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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193화 (192/293)

193화. 생존 ― 죽지 말아요 (1)

적련화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백아린의 눈을 속이고 숨겨 둔 가루가 천무진에게 닿도록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파도를 이용해서 흘려보낼 생각이었기에 최대한 거리를 좁혀야 했고, 물길의 방향 또한 맞아야 했다.

적련화의 시선이 빠르게 몇 군데 위치를 훑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곳.

‘저기가 좋겠어.’

현재 물살의 방향으로 보았을 때 지금 확인한 위치가 가장 적당해 보였다. 위치는 정했으니 남은 건 백아린의 눈을 속이는 것뿐.

그리고 그러기 위해 적련화가 움직였다.

스스슥!

물 위를 떠다니는 물건들을 밟으며 그녀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그와 함께 사전에 전음으로 명령을 전달받은 수하들이 재빠르게 백아린을 덮치고 달려들었다.

채채챙!

백아린에게 다가가 직접적인 공격을 펼치는 건 어렵다 생각했는지 대다수가 비수를 던지며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다. 허나 물 위를 떠다니는 판자 위에 몸을 싣고 있던 백아린은 너무도 쉽게 그 공격들을 모두 밀어냈다.

파파팡.

날아들던 비수들이 모두 바닷속으로 사라졌고, 이윽고 백아린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르릉! 파앙!

바다를 베며 휘둘러진 대검에서 뻗어져 나온 강렬한 검기가 사방으로 요동쳤다. 동시에 순간적이나마 반대 방향으로 파도가 밀려들었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던 이들이 그 공격에 휩쓸렸다.

"커윽!"

몇 명은 검기에 휩쓸려 바닥으로 빠져 버렸고, 일부는 그 전에 간신히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사이에 어느덧 거리를 좁혀 들어간 적련화가 빠르게 품 안에 있는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차앙!

적련화의 무기는 보통의 검보다는 짧고, 그렇다고 단검이라 보기에는 긴 중간 정도 크기를 지닌 물건이었다.

어차피 백아린을 죽일 생각으로 달려든 것이 아니었기에 적련화는 적당한 초식을 펼쳤다.

십여 개의 잔영이 순식간에 하얀 물살을 만들어 냈다.

파파팡!

백아린은 곧장 대검을 방패 삼아 공격을 받아 내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적련화는 아찔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너무 빨라!’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먼저였고, 그녀는 서둘러 달려드는 백아린의 몸을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곳은 물 위였고, 생각보다 거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충격파의 범위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으드득.

정확하게 일격을 허용한 것도 아닌, 가볍게 빗맞은 정도였거늘 온몸의 뼈가 비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적련화는 그대로 그 힘에 못 이겨 내동댕이쳐졌다.

풍덩!

밀려 나간 그녀는 그대로 바다에 빠져 버렸고, 이내 물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물 위를 마치 땅처럼 자유자재로 밟고 다니는 백아린과는 달리 적련화는 고도의 집중을 하지 않고서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수상비(水上飛:물을 밟고 달리는 경공술)의 경지만 봐도 두 사람의 실력 차가 엄연히 느껴졌다.

물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적련화의 시선이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거리가 조금 멀어.’

백아린이 휘두른 대검에 휩쓸리며 예상치 못하게 밀려 나가는 바람에 계산보다 훨씬 뒤편에 자리하게 된 적련화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상대가 너무 강했고, 그런 백아린을 상대로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물살의 방향이나, 위치도 나쁘진 않았다.

품에 숨겨 둔 가루를 풀기에 더 좋은 장소를 기다리다가는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도 있는 상황.

그랬기에 적련화는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가뜩이나 백아린이 주변으로 달려드는 자신의 수하들로 인해 잠시 시선이 붙잡혀 있는 이때!

적련화가 슬그머니 숨겨 뒀던 통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고는 물 위로 슬쩍 빼내더니 이내 통의 입구를 막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뽕.

소리와 함께 열린 통에서 분홍색의 가루가 슬그머니 파도를 타고 퍼져 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여전히 파도 위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나무판자 위에 자리한 천무진이었다.

분홍색의 가루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적련화는 알 수 있었다. 물길의 방향이 그 가루들을 천무진에게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련화는 손으로 붉은 면사 안에 감춰진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적셨던 물기를 가볍게 털어 낸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좋아! 이제 곧……!’

파도의 움직임을 보며 모든 것이 곧 계획대로 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치미는 바로 그 순간!

팡!

물보라가 일었다.

천무진이 누워 있는 나무판자가 허공으로 높게 치솟았고, 동시에 물보라가 이는 곳을 기점으로 하여 밀려든 커다란 파도가 주변을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중간에 생겨난 충격으로 인해 파도는 더욱 커졌고, 바닷물은 보다 빠르게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천무진에게 닿았어야 할 가루가 섞인 물들은 그가 위에 떠 있는 사이 거짓말처럼 모두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커다란 파도가 순간적으로 생겨난 탓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적련화가 멍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볼 때였다.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천 공자를 노리네."

말을 내뱉는 건 바로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 가루가 섞인 바닷물을 빠르게 밀어내 버린 백아린이었다.

