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의지 ― 기다려요 (2)
"대장! 괜찮으십니까?"
수하 하나가 다급히 적련화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빠르게 침몰하는 배 위에서 그나마 버티고 선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나머지 일당은 대부분 배의 선상 위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고, 그 때문에 일이 일어난 직후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십천야를 따르는 무인들이 바다에 빠진 정도로 죽진 않겠지만 말이다.
백아린은 빠르게 적련화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보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박살을 내 줘야 할 상대들이다.
다만 중요한 건…….
‘천 공자부터 구해 내야 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배 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미동도 하고 있지 않은 천무진이다. 예상했던 대로 천무진의 상태는 이상했고, 자칫 잘못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백아린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천무진의 안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우선 저들과 천무진을 떨어트려 놓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백아린의 대검으로 빠르게 내력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적련화와 그녀의 수하들을 향해 재빠르게 대검을 휘둘렀다.
부웅!
강렬한 강기가 다시금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백아린의 공격에 그들이 놀란 듯 움찔했을 때다.
날아든 강기는 그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아린의 강기가 닿는 곳.
그곳엔 천무진이 있었다.
콰앙!
강기에 적중당한 배의 일부분이 박살이 나며 튕겨져 올랐다. 그리고 강기는 정확하게 천무진이 버티고 서 있던 부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하지만 절묘한 힘 조절 덕분에 근처의 것들은 모두 박살이 났지만 천무진과, 그가 버티고 서 있던 부분은 너무도 멀쩡히 하늘로 치솟아 오를 뿐이었다.
순간 백아린이 난간을 박차며 다시금 하늘 위로 솟구쳤다.
휘리리릭!
날아든 백아린의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천무진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는 백아린의 손이 천무진의 몸에 닿았다.
투욱.
손끝에 닿는 감촉, 백아린은 그대로 천무진을 감싸듯 안으며 그대로 허공에서 회전했다.
타앗!
백아린이 착지한 건 물 위에 떠 있는 커다란 판자 조각 위였다. 한 사람을 안고 물 위에 있는 판자 위에 착지했거늘 주변으론 파도를 제외한 어떠한 파동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무공이 빼어났기 때문이다.
백아린은 안고 있던 천무진을 천천히 나무판자 위에 눕혔다.
이런 소란 속에서 미동조차 없는 그를 눕히며 시선을 마주한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늦었죠?"
꿈틀.
대답을 할 수 없던 천무진의 손가락 마디 하나가 꿈틀거렸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며 백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체처럼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아파 왔다. 그를 눕힌 백아린이 몸을 일으켜 세워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기다려요.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점점 바다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배, 하지만 아직 백아린의 용무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곧장 물 위를 박차고 침몰하는 배 위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는 이미 전열을 정비한 적련화와, 그녀의 수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검을 든 채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백아린이 상대들을 향해 말했다.
"죽어야 할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끝내긴 쉽겠네."
말을 끝낸 그녀가 빠르게 내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백아린의 몸 주변으로 검은색의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잔마폭멸류였다.
가시의 모양으로 솟구쳐 오른 검은 색의 검기들. 그 검기들이 하나하나 날카로운 창처럼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련화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백아린이 펼치고 있는 저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잔마폭멸류? 그걸 저 계집이 어떻게……!’
채 놀라운 감정을 감추기도 전, 백아린의 주변으로 피어올랐던 검은 색의 검기들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아무런 것도 모르는 수하들이 검기를 막겠다고 달려드는 순간.
적련화가 소리쳤다.
"안 돼! 막지 말고 피햇!"
다급한 외침과 함께 적련화는 기우뚱 기운 배의 바닥을 따라 곧장 바다 안으로 몸을 날렸다.
적련화의 외침 덕분에 일부는 재빠르게 막으려던 움직임을 거두고 방향을 틀었지만, 선두에서 움직였던 이들은 이미 잔마폭멸류의 간격 안에 들어선 후였다.
그리고.
콰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이에 휩쓸린 이들의 몸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바다를 향해 쏟아진 잔마폭멸류의 기운이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어 냈다.
쿠왕!
물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주변으로 마구 밀려 나갔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그나마 멀쩡했던 배의 일부분은 아예 조각조각이 나 버렸고, 적련화를 호위하겠다고 나섰던 인원들 절반 이상이 휩쓸려 사라졌다.
바다에 먼저 몸을 날렸던 적련화는 쏟아지는 잔마폭멸류의 기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하지만…….
파악!
살갗이 뜯겨져 나간 듯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물속에서 헤엄치던 적련화의 어깨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왔다.
‘으읏!’
슬쩍 열린 입으로 거품이 뽀그르르 올라갔다.
허나 이내 적련화는 이를 악물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상대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상대의 정체가 소문의 그 여인이라니.
주란을 꺾었고, 반조가 인정했으며 왕도지를 죽인 인물.
적련화의 무공 수위는 십천야 중에서 최약체에 속했고, 좋게 봐도 절정 정도밖에 이르지 못한 실력자였다. 그런 그녀가 우내이십일성 이상의 경지에 오른 백아린을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싸움이 벌어진 것이 바다라는 점이다.
