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수순 ― 그렇게 해 (1)
은형방에서 있었던 싸움.
십천야의 일원인 상무기와의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어졌다.
강기의 격돌 이후 상황이 잠잠해지자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 사람이 천무진이 있는 장소로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의 방향에서 걸어오던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처음부터 이 셋은 각자 위치를 정한 채로 그곳에서 들어오는 귀살의 살수들을 상대했다.
그 숫자가 무려 사십여 명에 달했지만 이 셋에게 그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살수는 은밀하게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이들이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있는 세 사람이 오히려 그들이 올 걸 알고 노리고 있었으니, 더더욱 싸움은 쉽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던 도중 단엽이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원하게 한판 했네."
최대한 소리 없이 은밀하게 귀살의 살수들을 제압한 셋과는 달리 천무진은 우내이십일성 수준의 고수인 상무기와 요란하게 싸움을 벌였다.
굳이 기척을 감추고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더더욱 주변은 엉망이었다.
다가온 단엽이 불만스레 말을 이었다.
"주인, 혼자서만 재미 보기 있어? 나한테는 잔챙이만 맡겨 놓고 말이야."
"얼마 전에 손맛 봤잖아. 그게 얼마나 됐다고."
천무진이 우내이십일성의 하나인 나환위와 싸웠던 일을 언급하자 단엽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천무진의 옆에 도착한 백아린이 아래에 쓰러져 있는 상대를 확인했다.
상무기의 얼굴을 바라보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이자가 소문이 무성한 그 귀문곡주군요."
상무기는 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죽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천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어휴, 살려서 뭔가 좀 캐내야 했는데 벌써 죽었네."
"캐내고 싶은 게 많지만…… 입을 열 놈이 아니니까."
천무진 또한 한천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쉬운 건 천무진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뒤쫓고 있는 십천야의 일원, 당연히 여러 가지 정보를 캐고 싶었다.
허나 그랬기에 잘 알았다.
십천야라는 이들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입을 열 자들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살려 뒀다가는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이었기에 천무진은 욕심을 버렸다.
천무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을 읽어서일까?
백아린이 걱정 말라는 듯 옆에서 말했다.
"이 시체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정보를 구해 올 수 있을 거예요. 조만간 좋은 소식 손에 쥐여 드릴게요."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 다독이는 백아린의 말투에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야 말았다.
그가 말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
한결 표정이 밝아진 천무진의 모습에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진 백아린이 살짝 웃다가 이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다친 덴 없어요?"
천무진이 질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한 상대이니만큼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지만 싸움을 직접 본 건 아니니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였다.
다소 몇 군데가 쑤시긴 했지만…….
"뭐 이 정도면 일정에는 전혀 문제없을 것 같군."
"다행이에요. 누구랑 다르게 큰 부상은 없어서."
말을 내뱉으며 백아린은 슬쩍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단엽을 바라봤다. 지금 그녀는 얼마 전 화산파에서 있었던 단엽과 나환위의 싸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싸움 때문에 며칠을 화산파에서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자꾸 찾아오는 자운 때문에 무척이나 번거로웠던 백아린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가볍게 눈을 흘기는 백아린을 향해 단엽이 펄쩍 뛰며 답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도 멀쩡했거든?"
물론 단엽의 말 또한 맞았다.
우내이십일성인 나환위를 제압한 것치고는 무척이나 경미한 부상을 입었던 그다. 단엽 또한 압도적으로 나환위를 제압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천무진처럼 멀쩡하지는 못했다.
승부욕의 화신인 단엽이 억울하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런 놈보다야 당연히 나환위가 한 수 위 아니었을까? 그치 주인?"
간절한 시선으로 단엽이 천무진을 바라봤다.
허나 그런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닐걸."
"으으!"
단엽이 머리를 부둥켜 쥔 채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직접 겨뤄 보기는커녕, 실력조차 전혀 드러나지 않은 존재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단엽이 툴툴거렸다.
"아이씨, 역시 이 자식을 내가 박살 냈어야 했는데."
단엽이 상무기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가던 그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고, 우선은 뒷정리부터 끝내지."
이곳 은형방에서 꽤나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뒷정리 또한 제법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세 사람이 몸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움직이려던 중이었다.
몇 걸음 나아가던 백아린이 멈칫하더니 이내 천무진을 향해 돌아왔다.
상무기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천무진은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에 도착한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데 지금 괜찮아요?"
"물론이지. 뭔데?"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그럼 이제 귀문곡에 대한 용무는 끝나신 거예요?"
"당장에는 뭐 특별한 건 없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오는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조심스레 속내를 밝혔다.
"귀문곡주가 죽었잖아요. 그럼 당장 그곳엔 마땅한 수장이 없을 거고요. 조만간 다시금 정비를 하긴 하겠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을 적화신루가 흡수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사사로운 욕심으로 비칠까 염려되어 어렵사리 꺼낸 말, 그렇지만 천무진은 오히려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화색을 띠며 백아린이 되물었고,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어차피 그대로 둔다면 또 다시 십천야가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 전에 적화신루가 귀문곡을 손에 넣으면 나야 훨씬 좋지. 그리고…… 원래 그렇게 적화신루 아래로 들어가는 게 귀문곡의 운명이기도 했고."
