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함정 ― 이건 뭐지 (2)
순식간에 백아린과 한천의 위로 십여 개의 그림자들이 쏟아져 내렸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그런 그 둘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공격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파파팟!
쏟아지던 암기들이 목표를 잃고 고스란히 바닥에 박혔다.
가볍게 공격을 피해 낸 둘은 그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확인했다.
어느덧 검을 뽑아 든 한천은 자신들을 향해 살기를 쏟아 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대장, 제가 대단한 걸 하나 알아차린 것 같은데 말해도 됩니까?"
"뭔데?"
"아무리 봐도 저놈들 우리 편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 정도는 누가 봐도 아는 거 아냐?"
백아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이미 대놓고 살기를 토해 내고 있으니 그건 굳이 고민해서 알아낼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살기를 쏟아 내지 않았다 해도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이들이 적화신루의 인물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단 자신들을 공격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지붕 위에 빠르게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이들의 움직임이 보통 무인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
살수가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적화신루의 지원군이 와야 할 이곳에 살수들이 들이닥친단 말인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것을 의아해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바닥에 착지해 있던 그들이 갑자기 움직였다.
휘익!
양쪽으로 갈라진 그들이 동시에 백아린과 한천을 덮쳐 왔다. 순간적인 움직임, 허나 그 정도에 당황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던 한천이 가볍게 공격을 흘려 냄과 동시에 발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살수들 중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백아린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살수 다섯의 모습을 빠르게 눈으로 확인했다. 여러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
하지만 백아린의 움직임은 간단명료했다.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이 뽑혀져 나오는 순간!
부웅! 쾅!
백아린에게 달려들었던 다섯 명의 살수들이 대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 나갔다.
그들은 간신히 벽에 충돌하고서야 멈추어 설 수 있었는데, 드러난 그들의 얼굴엔 적잖이 놀란 감정이 내비쳤다.
다섯 명이 각자의 위치를 잡은 채로 치고 들어갔다.
그걸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모두 무위로 돌리다니…….
그들을 밀쳐 낸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너희 어디 소속이야?"
"……."
"빨리 말해. 그래야 어느 정도 선에서 손을 봐줄지 정할 거 아냐."
사실 단 일격에 밀려 나간 다섯 명의 살수들에겐 당황스럽겠지만 방금 전 그 공격조차도 백아린으로서는 적당히 힘 조절을 한 것이었다.
아마 그녀가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면 지금 저 다섯 명의 살수들 중에 버티고 서 있을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게다.
바로 그때였다.
‘기척?’
살수들에게 말을 걸었던 백아린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바깥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고, 놀랍게도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아린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뭐야?"
"허어, 숫자가 보통이 아닌데요."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숫자만 해도 얼추 백여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거기다가 완벽히 포위하듯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이곳에 자신들이 올 걸 알았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백아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혹시나 하고 떠오른 추측이 머리를 채웠다.
‘설마 이놈들 정체가…….’
그 순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멍청한 새끼들! 이곳이 자기들의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 오는 꼴이라니, 감히 적화신루 놈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자신들이 적화신루라는 걸 정확하게 알고 외쳐 대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백아린이 떠올렸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가 건물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살수들에게 시선을 돌린 채로 물었다.
"너희들…… 귀문곡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면에 있던 살수들이 암기를 뿌렸다.
촤르르륵!
눈앞을 가득 채우고 날아드는 수십여 개의 비수들이 순식간에 백아린에게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비수.
하지만 백아린은 오히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비수들 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뒤편으로 향해 있던 손이 번개처럼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대검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파파파팟!
비수들을 모두 튕겨 낸 걸로 모자라 쏟아져 나온 검기가 공격을 펼쳤던 살수들이 있는 공간을 덮쳤다.
콰콰쾅!
놀란 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지만 이미 몇몇은 검기에 휩쓸린 후였다. 동시에 그녀의 검기는 그들이 있던 장소를 아예 박살 냈는데, 그건 오래된 건물 외벽도 마찬가지였다.
한쪽 벽면이 시원하게 터져 나가며 순간적으로 바깥 공기가 훅 하고 밀려들어 왔다.
순간적으로 살수들을 휩쓸어 버린 백아린이 대검을 어깨에 가볍게 걸친 채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말했다.
"너희가 귀문곡이라면…… 손속에 사정은 필요 없겠네."
말을 마친 백아린이 남은 살수들을 등 뒤에 둔 채로 성큼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검기를 피해 냈던 몇몇의 살수들이 다시 한번 재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허나 그들의 앞에 귀신처럼 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씩 웃었다.
"어딜."
카카캉!
