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유유상종 ― 박살 내자고 (2)
"……만나고 싶어."
깊은 침묵 끝에 나온 천무진의 그 한마디.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응."
천무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슬며시 떨려 오는 목소리가 지금 천무진의 진짜 속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천무진이라고 할지라도 이 상대만큼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번 생에서 자신을 조종했고, 이번 생에서조차 조종에 성공할 뻔했던 여인.
지금 그는 이곳에 갇혀 있는 적련화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사실 백아린은 가능하면 천무진이 그녀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천무진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토록 긴 시간 자신을 조종해 왔던 여인이다.
헌데 천무진은 그런 상대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직접 마주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아린이 당부하듯 말했다.
"좋아요. 대신 하나만 미리 약속해 줘요. 혹시라도 상태가 이상해진다면 곧바로 돌아오는 거로요."
"물론이지. 나도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 그저 얼굴 한 번 보는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이 이상한 몸 상태의 정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당시 적련화와 마주했을 때 온몸이 굳어 버렸던 천무진이다. 어느 정도 자모충과 관련되었을 거라 의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직접 마주해 보고 싶었다.
백아린이 말했다.
"가죠, 그럼."
천무진이 침상에서 곧장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틀을 혼절하고 하루를 더 푹 쉰 덕분에 몸 상태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직접 거동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내공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거의 평상시의 몸 상태에 가까웠다.
백아린과 함께 걷기 시작한 적화신루의 비밀 거처.
거처는 그리 크지 않은 크기로, 천무진이 자리하고 있던 방과 창고는 가장 끝과 끝에 위치해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백아린이 일부러 최대한 거리를 벌려 둔 탓이다.
허나 거처 자체가 그리 크진 않았기에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혀 있는 창고의 입구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다가오는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
백아린은 그런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는 곧바로 말했다.
"잠시만 자리들 비켜 줄래요?"
"예, 총관님."
그들은 백아린의 명령대로 급히 창고에서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두 사람은 입구 앞에 선 채로 잠시 침묵했다.
백아린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가만히 선 채로 굳게 닫힌 창고의 문을 응시하는 천무진이 있었다.
백아린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던 장본인인데. 그리고 난 그 여자에게 아무런 것도 할 수 없고 말이야."
전생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천무진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이 없었다면 지금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일 또한 없었을 게다.
허나 알면서도 이곳에 왔다.
문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백아린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얀 백의에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천무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사실 이곳까지 오겠다고 결정을 내린 건 천무진 본인이었지만, 만약 혼자였다면 절대 그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게다.
지금 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유.
그건…….
"당신이 있으니까."
"……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백아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천무진이 커진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또 위험해지면 당신이 구해 낼 거 아니야. 아닌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물어 오는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보아 왔던 미소와는 뭔가 다른 느낌.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을 향한 믿음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저 눈빛에 이상할 정도로 설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그의 믿음에 화답하고자 백아린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그게 언제든, 어디든 제가 반드시 구해 줄게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그녀가 귀엽다 느껴졌으니까.
천무진이 웃으며 말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믿음직스럽군. 장군감인데."
"그거 여자한테 실례 아니에요?"
"칭찬이야."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수상쩍다는 듯 중얼거리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뗀 채로 한 손을 창고의 문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손을 가져다 대고 천무진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옆에 자리한 백아린은 그런 그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요? 손이라도 잡아 줘요?"
"내가 놀렸다고 당신까지 이러기야?"
"뭐야, 역시 놀린 게 맞았네요."
투덜거리던 백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은 문에 가져다 댄 천무진의 손등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놀란 듯 움찔한 천무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을 때였다.
백아린이 말했다.
"가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그녀의 그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등을 통해 전해져 오는 백아린의 따뜻한 체온. 그 체온이 머뭇거리던 천무진의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끼익.
창고의 문이 밀려 나가며 이내 새카만 내부의 모습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하나의 의자.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혼절한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적련화가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
하지만 그 눈동자는 부릅떠져 있었다.
유일하게 적련화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백아린에 의해 완전히 혈도를 점혈당해 있었기에 움직이지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적련화와 마주하는 순간 천무진은 절로 움찔했다.
