어와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정보? 어떤 거?"
"사총관과 관련된 정보 말입니다."
시큰둥하던 어교연의 표정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돌변했다. 그녀는 거의 빼앗듯이 경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종이 안에는 최근 백아린의 움직임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이런 것들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어교연이 적화신루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백아린을 쫓지 않는다 해도 의뢰가 들어가는 지역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는 소리다.
백아린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적화신루에 넣는 의뢰들.
그 의뢰의 내용까지 자세히 알아보는 건 어려웠지만, 최소한 그것이 어느 지역에서 들어간 의뢰인지 확인하는 건 총관인 어교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종이 안의 내용을 살핀 그녀는 최근 백아린의 의뢰가 집중된 지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동성? 지금 광동성에 있는 건가?"
백아린이 최근 넣은 의뢰들이 모두 광동성이라는 지역의 거점을 통해 들어왔다. 그 말은 곧 백아린이 광동성에 있다는 소리였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섬서성에 있다는 정보를 받았는데 어느새 광동성이라니.
정말 중원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어교연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일까?
광동성이라니? 그곳은 그리 활동할 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워낙 독보적인 세력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니 여타의 문파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교연이 중얼거렸다.
"광동성이라면 마교 때문에 뭔가를 하기에는……."
막 중얼거리던 어교연이 움찔했다.
대체 마교가 있는 곳에서 뭘 하려는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거기서 답이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교연이 놀란 듯 소리쳤다.
"……마교!"
그랬다.
바로 마교가 목적지였던 게 분명했다.
지금 백아린은 천룡성의 의뢰를 수행하고 있고, 그들을 등에 업는다면 마교와 얽히는 일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어교연은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대체 마교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아무런 것도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천룡성과 함께 마교에서 뭔가를 벌인다면 그것이 결코 작은 일은 아닐 거라는 걸.
그리고 그로 인해 뭔가를 얻게 된다면…… 그건 모두 백아린의 공이 될 거라는 것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백아린의 위치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 둬선 안 돼.’
어교연은 어쩌면 이번이 백아린을 제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동성, 그리고 마교……."
중얼거리던 어교연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광동성이라면 분명…….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경패! 광동성이 이총관이 담당하는 구역 맞지?"
"아, 예. 맞습니다."
적화신루 이총관 황균.
백아린을 견제하기 위해 어교연이 끌어들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담당하고 있는 구역이 바로 광동성이었다.
어교연은 곧바로 말했다.
"황 총관에게 연락 넣어. 내가 곧바로 찾아뵙겠다고."
"곧바로 말입니까?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지금 그깟 일이 문제야? 여기 일은 대충 아래 애들한테 맡기면 되잖아! 빨리 연락 넣으러 안 가?"
소리를 내지르는 어교연의 모습에 경패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내 어교연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와락 구겼다.
타악!
탁자가 울릴 정도로 손에 쥔 서찰을 강하게 내려놓은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백아린 그러게 언제나 은연중에 경고했잖아."
천천히 허리를 편 어교연은 꾸깃꾸깃 구겨진 서찰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저 구겨진 서찰이 마치 백아린의 미래처럼 여겨졌다.
웃는 얼굴로 어교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무 나대지 말라고. 그러다…… 죽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