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불안감 ― 대가는 치러야지 (2)
긴 장포를 눌러 쓰고 있는 매유검이 천천히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일을 하고 있던 이들이 멈칫하며 예를 취했다.
허나 매유검은 그런 수하들의 행동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안채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선 안채는 장원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였다. 겹겹이 쌓여 있는 담장들은 마치 감옥처럼 이곳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장원 가장 안쪽에 있는 장소.
그곳에 다다른 매유검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손으로 밀어젖혔다.
끼이이익.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두운 방 안은 무척이나 단출했다. 가구라고는 잠을 잘 수 있는 침상 하나와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간단한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다.
단순한 구조의 방, 한쪽에 위치한 쪽문은 뒤편에 있는 연무장과 이어져 있었다.
탁자까지 다가간 매유검이 천천히 그곳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드르륵.
의자를 끄집어낸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방 내부를 가볍게 훑었다.
창문 하나 없어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감도는 방 안을 살펴보던 매유검이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킥, 킥킥킥!"
장포 속에 있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 그는 참기 힘들다는 듯 연신 웃어 댔다. 아무런 것도 없는 이런 공간에서 갑자기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매유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이 네가 살아갈 지옥이로구나, 천무진."
중원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밀스러운 장원.
이곳은 다름 아닌 천무진을 데리고 와 가둬 두기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그리고 이 방은 바로 천무진이 머물 곳이었다.
빛도 들지 않고, 아무런 것도 없는 그런 장소.
바로 그 순간 킥킥거리던 매유검이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쾅!
당연히 탁자는 산산조각이 나며 그 조각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탁자를 박살 낸 매유검은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허나 네놈 때문에 내가 살았어야 할 지옥에 비한다면야 이곳은 천국이지."
적어도 이곳에는 침상이 있었고, 바람을 막아 주는 벽이 있었으니까.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한 삶을 살아온 매유검에게 이곳은 너무도 풍요로운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부쉈다.
탁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꼬락서니는 그리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넌 짐승의 삶을 살아야 할 터이니 인간처럼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도 사치겠지. 네놈에겐 바닥이 어울릴 테니까."
개처럼 엎드려서 살게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 누렸던 그 모든 걸 부숴 버려야 속이 후련했으니까.
박살이 난 탁자 조각을 발로 꾸욱 밟으며 매유검이 다시금 말했다.
"너를 만날 이날을 수십 년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네놈의 주인은 바로 나다, 천무진."
말을 내뱉는 그의 입가가 유쾌한 듯 꿈틀거렸다.
수십 년을 기다려 왔던 그 날이 마침내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적련화, 그녀가 천무진을 데리고 이곳까지 오는 것뿐이다. 그 날로 천무진의 삶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질 터.
그리고…… 자신의 삶 또한.
그 순간 매유검의 발아래에 자리하고 있던 부서진 탁자 조각이 모래처럼 변해 흘러내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가루로 변해 버린 탁자의 잔재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모래처럼 곱게 변한 그걸 손에 쥔 매유검은 천천히 꽉 쥐었던 손을 펼쳤다.
그러자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그 가루들이 흘러내렸다.
사아아아.
그렇게 손바닥 위에 자리했던 가루들이 모두 흘러내렸을 때.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네 인생…… 이제 내가 받아 가마."
뜻 모를 말을 내뱉는 매유검의 몸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 * *
산미에 도착한 단엽은 무척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십천야의 일원인 반조를 뒤쫓는 일, 당연히 단엽으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내가 만났으면 좋겠는데.’
반조라는 사내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단엽은 그를 직접 만나 쓰러트리고 싶었다.
그렇게 이틀가량 산미의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아쉽게도 전해 들었던 인상착의와 비슷해 보이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틀째 날까지 공을 치고 만 단엽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산미에 있는 가장 큰 전각에 자리를 잡았다.
비련각(飛蓮閣)이라는 이름의 전각이었는데 무려 오 층으로 되어 있어 주변을 살피기에 무척이나 용이했다. 단엽이 굳이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이곳 비련각 꼭대기 층에 자리한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창가 쪽에 앉아 연신 바깥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앞에 놓여 있는 술잔에 연신 술을 따라 가며 홀짝이고는 있었지만 사실 맛을 느끼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산미는 꽤나 큰 마을이다.
배가 드나드는 나루터가 있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오고 가는 적잖은 이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단엽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쳇, 이쪽이 아닌 건가. 아니면 벌써 떴나?"
정보가 들어왔던 처음부터 상대방의 움직임이 더욱 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움직인 이후에나 정보를 받았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달려왔거늘…….
단엽은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다시금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혹시라도 이미 이곳을 떠난 거라면, 그 뒤라도 쫓기 위해 주변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의심스러운 정황은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다.
허나 그럼에도 미련이 남았는지 단엽은 당장 이 마을을 뜰 생각은 없었다.
‘한 이틀 정도만 더 뒤져 보다가 움직여야겠네.’
창가에 기댄 채 아래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던 그때 뭔가가 단엽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놈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들 중 낯익은 복식이 보였다. 다름 아닌 단엽이 속한 단체, 대홍련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단엽이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자도 있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커다란 덩치.
까슬까슬하게 자란 수염이 무척이나 거칠어 보이고, 부리부리한 눈은 절로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게 만든다.
