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수순 ― 그렇게 해 (2)
상무기를 제거한 천무진은 곧바로 세 명의 일행들과 함께 마교로 복귀했다.
며칠 정도 자리를 비웠어야 했던 여정.
그 여정에서 돌아온 천무진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역시나 의선과 마의가 한창 찾고 있는 흑주염의 해독약에 관해서였다.
예상대로 아직까지 해독약에 관해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해독약과는 별개로 진행했던 또 하나의 의뢰.
바로 검산파에서 훔쳐 왔던 보석에 관해서였다.
천무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정체 모를 보석. 그것을 잠시 품 안에 넣고 있었던 것만으로 며칠을 앓았다.
허나 문제는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전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천무진의 내공의 흐름을 막아섰던 그 정체 모를 반응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그 붉은 보석밖에 없었고, 왜 그것이 유독 천무진에게만 그런 효과를 보였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히 일을 끝마친 천무진은 곧이어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이를 위해 마교 내성에 위치한 은밀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었고,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천무진은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마주했다.
천무진을 따르기로 약조를 한 마교의 대표 가문 중 하나.
전왕묵검가의 가주 채륜이었다.
채륜은 미리 와서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과 백아린을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런 제가 늦었군요."
"괜찮소. 우리도 막 도착해서 말이오."
천무진이 짧게 답할 때였다. 어느덧 앞에까지 다가온 채륜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다녀오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뭐, 계획대로 마무리됐소."
"참으로 다행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말을 끝낸 채륜의 시선이 자연스레 천무진의 옆에 있는 백아린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채륜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은……."
"아, 이런 인사가 늦었네요. 적화신루 사총관, 백아린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아린이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정체를 전해 들은 채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의 조력자로 적화신루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던 바.
채륜이 입을 열었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대단한 능력자신가 봅니다. 이렇게 천룡성의 무인께서 일을 믿고 맡기는 걸 보면 말이지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겸손하게 답하는 백아린의 말에 옆에 있던 천무진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같이 일하다 보면 적잖이 놀랄 거요. 아마 지금 가주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이라서 말이오."
"호오, 그래요?"
채륜은 처음보다 더욱 깊어진 시선으로 슬쩍 백아린을 살폈다.
애초에 적화신루에서 천무진을 위해 붙여 준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능력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헌데 다른 이도 아닌 천무진이 직접 이렇게 칭찬을 하다니…….
사실 채륜은 천무진과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번이 고작 세 번째 만남이었으니, 안다고 하면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알았다.
상대는 천룡성의 무인, 그런 그의 칭찬이 결코 가벼운 의미는 아닐 거라는 걸.
놀란 듯 백아린을 바라보는 채륜을 향해 천무진이 질문을 던졌다.
"계획된 일은 어떻게 진행 중이시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결과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채륜은 천무진의 명에 따라 오히려 반대파인 교주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최근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마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인 전왕묵검가는 분명 큰 힘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그런 그들이 같은 편으로 서겠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건 당연하다.
허나 오랜 시간 중립을 지켜 왔던 그들이다.
갑작스럽게 휘하로 들어가겠다고 나선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다소 시간은 걸리더라도 의심받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레 교주파에 융화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만간 교주 쪽 인물들과의 회동이 있었고, 그걸 빌미로 조금씩 옷이 빗물에 젖어 들듯 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었다.
대충 상황을 설명한 채륜이 이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앞으로는 직접 찾아뵙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를 쥐새끼가 붙을 수도 있어서 말이지요.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적화신루를 통해 연락을 넣으려고 하는데 그쪽을 이용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얼마든지요."
물어 오는 질문에 백아린이 상관없다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더 대화를 나누며 추후에 어떤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을지까지 모든 것들을 매듭지은 직후 채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부탁하겠소."
포권을 취해 보인 채륜은 곧장 방을 빠져나갔고, 내부에는 천무진과 백아린 단둘만이 남게 됐다.
채륜이 사라지고 약간의 시간을 보낸 이후에 백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기지개를 피며 입을 열었다.
"하암. 적당히 시간도 보냈으니 그럼 저희도 움직일까요?"
"그러지."
말을 끝낸 천무진 또한 일어나서는 백아린과 함께 거처를 빠져나왔다. 혹시 모를 감시자를 대비하여 주변의 기척을 살핀 두 사람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던 도중 백아린이 옆에 있는 천무진에게 말했다.
"아, 전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꽤나 바쁜 모양이네."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씩 웃었다.
그럴 수밖에.
천무진의 일을 돕기 위해서도 바빴지만, 또 하나 생긴 새로운 일거리 때문에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는 나날들이었으니까.
그건 바로 귀문곡에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귀문곡주 상무기를 제거한 직후부터 백아린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귀문곡을 적화신루가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중원을 대표하는 네 개의 정보 단체 중 하나인 귀문곡.
그런 그들을 흡수한다면…… 적화신루는 중원 최고의 정보 단체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수장인 상무기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 자체를 적화신루 아래에 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백아린은 자신이 있었다.
천무진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다려요. 크게 사고 칠 준비가 끝나 가거든요."
* * *
"뭐? 상무기가 죽었다고?"
"예, 어르신."
