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연합 ― 그리하시지요 (1)
천룡성 무인 천무진의 등장.
그 한 명의 등장은 마교를 발칵 뒤집어 버리기 충분했다.
천룡성 무인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사실 이미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과 뭔가를 도모하는 듯해 보였던 그가 갑자기 마교에 나타난 것이다.
그저 한 사람의 방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마교의 최고위층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마교 내성의 중앙 지역에 위치한 집마전(集魔殿)은 어느새 최고위층 무인들로 인해 바글거리고 있었다.
천하를 좌지우지할 만한 무인들의 집합, 이 모습이 천룡성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집마전 내부는 갑자기 나타난 천무진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대체 천룡성의 무인이 왜 본교를 찾아왔단 말이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혹 본교에 뭔가 피해가 가는 건 아닐지……."
"뭐 내심 켕기는 거라도 있으신 모양이오?"
"허어, 지금 뭐라고 한 게요?"
오고 가는 이야기들은 각양각색이었고, 그 안에는 이처럼 고성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자리에 모인 이들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웅성거리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수문 위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교주님 드십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수많은 마교의 고위층이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침묵하는 그 사이로 한 명의 무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카만 흑의를 펄럭이며 나타난 사내에게서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수십만 마교인들의 정점에 선 인물.
마교 교주 악자헌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열려 있던 집마전의 큰 문이 닫혔다.
쿠웅.
오십 대 중반의 나이, 그렇지만 고강한 경지에 오른 무인답게 겉보기는 그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목덜미를 덮을 정도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딱 부러지게 생긴 이목구비와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그리고 건장한 신체에서는 감추기 힘들 정도의 강인함이 흘러내렸다.
집마전에 모습을 드러낸 악자헌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인 무인들 사이를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곧장 상석에 위치한 의자에 몸을 실으며 짧게 입을 열었다.
"다들 앉지."
그 말에 예의를 갖추고 서 있던 무인들이 동시에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그때 악자헌이 입을 열었다.
"승룡방주(乘龍幇主)."
"예, 교주님."
‘승룡방주’라는 말에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육십 대의 노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마교의 세력 중 하나인 승룡방을 이끄는 금산산이라는 인물이었다.
승룡방은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랬기에 악자헌이 그에게 물었다.
"천룡성의 무인이 왔다 들었다. 사실인가."
"넵. 현재 귀림원으로 모신 상황입니다."
"귀림원이라……."
나지막한 중얼거림. 그리고 그 중얼거림 끝에 악자헌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참으로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말을 끝낸 악자헌이 모여 있는 마교의 무인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날카로운 시선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모인 이들이 절로 고개를 숙였다.
악자헌이 말했다.
"천룡성 무인을 귀림원으로 안내한 것이 소교주의 수하라 들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
악자헌의 질문에 많은 이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닫고 있었다. 이미 교주인 그에게서 듣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너무도 대놓고 안내를 했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악자헌이 몰라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바보가 아니라면 모두가 알 만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상황.
악자헌이 목소리를 높였다.
"방금 전까지 그리들 떠들어 대더니 모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되었는가! 내 질문에……!"
그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내지르는 그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 건너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교주님 드십니다!"
고함과 함께 닫혀 있던 집마전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
흘러들어오는 빛과 함께 소교주 악준기가 집마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악준기의 등장에 착석해 있던 마교의 무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악준기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무서울 정도의 기백으로 모두를 내리누르는 악자헌, 그에 비해 악준기는 항상 여유롭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으로 수하들을 대했다.
부자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무척이나 다른 부류였다.
가벼워 보이는 악준기의 모습.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런 그의 모습에 우습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마교에서 어느 정도 잔뼈가 굵은 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자리한 악준기라는 사내의 무서움을.
태평해 보이는 저 미소 속에 감춰진 진짜 마인의 모습을 말이다.
집마전 안으로 들어선 악준기는 곧장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정면으로 걸어가던 그가 멈춘 곳.
그곳은 상석으로 향하는 계단의 바로 앞이었다. 그 자리에 선 악준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위쪽에 위치한 인물과 시선을 마주했다.
마교 교주 악자헌.
그가 차가운 눈동자로 악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악자헌과 시선을 마주하는 악준기의 눈가가 슬며시 꿈틀거렸다.
허나 이내 그는 티 내지 않고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소교주 악준기, 교주님을 뵙습니다."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악준기가 그 상태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악자헌이 곧 입을 열었다.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요."
말과 함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악준기가 환하게 웃었다.
여유 넘치는 악준기의 대답에 양쪽으로 도열해 있던 마교 무인들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일부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고, 나머지는 그런 악자헌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재 마교는 크게 두 개의 패로 나뉘어 있다.
교주 악자헌을 따르는 이들과 소교주 악준기를 지지하는 무리로.
중립을 지키고 있는 이들 또한 제법 됐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두 개의 세력이 있다 봐야 옳았다.
물론 그 두 세력이 크게 다툼을 벌인 건 아니다. 지금은 서로 견제하는 정도일 뿐, 아직 그 정도의 독한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대외적으로 악자헌과 악준기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랬기에 둘 사이가 예전과 다르게 소원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상은 크게 달랐다.
악자헌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악준기는 그를 견제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자신이 존경했고, 사랑했던 아버지 악자헌.
그런 그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악준기는 그래야만 했다.
마교의 소교주였으니까.
정신을 지배당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마교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졌으니 말이다.
악자헌을 올려다보는 악준기는 미소 속에 감춰 이제는 항상 혼자서만 되뇌는 그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아버지…….’
