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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72화 (171/293)

172화. 연합 ― 그리하시지요 (2)

집마전에서 있었던 회의는 약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끝이 났다. 물론 딱히 어떠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회의는 아니었다.

천룡성 무인인 천무진의 등장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주의해야 할 부분 같은 것들에 대해 떠들어 대긴 했지만, 사실상 크게 의미가 있는 논의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천룡성이 왜 마교에 왔는지조차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알 확률이 있다 여겼던 소교주 악준기 또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회의가 끝이 났고, 참석했던 이들은 제각각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건 채륜(蔡綸)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십 대 후반의 무인인 그는 마교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 중 하나였다. 결정적으로 그가 속한 전왕묵검가(戰王墨劍家)는 마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이었다.

당연히 마교 내에서 채륜이 지니는 발언권은 무척이나 컸고, 그는 많은 이들이 존경하는 무인이기도 했다.

점잖게 생긴 얼굴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에게서는 보통 사람에게서 쉬이 느껴지지 않을 법한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미 늦은 시각,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채륜은 탁자 옆에 위치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곧장 시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와 막 끓인 차가 담긴 찻주전자를 놓고 사라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채륜은 시녀가 가져다준 차를 잔에 따라 조용히 홀짝였다.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결국 침묵하고 있던 그가 허공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천룡성이라……."

중원을 살아가는 이라면 크건 작건 천룡성에 은혜를 입은 상태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건 전왕묵검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천룡성 덕분이었다.

천룡성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채륜의 손가락이 갑자기 꿈틀했다.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동시에 입술은 바짝바짝 말랐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교에서 알아주는 고수 중 하나인 채륜이다.

그런 자신이…… 뒤를 잡혔으니까.

‘대체 언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이미 채륜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뒤편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자가 마음먹고 공격을 한다면 피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팔 하나 정도 내줄 각오는 해야 했다.

완벽하게 뒤를 잡힌 이 상황이 채륜은 쉬이 믿기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마교 내성에 위치한 전왕묵검가의 본거지다. 그런 곳에 외부인이 침입을 하다니.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가주인 자신을 노리고 말이다.

허나 그런 의문은 그리 길어지지 않았다.

같이 방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다. 그런 자라면 이곳을 지키는 무인들의 눈을 속이고 잠입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던 그때였다.

탁.

데구루루르.

수상쩍은 소리에 곧바로 날아오르려던 채륜이었지만 이내 굴러오는 뭔가가 시선 끝에 잡혔고 그 순간 발끝에 주었던 힘을 거뒀다.

소리와 함께 굴러온 건 다름 아닌 하나의 구슬이었다.

허나 그건 평범한 구슬은 아니었다.

그 구슬에서 무엇보다 눈을 끄는 건 바로 그 안에 박혀 있는 하나의 글자였다.

천(天).

그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채륜은 알 수 있었다.

‘천루옥?’

천룡성과 중원이 맺은 맹약의 증표 천루옥.

바로 그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뒤를 잡고 있는 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굴러오는 비취색 옥구슬을 집어 든 채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편에 위치한 침상 옆에서 한 명의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진이 나타난 것이다.

천루옥을 쥔 채륜이 젊은 천무진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다.

겨우 약관을 넘어선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 그런 자에게 뒤를 잡히고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만큼 천룡성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가 확 하고 와 닿는 기분이었다.

감췄던 모습을 드러낸 천무진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오."

"천룡성의 무인을 뵙습니다."

천무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을 차린 채륜은 곧장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그가 천무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앉으시지요."

"그럼."

천무진은 채륜의 맞은편에 있는 빈 의자에 가서 걸터앉았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은 채륜이 말했다.

"새로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 혹 좋아하시는 차라도……."

"그럴 필요 없소. 괜히 모습을 감추고 채 가주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니까 말이오."

천무진의 말에 채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마교 내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 공식적으로 연락을 취했어도 되는 천무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은밀히 찾아왔다는 건 그런 방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채륜은 아까 전 시녀가 가져다주었던 차를 따라 천무진에게 건넸다.