상무기가 죽었다는 서찰을 전달받고 곧장 어르신이라는 존재를 찾아온 주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현재 이 방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휘장 안에 있는 어르신이라는 존재, 그리고 십천야인 주란과 자운이었다.
먼저 어르신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자운은 주란이 가지고 온 소식에 표정을 구겼다.
"무슨 헛소리야? 상무기가 왜 죽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자운의 행동에 주란은 슬쩍 표정을 구겼다.
화산파의 인물이자, 다음 대 무림맹주 후보로까지 손꼽히는 자운은 십천야 중에서도 특히 능력이 뛰어난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대할 때 마치 부하를 부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건 주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을 구긴 그녀가 짜증스레 말했다.
"귀청 떨어지겠어. 내가 네 부하로 보여?"
"대답 안 해? 내가 지금 물었잖아! 상무기가 왜……."
"갈(喝)!"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려던 찰나 휘장 안에 자리한 어르신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은 닫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싸움질들이냐?"
"……죄송해요."
"용서를 구합니다."
주란과 자운이 어르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와중에서도 슬쩍 서로를 노려보며 상대방을 향해 불쾌한 감정을 내비쳤다. 허나 둘은 더 말을 섞지는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어르신의 분노를 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르신이라는 존재가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왜 그가 죽었는지.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그게……."
주란은 방금 전에 전달받은 서찰에 적힌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과정으로 귀문곡에 문제가 생겼고, 그걸 위해 상무기가 직접 움직인 것. 그런데 해결을 위해 찾아간 그곳에서 상무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실까지도.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천무진이 있다는 것도 말이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휘장 안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
그리고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리하고 있는 자운과 주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차라리 소리를 내 화를 내시는 게 낫다.
지금처럼 침묵이 길어진다는 건 어르신이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분노에 휩싸였다는 의미였으니까.
십천야의 한 명인 왕도지가 백아린에게 죽었을 때도 무척이나 화가 치솟았던 것이 사실이다.
허나…… 지금 것은 그때와 비교도 될 수 없는 큰일이었다.
왕도지가 맡아 온 일들은 다른 십천야가 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무기는 아니었다.
상무기가 죽었다는 말은 그저 그 하나만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십천야의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존재.
귀문곡이 문제였다.
휘장 안에 있는 그가 물었다.
"현재 귀문곡의 상태는?"
"그, 그게 아직은 완벽하게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불똥이 튈까 긴장한 어투로 주란이 답했다.
어르신은 화가 치솟았지만 그럼에도 주란에게 일이 터지고 지금까지 뭘 했냐며 분노를 토해 내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귀문곡에는 십천야와 관련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개개인이 귀문곡의 모든 일을 알고 총괄할 순 없었다.
그건 오로지 곡주였던 상무기만이 가능했었다.
그런 그가 죽은 지금 예전처럼 빠르게 모든 정보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르신이 재차 물었다.
"현재 귀문곡에 남아 있는 우리 쪽 사람들 중에 가장 쓸 만한 놈이 누구야?"
"기령(祁靈)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그나마 제일 쓸 만은 할 거예요. 하지만…… 상무기를 대체하기엔 많이 모자라요."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지. 그 기령이라는 놈에게 우리 쪽에서 힘을 실어 줄 테니 곧바로 귀문곡 내부를 정리하라고 전해."
"예, 그렇게 진행하도록 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주란을 향해 어르신이 재차 다짐을 받듯 말했다.
"어떻게든 귀문곡을 안정시켜! 지금 같은 시기에 귀문곡을 잃어서는 절대 안 돼!"
휘장 안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그만큼 귀문곡의 일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휘장 속 인물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자운."
"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자운이 움찔할 때였다.
휘장 안의 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앞당겨야겠구나."
"계획이라고 하시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자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질문에 휘장 속 인물이 답했다.
"천무진에 관련된 계획 말이다. 아무래도 그놈이 날뛰는 걸 멈추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한마디에 자운뿐 아니라 옆에 자리하고 있던 주란 또한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치 잘못 들은 건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두 사람이 놀라 있는 와중에 휘장 속 어르신의 말이 이어졌다.
"천무진 그놈을 그냥 두려고 했다. 날뛰는 것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내 실수였구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솔직히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은 십천야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걸.
천무진을 그저 손톱 밑에 박힌 가시 정도로 여겼다.
따끔거리고 신경은 쓰이지만 겨우 그뿐이라고. 헌데 아니었다.
그 가시는 점점 깊게 박혀 손가락을 썩게 만들어 버렸고, 이제는 손가락을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게끔 만들었다.
흑마신을 죽이며 그곳에 있던 비밀 연구소를 무너트렸고, 이어 흑주염이라는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될 십천야의 치부까지 알아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귀문곡까지.
이 과정에서 십천야 중 두 명이 천무진 패거리에게 당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기다리던 때가 오기도 전에 십천야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게 생겼다.
그렇게 된다면 제아무리 기다렸던 순간이 온다 해도 잃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랬기에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중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그 계획을 앞당기기로.
"자운, 네가 그 둘을 불러와라."
둘을 불러오라는 말에 자운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부복하며 어르신의 명령에 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정체 모를 이야기들을 꺼내던 휘장 속의 존재가 이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슬슬 천무진 그 녀석을…… 데리고 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