백아린은 처음부터 적련화가 뭔가 다른 걸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놔뒀던 것은 바로 그녀가 누굴 노리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애초에 적련화가 자신에게 섭혼술을 사용하지 않고 무공으로만 상대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던 백아린이다.

그랬기에 직감적으로 그 섭혼술이 천무진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닐까 예상했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자그마한 함정을 준비해 뒀다.

그리고 적련화는 백아린의 예상대로 움직여 줬다.

덕분에 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천무진이 당한 건 그저 단순한 섭혼술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천무진에게 있어서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굳이 이런 함정까지 만들며 적련화의 꿍꿍이를 파악해 냈던 것이다.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백아린이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적련화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볼 건 다 봤으니…… 슬슬 끝내 볼까."

말과 함께 백아린의 몸 주변으로 다시금 검은색의 검기들이 가시처럼 피어올랐다.

허나 그 기세는 처음 적련화의 패거리를 덮쳤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아까는 겨우 아홉 개에 불과했던 검은 검기들.

허나 이번에 피어오른 숫자는 무려 열네 개에 달했다. 그리고 그건 십천야였던 왕도지를 죽였던 당시보다 무려 두 개나 더 늘어난 수치였다.

그때보다 한층 더 강해진 잔마폭멸류.

그리고 그 위력은…….

탁!

백아린이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검은 검기들이 날카로운 형상을 뽐내며 일렬로 늘어섰다.

바다 위에 선 채로 검은 검기들을 일렬로 줄 세운 모습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박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윽고 백아린의 대검이 움직이는 순간.

부웅!

지옥이 펼쳐졌다.

콰콰콰콰쾅!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물보라가 인근을 뒤덮었다.

* * *

촤아아악.

물속에서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흠뻑 젖은 상태로 바닷속에서 부두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여인은 백아린이었고, 그녀의 양손에는 한 명씩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은 천무진을 등에 업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마치 짐이라도 끄는 듯 피투성이가 된 적련화를 끌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일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백아린의 명령에 의해 이곳 항구로 집결한 적화신루의 병력들이었다. 적화신루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움직인 이곳 오천의 지부장이 바닷속에서 걸어 나오는 백아린을 확인하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총관님! 괜찮으십니까?"

"보시다시피."

짧게 말을 끝낸 백아린은 그대로 질질 끌고 오던 적련화를 한쪽 바닥에 내팽개쳤다.

피투성이의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기 무섭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겨우 그것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임조차 보이지 못했다. 이미 백아린에게 점혈을 당한 탓이다.

백아린이 말했다.

"이 여자 끌고 가요. 곧 제가 심문할 생각이니 자리 마련해 두시고요. 그리고 제일 급한 건 의원이에요. 인근에서 실력 좋은 사람들은 모두 모아 줘요."

말을 끝낸 그녀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천무진은 눈만 뜬 채로 백아린의 등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 아까보다 다소 힘이 빠진 듯한 몸 상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의 명령에 오천의 지부장은 수하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이내 백아린에게 말했다.

"의원을 데리고 오라 했으니 우선 거처로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죠."

말을 끝내기 무섭게 지부장이 먼저 나머지 일행들을 대동한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백아린이 천무진을 둘러업은 채로 뒤쫓았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지부장은 인근에 가장 가까운 장소를 선택해 움직였다.

덕분에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자그마한 거처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거처에 들어서자마자 백아린은 곧장 천무진을 눕힐 수 있는 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 빠르게 자리를 마련하고 그 위에 천무진을 눕혔다.

자리에 천무진을 눕힌 상태로 백아린이 급히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제 목소리 들려요?"

말과 함께 백아린은 천무진의 입가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아주 자그마한 숨소리뿐,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천무진은 마치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알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인형 같은 상태였지만 지금 이 안에 천무진의 정신이 남아 있다는 걸.

그것이 남아 있었기에 안간힘을 다해 마을 곳곳에 천(天)이라는 글자를 남겼고, 배에서도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을 테니까.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과연 백아린이 시간 내에 천무진을 찾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니, 불가능했을 게다.

분명 천무진을 구해 낸 건 백아린이지만, 그 모든 건 이렇게 된 와중에서도 그가 어떻게든 조금씩 남긴 흔적 덕분이기도 했다.

백아린은 자리에 누워 있는 천무진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대답을 하지 못해도,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는 걸요."

백아린의 말에도 여전히 요지부동인 천무진. 그런 그의 손을 꼭 쥔 채로 백아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곧 의원들이 올 거예요. 고통스럽고 두렵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버텨 줘요."

천무진을 그들 손에서 구해 내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무진의 상태가 어찌 될지는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계속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이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천무진의 손을 꽉 쥔 채로 백아린이 천천히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직까지는 따뜻한 천무진의 손의 감촉이, 이마를 타고 전신으로 흩어져 나갔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백아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말아요."

말을 내뱉은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간절히 천무진이 살기를 기도드릴 때였다.

그 순간.

슥.

미묘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백아린은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전히 천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남은 미세한 손의 움직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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