찻잔을 들어 올린 천무진이 짧게 답했다.

"잘 마시겠소."

말과 함께 천무진은 찻잔에 담긴 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는 그가 찻잔을 내려놓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채륜이 물었다.

"절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어 오는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천룡성에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은 전왕묵검가의 가주인 채륜에게는 가벼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왕묵검가는 천룡성에게 평생을 노력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채륜이 아주 어렸던 과거의 일.

남만에 자리하고 있던 남만독사궁과 마교는 큰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선두에 자리했던 것이 바로 전왕묵검가였다.

힘 차이가 있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의 승기는 마교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점점 불리해지는 형상 속에 일발 역전의 기회를 노리던 남만독사궁은 끔찍한 짓을 벌였다.

선두에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가던 전왕묵검가를 비롯한 주요 부대원들을 흔들기 위해 그들의 가족을 노린 것이다.

마교 내부에 있는 가족들을 직접 노릴 순 없었던 상황에서 그들의 선택은 다름 아닌 독사였다.

남만독사궁이라는 이름처럼, 수없이 많은 독사들을 다뤄 온 그들이다. 그들은 마교 내에 숨어 있는 간자들을 통해 독사를 내부로 들어오게 만들었고 그 작전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이후 표적이 된 몇 곳에 남만독사궁이 자랑하는 맹독을 지닌 갖가지 뱀들이 풀렸다.

그리고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큰 목표는 전왕묵검가였다.

늦은 밤, 모두가 잠에 빠졌을 시간에 파고든 독사들은 단번에 전왕묵검가를 발칵 뒤집어엎었다.

일부의 무인들도 있긴 했지만 어린아이나 여인들이 대다수였던 상황.

생각지도 못한 독에 많은 이들의 숨이 넘어가려던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천룡성이었다.

천룡성의 무인은 준비해 온 해독약을 통해 전왕묵검가의 많은 이들을 살려 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 낸 직후 천룡성 무인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시 천룡성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전왕묵검가는 대를 이을 자식들과, 아내를 비롯한 남은 가족들 모두를 잃었을 상황이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전왕묵검가라는 가문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게 되었을 게다.

그 최악의 상황을 막아 준 것이 바로 천룡성이다.

가문을 지켜 줬고, 가족들의 목숨까지 구해 줬다.

그리고 독사에 당해 죽을 뻔했던 이들 중에는 채륜 본인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또한 있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어찌 천무진의 말을 가벼이 흘려들을 수 있겠는가.

절로 진지해진 얼굴을 한 채륜이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어려운 부탁이 될 수도 있소. 허나 듣는 그 순간부터는 가주가 싫다 해도 무를 수 없는 일이 될 거요. 그래도…… 듣겠소?"

망설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채륜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답했다.

"듣겠습니다. 천룡성에서 오신 분의 말이니까요."

흔들림 없이 답하는 채륜을 바라보며 천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들었던 대로군.’

악준기는 말했다.

채륜은 약속을 중히 여기고, 은혜나 원한을 결코 잊지 않는 인물이라고. 그랬기에 천무진은 마교에서 자신을 도와줄 몇 개의 세력 중에 채륜과 전왕묵검가를 택했다.

물론 전왕묵검가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십 할 믿는 건 아니다.

십천야의 힘이 어디까지 뻗쳐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나마 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을 법한 이들을 꼽는다면 개중 하나가 바로 이들 전왕묵검가였다.

그리고 그건 오랜 시간 마교에서 십천야의 그림자를 쫓고 있던 악준기가 보장했다.

중립의 위치에서 교주도, 소교주의 손도 들어 주지 않고 있는 그들이다. 마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커다란 가문인 전왕묵검가.

그런 그들의 힘이 함께해 준다는 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가주와 전왕묵검가는 나를 위해 움직여 줘야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에 하명하실 일은……?"

"하나 있소."

천무진이 정면에 자리한 채륜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교주의 아래로 들어가시오."

* * *

객잔은 시끌벅적했다.

