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은형방 ― 내가 누군지 알겠네 (2)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상무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귀문곡을 곤란하게 만든 이들을 쫓아 제거하기 위해 나타난 이곳.
그런데 그런 곳에 왜 천무진 이자가 있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이놈이 어떻게…….’
현재 상무기는 천무진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도 아니었고, 이곳 은형방과 그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천무진이라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상무기의 머릿속에 순간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내가 함정에 빠진 건가?’
만약 지금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다면?
애초에 은형방에 오게 만든 것이 천무진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허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왜 천무진이 현재까지 아무런 마찰도 없었던 자신을 이곳으로 유인했단 말인가?
적어도 아직까지 자신은 천무진에게 노출된 적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그가 귀문곡을 노린다는 건 뭔가 이상했으니까.
그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누군지 알았을 거 아냐."
재차 들려오는 천무진의 목소리에 상무기는 곤혹스러웠다.
허나 이내 상무기는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천무진이 자신을 노리고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정체를 알기 때문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설령 자신이 십천야일 거라는 가능성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해도…… 그건 그저 가능성일 뿐 아직까지 확신이 될 순 없었다.
천인혼을 알아보고 놀란 부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거야 칠신기에 속한 전설의 무기이니 정보 단체의 수장인 자신이 알아본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굳이 먼저 패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기에 상무기는 시치미를 떼기로 결정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 풀풀 풍겨 대던 살기를 거둔 그가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래 봬도 정보 단체를 이끄는 수장, 어찌 천룡성의 분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정보 단체의 수장이라……."
상무기가 내뱉은 말을 중얼거리던 천무진이 이내 말을 이었다.
"정말 그것뿐이야?"
"그럼 뭐 다른 거라도 있습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 오는 상무기를 바라보던 천무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상무기 또한 막 함께 미소를 지어 보일 때였다.
천무진이 중얼거렸다.
"웃기고 앉았군."
그 한마디에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려던 상무기의 표정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수습한 상무기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마주했고,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왔다면 정말 억울한 건가 생각할 정도의 얼굴이야. 그런데 어쩌지? 난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는데."
"그게 무슨……."
상무기가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때 천무진이 품 안에 준비해 두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 가볍게 휙 던졌다.
촤르륵.
허공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종이 더미들.
상무기는 하늘에 떠 있는 종이 중 한 장을 가볍게 낚아챘다.
그건 다름 아닌 마교에 있는 거점에서 사라진 의뢰서였다.
종이의 정체를 확인한 상무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허나 이내 그런 기색을 감춘 채로 상무기는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왜 천룡성 무인분의 손에……."
"왜겠어. 처음부터 내가 벌인 일이니까. 그쪽에서 사라진 모든 건 전부 내가 가지고 있거든. 덕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고."
천무진의 말에 상무기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정보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걱정했다. 헌데 지금은 그런 문제를 넘어섰다.
정보가 새어 나간 것도 문제거늘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필이면 천무진이라니. 적화신루를 등에 업고 있는 천무진에게 이 모든 의뢰서들이 들어갔으니, 이건 단순히 일차적인 피해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의뢰서들을 기반으로 예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사하며 이 모든 것들의 배후를 캐내려 들 게 분명했다.
상무기가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답했다.
"아무리 천룡성의 무인이라 하셔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저희 단체에게 중요한 물건입니다. 돌려주시지요."
"그렇다면 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거야. 내가 의심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해야 할 테니까."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수많은 조사를 통해 천무진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귀문곡이 십천야와 관련된 것은 확실하고, 그들을 등에 업은 채로 엄청난 성장을 보이고 있다는 걸 말이다.
원래부터 점점 커져 가고는 있었지만 그런 그들의 성장세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건 바로 현재 곡주인 상무기가 취임한 이후의 일이다.
거기다 의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확실한 몇 가지 정황 증거들까지.
천무진이 물었다.
"마교 소교주에게 가야 할 정보들을 감췄던데? 소교주의 의뢰를 조사하며 정보의 일부분만 넘긴 것 같더군."
첫 질문부터 상무기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지금 얻게 된 정보 정도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런 비밀을 알게 된 건 소교주인 악준기가 천무진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천무진이라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놀랐던 상무기가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며 답했다.
"내부에서 자그마한 실수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글쎄요.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 부분은 저도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흑마신이 있던 흑마련과 거래를 해 왔던 건?"
"그거야 저희가 원래 사파 쪽의 정보를 담당하지 않습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양가장은?"
"……예?"
"양가장과도 비밀리에 의뢰를 주고받았잖아. 거기는 사파가 아닐 텐데 말이야."
얼마 전에 양가장을 뒤집은 이후 적화신루를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정보들 중 하나. 그들이 오랜 시간 주기적으로 귀문곡에게 의뢰를 해 왔다는 거다.
물론 그걸 알게 된 당시에는 그 정도로 귀문곡을 의심하진 않았다.
중원을 대표하는 정보 단체들 중 하나고,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이기에 특히나 이용이 편한 이들이니 얼마든지 접점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허나 문제는 드러나는 의심스러운 상황들이 묘하게 귀문곡과 얽혀 있다는 거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연이 반복된다면?
그걸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현재 의심이 가는 다른 몇 가지 일들에도 귀문곡이 관련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소교주의 증언까지.
상무기가 뭐라도 둘러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건……."
"우연이겠지. 그렇지?"
비꼬는 듯한 천무진의 말투에 상무기는 침묵했다.
