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의지 ― 기다려요 (1)
귀문곡과의 싸움이 끝난 직후.
한천과 헤어진 백아린은 목적지인 오천을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천무진 일행에게 도착한 정보 중 거짓이 섞여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으니, 천무진이나 단엽 또한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천에 도착한 것은 막 해가 질 무렵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천무진과 정보를 주고받았을 오천 지역에 위치한 적화신루의 거점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적화신루의 거점.
그런데 그곳에서 백아린은 눈살을 찌푸릴 만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위치를 모른다고요?"
"예, 어제까지는 연락이 닿았는데 이후로 감감무소식이십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아린이 다급히 물었다.
"혹시 연락이 끊긴 이후로 뭔가 이곳 오천에 큰일은 없었어요? 소란이 있었다던가 하는 일이요."
"흐음, 글쎄요. 다시 한번 확인은 해 보겠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없었습니다."
"……그래요?"
대답을 하며 백아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무진 정도 되는 무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소란 없이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소란이 없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긴 했지만…….
백아린을 향해 수하가 말했다.
"혹시 거처로 돌아가신 게 아닐까요? 오천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시면서 찾아내신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슬슬 마무리 짓고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대답을 들은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시간상 그랬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을 테니까.
정황상 천무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확률보다, 직접 마교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허나 모든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아린은 이상하게도 찜찜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그저 단순한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외면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결국 마음을 정한 백아린이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군요. 어제 천 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던 곳들에 대한 정보 부탁해요."
백아린의 명령에 잠시 멈칫한 수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금방 알아다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적화신루 거점에 대기하고 있던 백아린에게는 천무진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들어왔다. 물론 천무진이 작정하고 은밀히 움직인다면 적화신루라고 해도 찾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허나 천무진이 계속해 정보를 요청해 받는 곳이 적화신루였으니, 당연히 그의 움직임을 알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정황까지.
모든 것이 적힌 서찰을 받아 든 백아린은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움직였다.
천무진이 움직인 곳은 꽤나 많았지만 백아린은 우선 의심스러운 장소를 네 개로 추려 냈다.
그렇게 움직이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른 장소.
그곳은 오천 한쪽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객잔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순서대로 움직인 탓에 어쩌면 천무진이 마지막으로 보인 장소이기도 했다.
객잔에 들어선 백아린은 천천히 내부를 훑었다.
천무진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장소.
싸움이 벌어졌었다면 아무리 뒷수습을 했다 해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터인데…….
‘멀쩡하네.’
백아린이 주변을 둘러보던 사이 점소이 소년이 다가왔다.
"혼자 오셨습니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년을 향해 백아린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가 물었다.
"꼬마야, 여기서 손님을 받는 일을 하는 건 너뿐이니?"
백아린의 질문에 어린 점소이는 내부를 가리키며 말을 받았다.
"네, 크지 않아서 제가 거의 하고 있어요. 그건 왜요?"
"그럼 혹시 어제도 여기 있었니?"
백아린의 질문에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곧장 그에게 천무진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듯 올려다보는 점소이 소년을 향해 백아린이 말했다.
"혹시 이 종이에 그려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해서."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펼친 소년은 이내 짧은 소리를 토해 냈다.
"아!"
"이 사람 기억나?"
"그럼요. 원래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전부 떠올리지는 못하는데 이 손님은 기억이 나요. 어제 오후쯤에 들렀던 것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부터 준수한 외모까지.
점소이 소년은 짧게 들렀던 천무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이 곧장 말을 이었다.
"오셔서 소면이었나 뭐 그런 비슷한 거 한 그릇 시켰던 거 같아요. 그게 다예요."
"그 외에 뭐 특별한 거 기억나는 건 없고? 어디 다쳤다거나 아니면 급해 보였다거나 이런 거 혹시 뭐 떠오르는 건 없니?"
"네, 전혀요. 저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가셨어요."
소년이 가리킨 자리는 다행히 비어 있었기에 백아린은 그쪽으로 다가가 천천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빈 탁자를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졌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두 발로 스스로 걸어서 나갔으니 이상하다 여길 만한 부분이 없었다. 점소이 소년의 말에서도 아무런 의심할 만한 상황을 듣지 못한 백아린이 그렇게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찰나였다.
탁자를 짚었던 손.
그녀가 갑자기 움찔했다.
탁자를 짚으며 자연스레 아래쪽으로 향했던 엄지 부분에 걸린 미묘한 감촉 때문이었다.
그건 흠집이었다.
그런데…….
백아린이 갑자기 엄지손가락으로 탁자 아래에 있는 흠집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이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다급히 무릎을 굽히며 탁자 아래를 살폈다.
그렇게 아래를 확인한 백아린의 눈이 커졌다.
역시나 이건 단순한 흠집이 아니었다.
탁자 아래쪽에 남겨져 있는 건 다름 아닌 하나의 글자였다.
천(天)
너무도 간단한 글씨.
그런데 그 간단한 글자조차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삐뚤삐뚤했고, 또 종종 획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있었다.