왕보(王甫)라는 이름을 지닌 자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서운 얼굴 때문인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슬슬 길을 터 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단엽이 가볍게 혀를 찼다.
"하여튼 무섭게 생긴 걸 꼭 저렇게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뭔가를 찾는 대홍련의 무인들을 지켜보던 단엽은 이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기대고 있던 창가에 걸터앉더니 곧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휘익.
오 층 높이의 전각이었지만 단엽은 너무도 가볍게 착지했다. 허나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로 인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허엇!"
"가,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놀라는 이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로 단엽은 곧장 대홍련의 무인들이 움직이는 뒤를 따라 걸었다.
얼마 안 있어 단엽의 시야에 왕보의 커다란 몸집이 들어왔다.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로 인해 삭막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오던 그때.
바로 뒤까지 다가간 단엽이 손을 들어 올려 왕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빡!
험상궂은 왕보로 인해 주변으로 갈라지며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들의 눈동자가 당장에 굴러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만큼 그들은 지금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왕보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어떤 씹어 먹을 잡놈의 새끼가……."
왕보가 이까지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당연히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흐르는 적막.
인근에 있던 사람들은 당장에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 인근에 있던 이들에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무섭게 생긴 무인의 뒤통수를 친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오히려 눈을 부라렸으니까.
"뭐? 잡놈?"
그리고 때마침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왕보는 놀라 허둥지둥거렸다.
"아, 아니 그게 부련주님이신 걸 모르고…… 아아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엽이 왕보의 귀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마구 흔들며 말을 이었다.
"씹어 먹는다며? 엉?"
"시, 실언을 했습니다!"
왕보는 자신의 귀를 움켜쥔 단엽의 손을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단엽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도 귀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왕보의 귀를 잡고 흔들어 대던 단엽이 성에 찼는지 비로소 손을 놔줬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왕보가 귀를 움켜쥔 채 붉어진 얼굴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어느덧 왕보의 뒤로는 인근에서 움직이고 있던 대홍련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일사불란하게 단엽을 향해 예를 갖췄다.
부복한 그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련주님을 뵙습니다!"
길거리에서 십여 명이 넘는 무인들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치는 광경은 주변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단엽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길거리에서 창피하게 무슨 짓이야."
빨리들 일어나라며 단엽이 손짓하자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이 모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사이 단엽이 왕보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뭘 그리 찾고 있어?"
"부련주님이요."
"……나?"
"예, 부련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곳 인근에 오신다고 연락을 넣어 놓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단엽은 주기적으로 대홍련에 자신의 위치를 보고해 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이 있어 이곳 산미에 온다고 미리 알려 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이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 산미에 나타났던 모양이다.
단엽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갑자기 나는 왜?"
"그건……."
이런 장소에서 말하긴 다소 애매했는지 왕보가 잠시 말을 멈췄다. 대충 눈치를 챈 단엽이 손가락으로 자신이 방금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비련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야기는 저기 가서 하자고."
"넵, 부련주님."
말을 끝낸 단엽이 성큼 비련각을 향해 걸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벌어진 이 구경거리로 인해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한천이었다.
며칠을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하고 달려온 탓에 그는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천을 발견한 단엽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한천이 단엽을 향해 성큼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어이! 너 괜찮아?"
혹시나 단엽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고 달려온 한천이었다. 그가 걱정스레 물어 올 때였다.
자신들의 앞길을 막으며 나타난 한천을 향해 왕보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갔다.
"이 거지 같은 새끼가, 넌 누군데 우리 부련주님의 앞길을 막고……."
빡!
뒤통수를 세게 맞은 탓에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흔들렸다. 왕보가 뒤통수를 움켜쥔 채로 다시금 울상을 지어 보였다.
"부, 부련주님 왜 그러십니까?"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단엽이 짧게 답했다.
"내 지기한테 네가 까불면 되겠냐?"
"……지기라고요?"
지기라는 말에 왕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단엽이라는 사내가 누군가를 지기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엽의 앞까지 다가온 한천은 슬쩍 주변에 있는 이들을 확인했다.
굳이 단엽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복식이나 행동만으로 이들이 대홍련의 수하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정체를 안 왕보가 서둘러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수하들이 이번엔 한천을 향해 예를 갖췄다.
"부련주님의 지기님을 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행동에 한천이 당황한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이내 옆에 있는 단엽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야, 네 수하들 창피하게 왜들 이래."
"……."
단엽 또한 표정을 찡그린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들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젓던 단엽이 이내 한천의 위아래를 훑으며 물었다.
"너 근데 행색이 왜 이렇게 거지꼴이냐? 어디 가서 동냥이라도 하다 왔어?"
"참내, 네 걱정에 며칠을 밤새고 달려온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냐?"
"걱정?"
단엽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릴 때였다.
"일이 좀 있었거든. 그나저나 넌 별일 없었어?"
대충 말을 얼버무린 한천이 재차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단엽이 담담하게 답했다.
"오히려 별일이 너무 없어 문제였지."
별일 없었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한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한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쪽이 아니면 역시…… 그쪽이려나."
자신들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움직인 백아린과 한천이다.
표적이 될 둘 중 하나인 단엽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남은 하나인 천무진에게 뭔가가 벌어질 확률이 크다는 얘기인데…….
중얼거리며 표정을 굳히는 한천의 모습에서 단엽은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가 한결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뭔데?"
물어 오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짧게 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용한 곳에서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