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밀려오는 위기 ― 찾아야 한다 (2)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겨우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거늘 그동안 상무기는 십 년은 늙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날아드는 의뢰인들의 격한 반발에 뒷수습을 하는 데에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허나 아무리 뒷수습을 하려고 한다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결국 그 모든 피해는 오롯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런 지금 상무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추가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피해를 막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그를 위해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고, 여러 가지 정보들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덕분에 상무기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예상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은 사라진 장달 혼자서 벌이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의뢰서와 정보를 가지고 다른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또한 그와 함께 움직이는 대상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꽤나 많은 양의 정보들을 처리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한 명이 아닌 하나의 세력으로 봐야 옳을 게다.
게다가 함께 움직이는 그 세력은 생각보다 정보를 다루는 것이 능숙해 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누굴까?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정보를 빼돌려서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놈들 말이다.
상무기는 슬쩍 자신의 탁자 위에 자리하고 있는 서찰들을 바라봤다.
꽤나 큰 탁자였지만 그 위를 가득 덮을 정도로 많은 양의 서찰들. 그걸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다름 아닌 귀문곡에 의뢰를 한 이들의 항의 서신들이었다.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당연히 자신들에게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귀문곡의 거점을 통해 해명을 요구하는 서신을 남겼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할지에 대한 다그침까지.
허나 지금으로선 이 서신에 대한 제대로 된 답신이 어려웠다.
그저 막연하게 곧 해결될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형식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방에 자리한 채로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는 그때였다.
"어이, 상무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했던 상무기는 이내 입구에 선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풍진천대를 이끄는 대주이자, 마교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 십천야의 일원인 양사창이었다.
상무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알면서 묻는 거냐?"
"어르신이 보내서 온 건가?"
"그럴 리가. 어르신이라면 굳이 나한테 연락을 주지 않고 곧바로 너를 부르셨겠지. 어르신이 나에게 너에 대한 연락을 하셨을 때는 하나야."
말을 마친 양사창은 슬쩍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내 상무기의 맞은편에 앉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죽여야 할 때?"
섬뜩한 말을 양사창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런 그를 상무기가 지그시 노려볼 때였다.
상무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양사창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표정하고는."
"시답지 않은 농담은 됐고 찾아온 용건이 뭔데?"
"뭐긴 뭐겠어. 최근 돌아가는 일 때문에 염려가 돼서 찾아왔지."
"걱정할 필요 없어. 잘 해결하고 있으니까."
"정말이야? 그런데 왜 내 귀에 들어오는 소식들은 그 반대인지 모르겠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양사창의 시선을 피하며 상무기가 둘러댔다.
"완전히 해결되고 나서 모두에게 연락을 돌릴 생각이니까. 하여튼 너도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구나. 겨우 이런 일 때문에 날 찾아오고."
"그러게나 말이다. 덕분에 이틀이 훅 날아가 버렸네."
귀문곡의 거점은 마교에서 대략 이틀 정도 걸릴 만한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었다. 물론 이건 양사창 정도 되는 무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것의 몇 곱절은 되는 시간이 소요될 거리.
이 정도라면 그렇게 멀다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척도 아닌 적당한 거리에 현재 귀문곡의 본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의아했다.
양사창은 마교의 많은 일들을 담당하는 십천야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는 양사창을 향해 상무기가 물었다.
"정말 방금 그 말이나 하려고 찾아온 거야? 다른 건 없고?"
"설마. 내가 얼마나 바쁜데 겨우 너 한번 놀리자고 이곳까지 왔겠어."
"그럴 줄 알았다. 하지 않은 말이 뭔데?"
"정보 단체에 왜 찾아왔겠어. 당연히 의뢰지."
"의뢰를 할 거면 굳이 찾아올 필요는……."
"지금 상황에서 서신이라도 보내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귀문곡의 본거지로 직접 보내면 될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사창은 직접 걸음을 했다.
서신으로 의뢰를 하는 것이 다소 찜찜하기도 했고, 조금이긴 하지만 현재 귀문곡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의중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귀문곡은 십천야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양사창 또한 수많은 부분에서 귀문곡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상태를 알아야 추후 마교의 일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핵심을 찌르는 양사창의 말에 상무기가 침묵하는 사이.
양사창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마교에 천무진이 나타난 거."
"물론이지. 그런데 그게 왜?"
"아무리 봐도 천무진과 소교주 사이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서."
"둘이 손을 잡기라도 한 것 같다 이거야?"
"아무래도. 의심 가는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정확히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아직 감이 안 온다 이 말이지."
"그래서 의뢰할 게 뭐야?"
"소교주의 주변에서 그를 감시할 인원은 내가 더 충원할 생각이야. 넌 천무진이나 소교주가 벌이는 일에 대해 조사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작은 일이라도 놓치지 않고 말이야. 거기서 뭔가 단서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양사창의 말에 상무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지. 우선은 지금 벌어진 일에 내부적으로 인원이 많이 소요되고 있어서, 그걸 끝내는 대로 조금 더 조사를 해 보도록 할게."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말을 끝낸 양사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시간을 내서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양사창은 무척이나 바빴다.
마교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교주의 뒤편에서 조종하는 것이 그가 맡은 바였다.
거기다가 갑자기 나타난 천무진으로 인해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양사창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보자고."
말을 마친 그가 사라지고 다시금 혼자 남게 된 상무기의 표정은 무섭도록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양사창이 남겼던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날……죽인다?’