이 글자엔 안간힘을 다해 남겨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백아린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앉았던 자리, 그곳에 남겨진 천(天)이라는 글자. 그건 분명 천무진이 남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건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그저 하나의 글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삐뚤삐뚤한 글자엔 천무진의 다급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때 막 백아린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점소이 소년이 다가왔다.
"그럼 주문은……."
무릎을 굽힌 채로 탁자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백아린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점소이 소년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정말 어제 그 사람한테 아무런 일도 없었어? 뭐라도 좋으니 기억해 내 줬으면 좋겠어.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백아린의 간절한 목소리에 움찔한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별반 특별할 것이 없었기에 잠시 생각하던 소년은 말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자 그걸 그대로 말해 주었다.
"아 참, 그런데 그분 식사를 안 하고 가셨어요."
"식사를 안 했다고?"
"네, 혼자 오셔서 음식을 주문하셨는데 가져다 드릴 무렵에 다른 일행분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과 같이 나가시느라 식사를……."
점소이 소년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아린이 황급히 물었다.
"혹시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기억해?"
"어, 그게……."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소년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였어요. 근데 얼굴은 붉은 천으로 가리고 있어서 전혀 안 보였고요."
"……여자?"
말을 듣는 백아린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천무진은 전생에 대해 백아린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여인으로 인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해서도.
‘설마…….’
바로 그때였다.
"그 여자가 남자분한테 무슨 부탁이 있다고 하던데요?"
점소이 소년이 기억해 낸 그 한마디에 백아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의심이 확신이 되었고, 백아린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천무진이 위험하다는 것을.
제대로 쓰지 못한 이 글자에 담긴 간절함까지도.
천무진은 아마 안간힘을 다해서 이 글자를 남겼을 것이다. 이 흔적을 통해 자신을 찾아 주기를 바라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백아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무진은 자주 악몽을 꿔 왔다.
과거의 삶이 괴로웠다는 걸 들은 이후에야 천무진이 왜 그 같은 악몽에 시달리는지 알게 됐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다려요. 반드시 찾아 줄 테니까.’
백아린의 고개가 객잔의 문 쪽으로 향했다.
더는 망설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녀가 곧장 옆에 있는 소년에게 동전 몇 푼을 쥐여 주며 말했다.
"고마워."
"어, 이거 너무 많은……."
점소이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백아린의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역시나 적화신루의 거점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던 사내는 재차 들이닥친 백아린의 모습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사총관님 오셨……."
그런 그의 말을 자르며 백아린이 말했다.
"지금 당장 이곳의 사람들 모두 모아요. 손을 빌릴 수 있는 인원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요."
"예? 당장 말입니까?"
"한시가 급한 일이에요. 서둘러요."
"하지만 다들 하는 일이 있는지라 당장은 어렵습니다."
당황한 듯 말하는 수하를 향해 백아린이 곧장 답했다.
"하는 일 모두 멈춰요. 그게 무슨 일이 됐든 간에요. 지금부터 오천을 비롯해 인근 마을에 있는 모든 적화신루의 정보원들은 제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부의 허락이……."
쾅!
백아린이 주먹으로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벽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힘에 적화신루 소속의 수하가 움찔할 때였다.
백아린이 말했다.
"제 명령이라 생각하지 말아요. 이건…… 적화신루 루주님의 의지니까요."
말을 내뱉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 그걸 마주하고 있던 수하가 입을 열었다.
"……뭘 찾으면 되겠습니까?"
물어 오는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찾아야 할 건 두 가지예요. 첫 번째,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자. 그리고 두 번째는 천(天)이라고 적힌 글자들이에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찾아요. 분명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일 거예요.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백아린은 믿었다.
천무진의 상태가 어떨지 몰라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낼 수 있도록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 * *
백아린의 예상은 적중했다.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고, 알아보기도 힘든 형체긴 했지만, 마을의 일부 장소들에서 천(天)이라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글자들을 이어 하나의 길로 만들어 가던 도중, 결국 하나의 의심스러운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객잔이었다.
그리고 그 객잔은 며칠 전부터 누군가에게 통째로 빌려진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적화신루의 수하들을 대동한 채로 다급히 객잔을 찾은 백아린은 천무진이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비어 있는 객잔 방 내부에서였다.
글자를 확인하고 있던 백아린의 뒤편으로 이 객잔의 주인이 끌려왔다. 그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긴장한 얼굴이었다.
백아린이 이 객잔 주인을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물을게요. 솔직히 대답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수도 있거든요."
그녀의 경고에 객잔 주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백아린이 물었다.
"이 객잔에 머물던 자들 중에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있었어요?"
"부, 붉은 천이요?"
더듬거리던 객잔 주인은 곧바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예, 예, 있었습니다요.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아서 거의 보지는 못했는데, 계속 이곳으로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더군요."
"……이 방에 그 여자가 있었군요."
"네, 맞습니다."
"혼자였나요?"
"아뇨. 웬 사내 하나와 함께였는데……."
