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209화 (208/293)

209화. 공허함 ― 아직은 아니니까 (1)

어느덧 해가 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천무진 일행들이 기거하고 있는 귀림원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대홍련의 련주인 단관호와 만나기 위해 떠났던 단엽이었다.

귀림원에 들어서기 무섭게 단엽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는 소리쳤다.

“어이! 나 돌아왔다!”

그의 커다란 고함 소리에 닫혀 있던 방문들이 열리며 그 안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진과 백아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한천은 웃으며 단엽을 반겼다.

“여, 왔구먼!”

“뭐야? 한천 말고는 반응들이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이 밤에 나타나서는 자기 왔다고 그렇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지.”

백아린의 말에 단엽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다들 내가 언제 오는지 궁금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단엽의 시선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그렇긴 했지.”

갑작스러운 대홍련 련주의 연락으로 단엽이 개인적인 용무를 하러 다녀왔다. 여태까지는 없었던 대홍련의 급한 연락, 뭔가 일이 벌어진 건 아닐지 내심 신경이 쓰였던 상황이다.

천무진이 곧장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니, 뭐 별건 아니고.”

단엽은 자신에게 향한 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이 섰는지 단엽이 짧게 말했다.

“아무래도 련주가 될 거 같아.”

“에엥?”

그 말에 놀란 듯 소리를 내지른 것은 한천이었다. 그가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련주가 된다니? 대홍련 련주가 된다고?”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될 것 같던데.”

단엽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이건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서 있던 천무진과 백아린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이 곧바로 말했다.

“우선 내 방으로 모이지.”

그 말을 끝으로 천무진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백아린 또한 따라서 움직였다.

두 사람이 사라진 쪽으로 움직이는 단엽을 향해 옆에 서 있던 한천이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해 줄게. 가자고.”

한천의 어깨를 툭 친 단엽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천무진의 방 안에 네 사람 모두가 모였을 때였다.

천무진이 단엽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봐. 갑자기 왜 네가 련주가 되는데?”

저번 생에서도 단엽은 대홍련의 련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보다 아주 오랜 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련주를 만나고 돌아오더니, 대홍련의 수장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아는 것과 또 다르게 흘러가는 미래, 분명 자신과 연관되어 뭔가가 벌어졌음을 직감한 천무진이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단엽은 련주 단관호와 나눴던 이야기들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십천야가 직접 단관호를 찾아온 것부터, 그가 어떠한 선택을 했으며 그로 인해 단엽 또한 어떻게 결정을 내렸는지도.

사파를 대표하는 대홍련의 수장이 바뀌는 일, 그렇지만 설명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이 났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고 가만히 단엽의 말을 듣고 있던 천무진이 물었다.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가?”

“련주가 된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천무진의 그 말에 백아린과 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천무진이 고민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단엽이 련주가 되면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예 대홍련의 일에서는 손을 놓고 천무진과 함께하고 있지만 련주가 된다면 지금처럼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진의 말에 단엽이 답했다.

“사실 당장에 큰 변화는 없다고 생각해. 아직은 련주님께서 매듭지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단엽 또한 천무진이 말한 부분에 있어 꽤나 고민이 깊었다.

련주가 되어 십천야와 싸우는 건 상관없었다.

허나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

그건 과연 련주가 되어서도 지금처럼 천무진 일행 중 하나로 함께 싸워 갈 수 있느냐는 거다. 물론 떨어진다고 해도 같은 적을 두고 있고, 약속까지 했으니 천무진을 도와 십천야와 싸울 것이다.

하지만 멀리서 돕는 것과 직접 함께하는 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엽은 그게 내키지 않았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런 것도 없는 상황.

지금은 단엽조차도 뭐라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천무진 또한 더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만 않았을 뿐 천무진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어렵게 만난 인연들이다.

처음엔 필요에 의해 자신이 먼저 다가갔다.

적화신루에도, 대홍련에도.

필요해서 만났고, 언제든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인연들이라 여겼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와 조금 달랐다. 적화신루의 인물들인 백아린과 한천뿐 아니라, 대홍련의 부련주인 단엽까지도.

다시 한번 얻게 된 또 한 번의 삶.

이 삶에서 천무진이 얻은 가장 큰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복수를 할 기회?

물론 그 또한 맞는 소리다. 허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동료들.

저번 생에서는 가지지 못해 몰랐던 그 행복을 알게 해 준 이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런 이들 중 하나인 단엽이 떠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천무진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번 생보다 더 많은 소중한 이들이 생겨 버렸다.

침묵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뭔가 어색했는지 단엽이 괜스레 말을 걸었다.

“어이, 주인.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말은 무슨.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추후에 뭔가 정해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면 될 것 같은데.”

천무진은 괜스레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지금 스스로가 말한 대로 뭔가가 확실히 정리된 것도 아니었고, 단엽의 결정에 대해 자신이 왈가왈부하기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련주가 된다는 것.