대화를 하며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의심이 아니다.
천무진은 귀문곡과 십천야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천무진이 이 같은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확신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천무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상무기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십천야, 알지?"
핵심을 찌르는 그 한마디에 움찔했던 상무기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이름은……."
발뺌을 한다고 해서 먹힐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무기는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뭐, 모를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적어도 넌 그럴 수 없어. 다른 이라면 모르고 이용당한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귀문곡을 이끄는 너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 있어 네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건 가능하지 않았을 테니까."
"……."
"자,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사실 내가 생각해 낸 답은 두 가지야. 첫 번째, 네가 귀문곡을 키우고 싶은 욕심에 그들의 충실한 수하 노릇을 하고 있을 가능성. 그리고 두 번째."
말을 마친 천무진이 천인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낮게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네놈 또한 십천야일 가능성."
천인혼을 쥔 천무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만나기 전까지는 반반이었거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 네가…… 십천야라는 걸."
지금이야 온순한 척하고 있지만 천무진의 정체를 이곳 은형방 방주인 서훈인 줄 알았을 때만 해도 상무기는 자신의 힘을 감추지 않았었다.
살기와 함께 풍겨져 나오던 기운.
그걸 직접 느낀 천무진은 보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십천야에 속한 이들을 몇몇 대면한 적이 있다.
그들 모두는 우내이십일성 이상의 실력을 뽐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 단체의 수장일 뿐인 사내.
거기다가 중원에서 뛰어난 무인으로 꼽히지도 않는 자다.
그런 자에게서 최소 우내이십일성을 연상케 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해명할 기회는 충분히 줬는데 말이야. 그런데 아쉽게도 넌 그 어떠한 것에도 대답하지 못했군. 우리 사이에 더 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을 끝낸 천무진의 몸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곧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상무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젠장, 내 정체가 들키다니.’
십천야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귀문곡이다.
그런 귀문곡이 천무진에게 알려져 버렸으니 이 일의 뒷수습을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밀려들었다.
허나 그것에 대해 걱정을 하는 건 추후의 문제였다.
당장엔 눈앞에 있는 천무진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정보 단체인 귀문곡을 이끄는 상무기다. 많은 정보를 접했고, 그랬기에 더 잘 알고 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천무진을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 정도는.
‘지금은…… 물러서야 한다.’
천무진의 함정이 분명한 상황.
그 말은 곧 인근에 또 다른 동료들 또한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대홍련의 부련주 단엽, 그리고 적화신루에 속한 정체불명의 실력자인 백아린과 그녀의 수하 한천 또한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 없다는 소리였다.
천무진 하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까지 개입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떠한 수를 쓴다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
상무기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연무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넓은 집무실.
별다른 건 없었지만 양쪽 벽면에 위치한 책장들과, 곳곳에 자리한 서류 뭉치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무기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기회는 한 번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상무기가 곧바로 움직였다.
타악!
소매를 터는 순간 양쪽 손바닥으로 단검이 빨려 들어왔다. 안쪽에 감춰 둔 단검을 꺼내어 들기 무섭게 상무기의 손이 움직였다.
양쪽으로 뻗어진 손.
손바닥에 쥐어져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양쪽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 두 자루의 단검이 향하는 건…… 벽이었다.
콰콰콰쾅!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이 매달린 단검들이 벽면을 타고 주변에 있던 책장들을 모두 박살 내며 뻗어져 나갔다.
사방으로 부서진 책장의 파편들이 튕겨져 나갔고, 동시에 안에 들어 있던 종이 뭉치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주변이 어지럽혀지는 사이, 상무기는 곧장 손가락에 걸고 있던 장치를 풀었다.
티익!
단검과 연결되어져 있던 끈이 풀리며 그것들이 곧장 천무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시야를 어지럽힌 상황에서 날아든 절묘한 공격.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깜짝 놀랄 정도의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상대는 천무진이었다.
카앙!
천인혼으로 날아드는 두 자루의 단검을 쳐 내는 걸 눈으로 확인한 상무기였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 공격으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지금!’
애초에 단검을 버린 건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다. 재차 흔들리는 소매 속에서 새카만 단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빠르게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단환을 끼어 든 상무기가 씩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흩날리는 종이들 사이에서 천무진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꼈지만 상무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단환만 있다면 도망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상무기는 곧바로 바닥을 향해 힘차게 단환을 내리쳤다.
탁!
동시에 주변을 향해 퍼져 나가는 새하얀 연기.
허나 이건 그냥 연기가 아니었다.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 특별한 연기였다.
그리고 이건 일전에 같은 십천야의 일원인 반조가 주란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새하얀 연기 속에서 상무기가 움직였다.
아주 잠깐 천무진의 감각이 무뎌지는 그 찰나를 놓쳐선 안 됐으니까.
순식간에 옆으로 이동한 상무기가 곧장 바깥으로 날아오르려던 그 찰나!
부웅!
뭔가가 옆에서 날아드는 걸 느낀 상무기가 놀란 듯 몸을 옆으로 비틀었지만, 이미 조금 늦은 후였다.
퍼억!
연기 속에서 날아든 주먹이 상무기의 안면을 후려쳤다.
얼굴에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뒤로 밀려나가며 벽에 처박혔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적중당하며 입 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컥!"
상무기가 주춤하는 사이, 상대가 연기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매를 가볍게 휘저으며 연기를 밀어내는 상대.
입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는 상무기를 향해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됐지만 한 번 본 거에 당할 바보는 아니라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