말을 듣기가 무섭게 백아린은 천무진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움찔하는 객잔 주인을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이 사람 맞아요?"
정신을 차리고 종이 안의 그림을 확인한 객잔 주인이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답했다.
"예, 이 사내 맞습니다."
대답을 듣는 순간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와락 구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객잔 주인이 놀란 듯 뒷걸음치는 그때였다.
백아린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던 이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그, 그게……."
더듬거리는 객잔 주인을 향해 백아린이 눈을 치켜떴고, 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배, 배를 타러 갔습니다! 배에 실을 짐들을 한참 날랐었거든요."
배라는 말에 백아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육로가 아닌 수로를 통해 이동한다면 흔적이 남지 않아 뒤를 잡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그녀가 다급히 물었다.
"언제 출항이죠?"
"그것까지는……."
"치잇!"
백아린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이미 배가 떠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랬기에 그녀에겐 더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배를 타고 이동하기 전에 어떻게든 천무진을 찾아내야만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를 찾아내는 건 얼마의 시간이 더 소요될지 알 수 없었다.
백아린이 다급히 말했다.
"항구가 어느 쪽이죠?"
물어 오는 질문에 수하가 곧장 답했다.
"나가시자마자 이어진 길을 따라 남쪽으로 쭉 움직이시면 바로 보이실 겁니다. 적의 정체도 모르는데 정보를 모으고 움직이시는 것이……."
"그러면 늦어요. 제가 먼저 움직일 테니 지부장은 사람들을 모아서 따라와 줘요."
"예, 알겠습니다."
말을 끝낸 백아린은 곧장 움직였다.
그녀가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하더니 창문을 통해 훌쩍 뛰어내려 섰다. 하늘 위에서 백아린이 뚝 하고 떨어져 내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물러섰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시간이 없어!’
천무진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녀는 달려야만 했다.
백아린은 수하가 말해 준 대로 길을 따라 계속해서 내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항구.
하지만 항구에 도착해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는 백아린의 얼굴엔 착잡함이 맴돌았다.
‘……너무 많아.’
정박해 있는 배만 해도 수십 척이다. 거기다 막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배들까지.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주변을 마구 둘러보는 백아린의 표정은 간절했다.
‘어디예요? 어디에 있어요?’
이미 늦은 걸까? 아니면…….
그 순간.
움찔.
그녀의 간절한 시선이 주변을 훑어가던 그때 백아린은 자신에게 향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한 감각, 하지만 그걸 느끼는 순간 백아린의 시선이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자신을 향한 눈빛이 느껴지는 건 이미 항구에서 제법 멀어진 한 척의 배에서였다.
그리고 그 배를 향해 안력을 돋우는 순간 들어온 건…….
천무진이었다.
뱃머리에 선 천무진이 백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릿해진 눈동자, 그렇지만 그 시선은 정확히 백아린에게 향하고 있었다.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지만 뛰어난 무인인 백아린이었기에 그 배 위에 자리한 천무진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를 확인하는 순간 백아린의 발은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타다다닷!
길게 이어진 부두를 그녀는 재빠르게 내달렸다.
백아린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구해야 한다!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백아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두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발을 구르며 도약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바다 위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파앗!
동시에 점점 가까워지는 배.
그리고 그 배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와 박힌다. 동시에 멍하니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도.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드득.
백아린이 쥐고 있던 대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내공이 곧장 하나의 기운이 되어 강기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대로 낙하를 하는 것과 동시에 백아린은 대검에 실린 강기를 정확하게 쏘아 냈다.
콰콰콰콰쾅!
배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지며 흔들거렸고, 백아린은 재빠르게 난간 위에 착지했다.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붉은 면사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백아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천무진에게 들었던 그 여인이 바로 저자라는 걸.
바로 그 순간 백아린은 그 붉은 면사를 쓴 여인이 천무진을 향해 손을 움직이려는 걸 알아차렸다.
수상쩍은 움직임, 그리고 백아린은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백아린이 빠르게 대검에 검기를 실어 쏘아 보냈고, 그걸 피하기 위해 상대는 황급히 손을 거둬야만 했다.
그 순간 그런 그녀를 향해 백아린이 경고를 날렸다.
"개수작 부리지 마. 손가락 다 날려 버리기 전에."
* * *
그렇게 마주한 백아린과 적련화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적련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배를 반으로 갈라 버린 무위도 그렇지만 마치 자신이 천무진에게 뭔가 수를 쓰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십천야인 적련화다.
기본적으로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일반적인 무인과 비교해서였다. 십천야 중에서 무공 실력으로만 보자면 가장 아래였고, 그녀는 다른 쪽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적련화가 백아린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배는 이미 반으로 갈라진 탓에 빠른 속도로 바닷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마주한 상대에게 적련화가 물었다.
"당신…… 누구죠?"
그녀의 질문에 백아린이 담담히 답했다.
"적화신루 사총관 백아린. 그리고 네 더러운 계획을 산산조각 내 줄 사람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