악자헌이 더 이상 자신이 아는 아버지가 아니게 된 걸 알게 된 그날부터 악준기는 그를 언제나 교주님이라 칭했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악준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차가운 눈동자.
저건…… 악준기가 알던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억눌러 왔던 분노가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고, 마교를 뒤에서 조종하려 하는 그들을 모조리 찾아내 도륙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참아야만 했다.
속내를 감추고, 얼마든지 적의 손바닥 위에서 춤춰 주리라.
그 모습이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지언정, 결국 그놈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분노도 참아 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이되, 아버지가 아닌 존재를 마주한 악준기가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십시오.’
무릎을 꿇고 있던 악준기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로 악자헌과 마주했다.
‘곧…… 지금의 허수아비 같은 삶을 끝내 드릴 테니까요.’
악자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악준기다.
그랬기에 확신했다.
만약 악자헌에게 의지가 남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악준기가 악자헌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그의 삶을 매듭짓게 해 주는 것, 그뿐이었다.
악준기를 내려다보던 악자헌의 입이 슬며시 열렸다.
"마침 잘됐구나. 네게 물어보려던 것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물어보지."
"말씀하시지요."
"천룡성 무인을 귀림원으로 안내해 준 것이 네 수하라 들었다. 맞느냐?"
애초부터 감출 생각이 없었기에 악준기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천룡성을 마교로 끌어들이다니…… 무슨 꿍꿍이인 게냐?"
"끌어들이다니요. 오해십니다."
"오해?"
슬쩍 높아지는 악자헌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로 악준기는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마치 모두에게 똑바로 들으라는 듯이 양쪽에 도열해 있는 마교 고위층 인물들을 바라보며 악준기가 말했다.
"네, 천룡성을 불러들인 건 제가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인근에 도착한 상황에서 우연히 연락이 닿았고, 그랬기에 직접 모신 것뿐입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게냐?"
"천룡성이 어떤 문파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만 움직입니다. 제 사사로운 생각으로 천룡성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들 과연 그들이 움직였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천룡성이니까요."
악준기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두를 향해 똑똑히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악자헌에게 설명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사실은 그뿐만이 아닌 이곳 집마전에 모인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악준기의 말에 대다수의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할 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악준기의 말마따나 다른 이들도 아닌 천룡성이다. 그들이라면 결코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것이 설령 마교의 소교주라 할지라도 말이다.
허나 악준기의 말에선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악자헌 또한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네 말대로 천룡성은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지. 허나 그 말을 들어도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세상에 우연이란 것이 있다 믿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하물며 그 우연이란 것이…… 천룡성이라면 더더욱."
그저 우연이라는 말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물고 들어오는 악자헌을 향해 악준기가 기다렸던 것처럼 답했다.
"교주님도 아실 겁니다. 단엽이라고."
"대홍련의 부련주를 이야기하는 게냐?"
"예, 맞습니다.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단엽은 천룡성 무인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악준기의 말에 일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룡성과 대홍련…….
둘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천룡성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거야 대부분이 알 정도로 소문이 난 일이지만 단엽의 경우는 달랐다.
아직까지 그가 천무진과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였다.
물론 화산파에 함께 나타난 이상 결국 소문은 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어차피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악준기는 천무진과 단엽에게 사전에 이야기해 두고 지금 그것을 터트리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이들을 향해 악자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
그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주변을 침묵시킨 악자헌이 짧게 물었다.
"……그래서?"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대홍련의 부련주와 제법 친하다는 걸요. 정확히 말하자면 천룡성이 아닌 그가 제게 연락을 준 겁니다. 자신들이 근처에 오게 되었는데 쉴 자리를 내어 달라고요. 천룡성의 무인이 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전박대를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까?"
말과 함께 악준기는 동조를 원하는 것처럼 주변을 확인했다.
말대로 천룡성 무인이 온 걸 알았는데 모르는 척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천룡성 무인을 제외하고 생각해도 대홍련의 부련주가 직접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 또한 결코 가벼이 여길 상대는 아니었다.
"……."
악준기의 대답에 악자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서 크게 트집 잡을 만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로 악준기가 물었다.
"대답은 된 것 같은데 그럼 제 자리로 가도 되겠습니까?"
물어 오는 악준기의 질문에 악자헌이 침묵하고 있던 그때였다. 악자헌의 머릿속으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리하라고 하시지요, 교주님.』
정체 모를 누군가의 전음에 악자헌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고, 이내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악자헌은 전음이 시키는 대로 답했다.
"……그리하도록."
"예, 그럼."
말을 마친 악준기는 이내 옆으로 움직여 상석 옆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렇게 실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때였다.
마교 무인들이 뒤섞여 있는 집마전의 한쪽.
그곳에 있는 무인 한 명의 시선이 악준기에게 틀어박혀 있었다.
나이는 얼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
인상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워 보였고, 무인보다는 학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깔끔한 이목구비였다.
흑풍진천대(黑風振天隊) 대주 양사창(楊嗣昌)이라는 자였다.
팔짱은 낀 채로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있던 그가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교 소교주 악준기.’
대외적으로는 흑풍진천대의 대주 역할을 맡고 있는 그지만, 실상 그의 진짜 정체는 십천야의 하나였다.
십천야의 일원으로 마교에 오랫동안 뿌리박은 인물.
양사창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악준기를 응시했다. 이내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비틀렸다.
‘뭐, 언젠가 죽일 생각이긴 했다만…… 네 녀석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