드러나 있는 그녀의 외모가 자신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얼굴은 멀쩡한 부분의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주름이 가득했고, 끔찍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천무진이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너는……."
하지만 이윽고 천무진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슴 부분을 시작으로 통증이 조금씩 밀려왔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아린이 비틀거리는 천무진을 빠르게 부축했다.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다행히."
말을 끝낸 천무진은 뒤로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밀려들었던 고통이 조금이나마 잦아들기 시작했다.
천무진이 호흡을 다잡았다.
‘예상대로네.’
적련화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마도 자신과 저 여인 사이에 연결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백아린 또한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거리는 괜찮아요?"
"응, 이 정도는 그래도 버틸 만한 것 같아."
대답을 들은 백아린은 얼추 두 사람 간의 거리를 계산했다. 대략 크게 여섯 걸음 반 정도의 거리.
안전한 위치에 선 채로 혈도를 점혈당하고, 묶여 있기까지 한 적련화를 바라보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전혀. 처음 보는 자야."
생면부지의 얼굴에 천무진이 고개를 저으며 답할 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적련화의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천무진에게 달려들 것처럼 말이다.
허나 그건 그저 마음에 불과할 뿐, 적련화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분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 조종했던 그 여자가…… 저런 자였군."
목소리만 기억났던 여인, 그 여인의 얼굴을 이제 확실하게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저 얼굴을 잊지 않으리라.
가만히 적련화와 마주하고 있던 도중, 옆에 있던 백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더 확인하고 싶은 게 남았어요?"
애초의 목적이었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과,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이상한 상황까지 확인했으니 이곳에서 할 일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천무진이 답했다.
"……아니, 이제 가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는 두 사람, 그리고 뒤이어 닫히는 문과 함께 창고 안에는 다시금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적련화.
그녀의 부릅떠진 눈동자의 핏줄이 터져 나가며 조금씩 붉게 변해 가고 있었다.
* * *
백아린과 적화신루 일총관 진자양에게 연락을 남긴 한천은 곧바로 단엽과 함께 먼저 움직였다.
백아린과 한천을 죽이려고 했던 귀문곡의 함정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얼마 안 가 이 모든 일을 꾸민 배후의 귀에 들어갈 터.
그렇다면 그들이 준비해 둔 비책을 사용하기 전에 목덜미를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백아린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기보다는 먼저 행동을 하는 걸 선택한 것이다.
위계질서가 뚜렷한 적화신루고, 특히나 나이는 비록 자신보다 훨씬 어리지만 백아린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완수해 내는 한천이다.
평소였다면 이처럼 자신이 결정하고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더군다나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 보고하고 움직이기에 시간이 모자란 경우가 생긴다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라는 백아린의 지시도 있었다.
그 일로 인한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며.
그만큼 백아린이 한천을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한천은 이번 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어 내려 하고 있었다.
이총관과 육총관이 빠져나갈 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리기 위해서 한천이 향한 곳은 그들의 거점인 적화신루 화도 지부 인근에 자리한 기루였다.
그리고 그 기루에서 한 명의 사내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제법 취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
덩치는 곰처럼 컸고,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라도 거친 느낌이 풀풀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뒷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내의 정체는 바로 육총관 어교연의 부총관인 경패였다. 경패는 술을 제법 많이 마셨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바닥을 바라본 채로 비틀거리며 뒷간으로 향하던 그는 술에 취해서인지 실실 웃고 있었다.
그렇게 뒷간으로 향하는 좁은 길목에 들어섰던 경패는 마주 오던 누군가와 가볍게 몸을 부닥쳤다.
술기운에 휘청하며 쓰러질 뻔한 그가 고개를 치켜들며 버럭 소리쳤다.
"어이! 눈깔을 어디다가 두고 다니는……!"
허나 입을 열던 경패는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아 버리고야 말았다.
그곳에서 마주한 상대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놀란 경패는 순식간에 술이 깨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한 그가 곰처럼 커다란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토해 냈다.
"히끅!"
"어이고, 경패 이 친구. 술이 과했구먼."
어깨에 손을 두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내.
험상궂은 경패와는 반대로 웃는 눈매가 인상적인 인물, 한천이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상황이 반대로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광경에서…….
어깨에 손을 두른 한천이 경패를 향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