"운명이요?"
의아하다는 듯 물어 오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답했다.
"저번 생에서 귀문곡은 적화신루 아래로 흡수됐었거든. 뭐 좀 빨라지긴 했지만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었어."
"그래요? 어떻게 귀문곡을 먹었대요?"
궁금한 듯 물어 오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네 루주 덕분이지."
루주 덕분이라는 말에 백아린은 움찔했다.
천무진이 말하는 그 루주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당황한 그녀가 채 말을 잇지 못할 때 천무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적화신루의 루주가 단신으로 귀살을 쓸어버렸거든. 그러고는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귀문곡까지 집어삼켰지. 덕분에 적화신루는 가장 큰 정보 단체가 되었고 말이야."
"……그렇군요."
백아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아린은 문득 운명이란 게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번 일의 주역은 백아린이 아닌 천무진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적화신루의 루주인 그녀가 직접 나서 귀살의 일부를 쓸어버림과 동시에 귀문곡을 집어삼킬 계획을 꺼냈으니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아린의 귓가로 천무진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여덟 명인가."
"네? 그게 무슨……."
"십천야 말이야. 당신이 하나, 내가 하나를 제거했으니 정말 이름대로 열 명이라면 이제는 여덟 명이 남았을 거 아냐."
"아, 그렇겠네요."
천무진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을 조종했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그녀와,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병신 같은 새끼라며 욕설을 내뱉었던 그자까지.
그 둘도 십천야일까?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럴 공산이 컸다.
천무진은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과연 언제 그들을 마주하게 될지 알 순 없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결국 이 길의 끝에 그 두 사람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때 백아린이 말했다.
"아 참, 귀문곡주의 시신은 우선 인근까지만 옮기고 그 이후에는 적화신루 쪽 사람들을 통해 이동시킬 생각이에요. 얼굴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이걸 통해서 추가적인 정보부터 구해 볼 생각이고요."
"그건 당신이 전문이니까 알아서 하면 될 것 같군."
"그럼 믿고 맡겨 주시는 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 드려야겠네요. 귀문곡을 집어삼키는 것도 엄청난 속도로 마무리 짓도록 할게요."
백아린이 씩 웃으며 답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천무진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네 루주가 진짜 속사정을 알면 그리 좋아하진 않을 일이네. 그가 얻었어야 할 업적을 내가 가로채 버린 거니까."
천무진이 기억할 정도로 꽤나 충격적이었던 사건.
그런 큰 업적을 자신이 중간에서 가로챈 격이니, 사실을 안다면 속이 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진 않을 거예요."
백아린은 그런 위명에는 큰 욕심이 없었다. 거기다가 우습게도 얼결에 그 일에 함께했으니, 어찌 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아닐 거라 확신하는 거야?"
"그럼요. 저희 루주님은 속이 꽤나 넓은 분이거든요. 그 사실을 알아도 아무렇지 않으실걸요."
백아린이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녀의 말에 천무진이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다시 조금 궁금해지는군그래. 적화신루의 루주라는 사람이."
천무진은 적화신루의 루주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엔 과거의 삶에서 보여 줬던 엄청난 능력 때문에 어느 정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 사실이나, 백아린과 함께하며 굳이 루주와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신뢰가 생긴 그녀와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 천무진은 적화신루의 루주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마음은 복잡했다.
천무진에게 자신이 적화신루의 루주인 걸 밝히지 않아서였다.
신루에 관련된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감춰 온 비밀이었고,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그건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았다.
헌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천무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천무진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백아린은 적화신루를 위해 계속해서 지금처럼 루주라는 정체를 감추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에도 용이하고, 더욱 빠르게 적화신루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천무진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힌다 해도 그가 주변에 떠들고 다닐 인물이 아니라는 건 옛날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식으로 한 사람씩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결국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랬기에 천무진을 믿으면서도 굳이 적화신루의 루주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지만…….
요즘 따라 점점 자신이 루주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그녀였다.
천무진이 과거에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알기에 더더욱.
그는 사람을 쉽사리 믿지 않는다.
저번 생에서 당했던 안 좋은 일들 때문이다.
헌데 그런 와중에서도 천무진은 백아린에게 조금씩 믿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언제까지 이 일을 감춰야만 할까?
물론 적화신루의 루주라는 사실을 감춘다고 하여 천무진이 손해를 볼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뭔가 부족하게 도움을 주는 건 분명 아니었다.
차이는 그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뿐이다.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점점 그조차도 미안하다고 느껴지는 건 그만큼 천무진이라는 사내와 가까워져서이리라.
그의 아픔을 알고, 꿈꾸는 미래를 안다.
그리고 그가 걷고자 하는 길을 백아린 또한 함께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가만히 천무진을 바라보던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조만간 루주님을 만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천무진을 바라보며 한천이 들으면 놀라 까무러칠 말을 백아린이 천천히 내뱉었다.
"……왠지 루주님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