농담이라며 웃었지만 과연 정말 그렇게 가벼이 치부할 수 있을까?
십천야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지, 실제로 어르신은 결코 이런 걸 두고 보는 이가 아니었다.
농담이라며 내뱉은 그 말이 마치 다음번 실수를 용납지 않겠다는 경고로 들리는 건 왜일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
그는 마음이 불편한 듯 다리를 덜덜 떨며 그렇게 탁자 위에 자리한 수많은 항의 서신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그렇게 약 한 시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무렵.
"곡주님! 찾았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수하의 외마디 고함에 상무기의 표정이 돌변했다.
"찾았다고? 뭘 말이냐?"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이어지는 보고에 상무기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가 다급히 물었다.
"배후가 누구더냐?"
"은형방(隱形幇)입니다."
은형방이라는 말에 상무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은형방은 귀문곡과 마찬가지로 정보 단체의 하나다. 한때는 꽤나 큰 성세를 유지하며 귀문곡과 함께 마교나 사파의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이들이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옛말이었다.
귀문곡이 점점 커지는 사이 은형방은 쇠락을 거듭했다. 그로 인해 약 이십여 년 전부터는 귀문곡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힘이 미약해진 그들이다.
상무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증거는?"
"물론 있습니다. 명하신 대로 돈을 요구하기 위해 보냈던 서찰의 종이를 조사했는데, 그것에서 단서가 나왔습니다. 그 종이를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하원(河源)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인근에……."
"은형방이 있지."
수하의 보고를 자르며 상무기가 말했다.
거기다 증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하가 곧바로 발견한 다른 것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사건이 있기 얼마 전부터 은형방 쪽에서 갑자기 돈을 풀어 이것저것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답니다."
"갑자기?"
"네, 특별히 돈 될 만한 의뢰들이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 갑자기 값비싼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다더군요. 거기다가 서찰이 전해진 곳들 인근에서 은형방의 인물로 보이는 이들을 봤었다는 정보도 들어왔습니다."
종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거기다 은형방은 정보 단체.
이미 소문을 퍼트리는 방식을 보며 뭔가 능수능란하게 움직인다 여기지 않았던가. 그 부분에 있어서도 은형방은 적합했다.
거기다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부터 보인 미심쩍은 행동과, 서찰이 전해진 장소에 그들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면……?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라진 장달이 언제부터인가 은형방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기회를 엿보다가 천룡성이 나타난 지금이 적기라 여기고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귀문곡에게 밀려 많은 걸 잃은 은형방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 귀문곡을 무너뜨리면서 돈도 얻을 수 있는 비책이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상대가 은형방이라는 사실을 알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옴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움켜쥔 상무기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감히 은형방 따위가……."
은형방은 귀문곡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들이 엄청난 위협인 건 사실이었다. 그들이 절대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귀문곡의 의뢰서들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어중간하게 건드렸다가는 도리어 같이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단번에 그들의 숨통을 끊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귀문곡에게 타격을 주고야 말 것이다.
생각의 정리를 끝낸 상무기가 물었다.
"지금 현재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귀살의 인원이 얼마나 되지?"
"바로라면……."
수하는 곧장 계산에 들어갔다.
귀살은 대략 백여 명으로 구성된 살수 집단이다.
그들은 살수들의 실력을 세 개로 나누어 불렀는데, 이급과 일급, 그리고 특급으로 분류했다.
이급 살수는 육십 명, 일급 살수는 삼십 정도였고 특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나머지 열 명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수하가 이내 말했다.
"이급 이십, 일급 열여섯, 특급 다섯 명 정도 가능합니다."
숫자를 듣는 순간 상무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숫자가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가 있는 이들은 제외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숫자가 다소 적었다.
그랬기에 상무기가 물었다.
"왜 이렇게 적어?"
"얼마 전에 의뢰들이 몇 건 동시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쪽에 투입되는 바람에 지금은 이 정도밖에 없습니다."
"끄응, 그랬지 참."
꽤나 큰 의뢰들이 들어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인 수하들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이것이 최선의 병력이었다.
그랬기에 고민이 됐다.
‘사십 명 정도라…… 조금 애매한데.’
은형방 또한 어느 정도 무력을 지니긴 했지만 이 사십 명의 살수라면 그들을 정리하는 건 무리가 없었다. 허나 문제는 은형방이 아니었다.
은형방의 뒤에는 군마련(群魔聯)이라는 이름의 사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심해야 할 정도의 큰 사파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들까지 합세한다면 계산이 조금 복잡해진다.
그리 강한 이들이 아니었기에 군마련이 돕는다 한들 결국 승자는 자신일 것이다.
허나 지금 상황을 보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 한 명이라도 도망쳐 나간다면 추후의 일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야 해.’
완벽한 말살.
그래야만 지금 일어난 이 일을 그나마 수습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나도 움직여야겠군."
"곡주님께서요?"
"그래야지. 이 일을 빠르게 수습하려면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군."
말을 내뱉으며 상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설령 군마련이 뒤에 없었다고 해도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이 들었다. 완벽하게 이 일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으니까.
더는 어르신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는 지금 또 한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상무기가 곧장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방금 말한 귀살 인원 전부 소집해. 그리고 모두에게 전해."
자리에서 일어난 상무기가 탁자 위에 가득한 항의 서신들을 더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손으로 밀쳐 냈다.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서신들을 밟아 선 채로 그가 말을 이었다.
"……은형방이 있는 하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