밀려드는 공격을 단번에 받아 낸 한천의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동시에 그의 빠르면서도 정확한 공격이 살수들의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슈슈슉!
날카롭게 파고든 공격에 남아 있던 살수들 모두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쿠쿠쿵.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쓰러지는 그들을 뒤로한 채 한천이 먼저 나간 백아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때마침 건물 바깥으로 나온 백아린이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빼곡하게 차 있는 인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 든 채로 두 사람을 향해 흉흉한 안광을 쏟아 내고 있었다.
백아린이 대검을 들어 방금 전 자신을 향해 소리쳤던 상대를 겨눴다.
"어이!"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그자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눈을 부라리며 말을 받아쳤다.
"감히 누구에게 어이라고……."
"그건 됐고. 네가 이 무리의 수장이야?"
말을 자르며 백아린이 물었다.
물어 오는 질문에 사내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답했다.
"그걸 말해 줄 이유 따위는 없는 거 같은데?"
"그래? 뭐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 답하기 싫으면 됐고."
백아린이 관심 없다는 듯 답하자 오히려 사내의 표정이 구겨졌다.
허나 백아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하나 궁금한 게 있단 말이지. 포위망이 마치 우리가 올 걸 알았다는 듯이 펼쳐지던데…… 그 말은 지금 우리가 함정에 빠졌다는 의미로 보면 될까?"
백아린이 직접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는 말을 하자,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했는지 그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크크! 그래도 적화신루의 총관이라 그런지 눈치는 제법 있는 모양이구나. 멍청하게 죽을지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꼴이라니. 실로 우습더구나."
"……."
말을 내뱉는 상대를 보며 백아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 모습이 사내에겐 흡사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처음부터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함정을 준비해 둔 거였군.’
처음엔 정보가 흘러 나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허나 이내 백아린은 그럴 확률이 너무도 희박하다는 걸 깨달았다.
공격당할 거라는 것 정도는 정보 단체인 귀문곡이 자신들의 정보력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치자. 거기다가 적화신루 내에 간자가 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허나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야기가 다르다. 이곳에서 모일 거라는 비밀을 아는 건 자신과 지원군을 끌고 오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테니까.
거기다가 이들은 총관인 자신이 나타날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 않은가.
이런 경우엔 답은 하나.
‘애초에 가짜 정보였나? 우리를 몰아넣기 위한?’
대체 누가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이건 내부의 누군가가 공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
백아린은 하나의 사실을 더 떠올렸다.
가짜로 의심되는 정보를 받은 당시에 그녀에게 도착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정보 하나가 아니었다는 걸.
또 다른 하나의 정보.
바로 반조와 흡사한 누군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 백아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그것도?’
애초에 무슨 목적으로 준비된 함정인지 모른다.
표적은 자신일까? 아니면 단엽? 그것도 아니면…… 천무진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백아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동시에 날아든 정보였다.
그것도 똑같이 양초를 녹인 촛농을 이용해 인장까지 찍어 봉인해 둔 서찰이었다.
분명 같은 자가 보냈을 확률이 컸는데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해 떠난 천무진과 단엽 또한 위험할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이 정도 수준의 함정이라면 백아린 또한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행 중에서 이 정도 함정에 당할 정도로 약한 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 가짜 정보를 흘린 자의 표적이 그 둘 중 하나였다면?
지금 이건 그저 자신들을 갈라놓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고, 진짜 위험한 자들이 움직인 건 천무진이나 단엽 쪽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럴 확률이 높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일을 벌인 것은 적화신루의 어교연과 황균이었다.
그렇지만 그 둘은 백아린과 한천의 진짜 실력을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을 처치하기엔 너무도 모자란 함정을 파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으로 인해 백아린은 오히려 자신이 표적이 아닐 거라 여겼고, 오히려 천무진이나 단엽이 위험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백아린은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대검을 든 채로 백아린이 소리쳤다.
"부총관!"
"네, 대장."
백아린의 뒤편에 있던 한천이 짧게 답했고,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서둘러 끝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 말고 다른 두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을 거 같아서."
백아린의 그 말에 여유 가득한 모습으로 적과 대치하고 있던 한천의 표정이 꿈틀했다. 긴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백아린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천 또한 얼추 상황을 추측하고 이해한 것이다.
그가 왼손의 검으로 상대방을 비스듬히 겨눴다.
한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끄응, 가능하면 최대한 조용히 살려고 하는데 말이죠."
항상 실력을 감추고 다니는 그다.
그랬기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허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면에 위치한 귀문곡의 인물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 한천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운이 없군요."
시간이 없으니 봐줄 생각이 없었다.
검을 든 한천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전력으로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백아린과 한천 두 사람이 동시에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