지금 이렇게 물에 빠진 상태로 몰래 도망을 친다면 살아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육지였다면 이 정도의 실력 차가 나는 상대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
허나 이곳은 바다였다.
어깨의 상처를 무시한 채로 적련화는 몸을 틀었다.
최대한 육지에서 멀리 도망칠 생각인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서 밀려드는 묵직한 기운을 느낀 적련화가 황급히 몸을 돌리며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이 용솟음쳤다.
콰앙!
솟구쳐 오른 물줄기. 일순 적련화는 자신 주변에 있던 바닷물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간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날아가 버린 물 사이로 백아린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어딜 도망치려고."
동시에 위에서 날아든 백아린의 주먹이 바닷물이 밀려 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적련화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퍼엉!
그 힘이 얼마나 셌는지 배에 일격을 허용한 적련화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동시에 입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컥!"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적중당한 일격이었다.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 일격을 허용해 버린 탓에 피를 뿌리며 날아올랐던 적련화는 아슬아슬하게 근처에 있는 배의 파편 위에 올라섰다.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배를 움켜쥔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커억, 헉."
순간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들을 밟으며 백아린이 물 위를 내달려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부우웅!
날아드는 커다란 대검의 모습에 적련화가 서둘러 몸을 뒤로 움직였다. 직접적인 공격은 피해 냈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휩쓸린 적련화가 다시금 팔을 들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피잇.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금 움직이려는 백아린을 향해 적련화가 빠르게 공격을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뻗어져 나간 장력이 백아린이 발을 노렸다.
퍼엉!
물보라가 이는 사이로 백아린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재빠르게 다른 곳에 착지한 채로 균형을 잡았다.
그런 백아린의 뒤편에는 천무진이 누운 채로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나무판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처럼 공격을 펼치는 와중에도 백아린은 완벽하게 천무진에게 향할 수 있는 모든 길목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적련화가 천무진을 노리고 재차 뭔가를 벌이려 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확실치 않지만…… 천무진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백아린의 예상은 정확했다.
적련화는 품 안에 감춰 둔 자그마한 통 하나를 확인했다. 바다에 빠지고, 백아린의 공격을 당하는 와중에도 다행히 이 통은 멀쩡한 상태였다.
천무진은 아직 완벽하게 적련화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선 아직까지 이 통 안에 든 가루의 힘이 필요했다.
보름, 딱 보름이면 됐다.
그 시간만 있었다면 굳이 이런 가루가 없어도 천무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을 텐데…….
물에 젖은 붉은 면사가 얼굴에 잔뜩 달라붙었다. 억지로 그걸 떼어 낸 적련화의 시선이 백아린의 뒤편에 있는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도망치는 걸 실패한 이상 다시금 답은 천무진을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백아린이 결코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완벽하게 막아선 채로 천무진에게 향할 모든 움직임을 사전에 방어할 것이다. 그리고 아쉽게도 지금 적련화나, 살아 있는 수하들 중에는 백아린을 방해하거나 그녀의 방어를 뚫어낼 정도의 실력자가 없었다.
가장 고수인 적련화조차도 백아린의 공격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 버거울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해 무엇 하랴.
적련화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장력을 뿜어냈다.
파앙!
허나 백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날아드는 공격을 대검으로 받아 냈다.
쿠웅.
그녀의 몸이 흔들리며 주변으로 물길이 다소 치솟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백아린은 곧게 선 채, 대검을 이용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모든 기운들을 방어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조금이나마 밀려져 나가면 당장이라도 천무진에게 달려가려던 적련화는 결국 그 계획을 머릿속에서 지워야만 했다.
적련화의 공격을 받아 낸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되네. 너 정도가 어떻게 천 공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천무진과 적련화는 급 자체가 달랐다. 제아무리 뛰어난 섭혼술을 지니고 있다 한들, 그녀 정도의 무위를 가진 이의 기술이 천무진에게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약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처럼 큰 실력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을 조종할 정도의 섭혼술이 가능하다면…… 그걸 왜 자신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섭혼술에 능한 인물이라면 자신에게 이처럼 무공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순간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여인의 섭혼술이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 섭혼술이 천무진에게만 통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사내에게만 통하는 섭혼술의 일종일 수도 있겠지만, 미색 정도로 어떻게 하기엔 천무진이라는 상대가 너무도 강했다.
백아린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천무진이 당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그때.
눈을 굴리며 이 난관을 타개하려 고심 중인 적련화의 마음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좋지 못했고, 아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렇게 최후를…….
그 순간이었다.
아래를 바라보는 순간 붉은 면사 뒤편에 감춰진 적련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결국 천무진을 조종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결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허나 직접적으로 천무진에게 다가갈 수 없는 지금.
통 안에 숨겨진 가루를 통해 효과를 볼 만한 딱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그건 바로…… 파도였다.
얼마나 효과를 볼지, 성공할지 장담할 순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확률 높은 도박이라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채로 싸움을 이어 간다.
그리고 쓰러진 척하며 슬그머니 파도를 통해 이 통 안에 담긴 가루를 천무진에게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파도의 움직임을 이용해 그 가루가 천무진에게 닿게 만들 수만 있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 있어.’
적련화의 눈동자가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