시간이 늦은 탓에 술을 마시는 손님으로 가득한 마교 외성의 객잔은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객잔의 위층 난간 부근에 세 명의 인물이 자리했다.

바로 백아린과 단엽, 한천 세 사람이 그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죽립을 눌러써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중이었다.

"한 병 더!"

빈 술병을 들어 올리며 신이 나서 소리치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눈을 흘겼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여기 지금 술 마시러들 왔어?"

"하하, 겸사겸사 술도 먹고 좋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술을 주문한 걸 취소시키는 건 아닐지 눈치를 살피던 한천은 백아린에게서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리고 그런 그와 맞은편에 있는 단엽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매일 이런 일만 시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그럼, 그럼."

막 날아든 술병을 쥔 채로 한천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신이 나서 술을 마시는 사이에도 백아린은 아래쪽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위치한 한 명의 인물.

커다란 덩치에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이 무척이나 사납게 생긴 외향을 더욱 강조하는 자였다.

백아린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짧게 시선을 던지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때 한천이 백아린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대장도 한잔하시죠."

"난……."

됐다는 말을 하려던 백아린은 어서 먹으라는 듯 잔을 꺾는 시늉을 해 보이는 한천의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내 채워진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꽤나 독한 술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삼킨 그녀는 이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게 어디가 좋다고 그리 마시나 모르겠네."

"에이, 그런 분이 일전에 단둘이서 그렇게 술을……."

좀 된 일이긴 하지만 천무진과 단둘이 술을 마신 이야기를 끄집어내던 한천은 자신을 향한 백아린의 시선에 서둘러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던 단엽은 놀란 듯 물었다.

"뭐야? 주인하고 너하고 단둘이서 술도 마셨다고?"

"그, 그게 왜?"

백아린이 뭔가 어색한 듯 대답을 내뱉는 그때였다.

단엽이 중얼거렸다.

"와, 충격이네."

그 중얼거림에 백아린의 얼굴이 더욱 당혹감으로 물들어 갔고, 한천은 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자신이 대놓고 캐물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단엽이 나서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단엽이 탁자에 몸을 바짝 기댔고, 입을 여는 그를 향해 한천이 눈을 빛내고 있는 그때였다.

단엽이 말했다.

"치사하게 나 빼고 둘이서만 술을 먹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한천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아, 이야기가 어떻게 그쪽으로 흐르나 몰라. 이쪽도 심각하구만."

어처구니없어하는 한천과는 달리 잠시 당황했던 백아린은 빠르게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짧게 답했다.

"너도 부총관이랑 자주 둘이만 먹잖아."

"아, 그런가?"

"야, 수긍이 너무……."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물고 들어가려던 한천이었지만 아쉽게도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콱.

탁자 아래에서 백아린의 발이 그의 발등을 꾸욱 눌렀으니까.

온몸을 배배 꼬며 고통을 참는 한천을 향해 백아린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부총관, 술이나 먹지?"

"그, 그러죠."

대답을 듣고서야 백아린은 한천의 발등을 밟고 있던 발을 슬며시 떼 줬다. 한천이 뭔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막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그 찰나.

백아린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단엽과 한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 상태에서 백아린은 아래쪽으로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객잔 이 층에서 계속해 감시 중이던 턱수염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몇몇 사내가 함께 움직이며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들 모두가 나간 순간 백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까지 술잔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짧게 말했다.

"뭐해? 빨리들 일어나."

"하, 반도 못 마셨는데."

단엽이 짜증스레 말을 내뱉는 것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쉽다는 듯 한천이 손에 들려 있던 잔이라도 비우려던 찰나 백아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탁.

잔을 낚아챈 그녀가 그것을 탁자 한편으로 밀어 놓고는 웃으며 말했다.

"술은 여기까지."

"끄응."

방금 전까지 은근슬쩍 백아린을 놀려 대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한천은 무겁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세 사람은 곧장 객잔 아래로 걸어 내려가 입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금 전 객잔을 빠져나간 일련의 무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확인한 백아린은 머리에 쓰고 있던 죽립의 앞부분을 잡아당겨 더더욱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만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말했다.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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