그것은 수천 명에 달하는 대홍련 무인들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의미였다.

만약 단엽이 떠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건 그의 선택인 것이고, 천무진 또한 그러한 결정에 최대한 맞춰줘야만 했다.

단엽이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방 안의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은 상황.

천무진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일단 좀 쉬어.”

천무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단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먼 거리를 다녀와 피곤하기도 했고, 천무진의 말대로 지금 이야기한다고 마무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으로써는 사정을 설명한 것만으로 충분했고, 그 이후의 문제는 나중에 고민해도 될 부분이었다.

단엽이 세 사람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말대로 들어가서 좀 쉴 테니 내일들 보자고.”

말을 마친 단엽은 곧바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고, 그 순간 한천 또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조용히 서서 천무진의 눈치를 살피던 백아린이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좀 아쉽나 봐요?”

백아린의 그 한마디에 천무진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전이라면 무슨 소리냐며 잡아뗐겠지만…… 천무진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못 속이겠군.”

솔직한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 또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위로하듯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정해졌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알고 있어. 그리고 당신 생각만큼 많이 신경 쓰는 건 아니야.”

괜스레 툴툴거리는 천무진의 모습에 백아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천무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자꾸 웃어?”

“그냥 많이 변하신 것 같아서요. 저한테 이렇게 솔직히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변한 게 나뿐인가. 당신도, 다른 두 사람도 다들 변한 건 비슷해 보이는데.”

정체가 걸릴 위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정체를 밝혔던 백아린이다. 처음과 달라진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떠나야 할 것 같다면 어쩔 생각이에요?”

“……보내 줘야겠지.”

“이렇게 아쉬워하면서요?”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다시 한번 퉁명스레 말한 천무진이 이내 방금 전까지 단엽이 자리하고 있던 장소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곧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떠나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해도 그건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린 대답일 테니까. 저놈이 겉보기엔 가벼워 보이지만 진짜는 그 반대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유쾌해 보이고 장난기 가득한 단엽, 하지만 그의 속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결정이라면 더더욱 심사숙고를 할 것이 분명했다.

이런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어색했는지 천무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창가 쪽으로 다가가 괜스레 바깥의 풍경을 살피며 서 있는 그때였다.

백아린이 양손을 입 근처에 가져다 댄 채로 장난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기요.”

“…….”

“저기요~ 거기 창가에 계신 분.”

못 들은 척하는데도 불구하고 재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결국 천무진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웃고 있는 백아린이 있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난 여기 있을게요.”

백아린의 그 한마디에 천무진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뭐?”

“난 여기에 있을 거라고요. 당신이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안 떨어질 거예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고마웠고, 또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천무진은 자신에게 향해 있는 백아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다시 창밖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슬쩍 말을 흘렸다.

“그런 말 함부로 안 하는 게 좋을걸. 그러다가 내가 평생 잡아 두면 어쩌려고 그래.”

괜스레 창밖을 바라보며 던진 천무진의 그 한마디.

그리고 그 말에 백아린이 천무진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럼…… 평생 옆에 있죠, 뭐.”

생각지도 못한 백아린의 그 한마디에 당황한 천무진이 황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간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을 테니까.

* * *

이야기를 끝내고 움직였던 단엽은 한천에게 끌려가 그의 방에 자리하게 됐다.

단엽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 피곤하다니까.”

그런 단엽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천은 침상 옆에 있는 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짜잔.”

“……뭐냐 그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단엽의 눈동자가 갑자기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한천의 손에는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호리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눈을 빛내는 단엽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은 한천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겠냐. 적명주(赤明酒)다.”

적명주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단엽이 한천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가 탁자 위에 놓인 빈 잔 하나를 들어 올린 채로 다급히 말했다.

“뭐 해, 빨리 주지 않고.”

단엽의 재촉에 한천은 곧바로 호리병에 담겨 있는 적명주를 잔에 따랐다. 이름처럼 붉은빛을 머금은 술이 천천히 잔을 채웠다.

동시에 방 안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퍼져 나갔다.

잔에 채워 준 적명주를 단숨에 들이킨 단엽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상급(上級)인데?”

적명주는 중원에 이름을 떨치는 명주 중 하나다.

하지만 워낙 구하기가 힘든 데다, 가격도 만만치 않아 쉽사리 접하기 힘든 술이었다.

거기다가 같은 적명주라고 해도 각각의 등급에 따라 그 깊이는 천차만별이었는데, 지금 한천이 준 건 여태 먹어 왔던 것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단엽이 물었다.

“이거 구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구한 거냐?”

“야, 내가 괜히 적화신루의 부총관인 줄 아냐. 정보 하나는 빠삭하단 말이지.”

“큭큭, 백아린이 네가 이런데 적화신루의 정보력을 쓰고 있다는 걸 알면 뒷목 잡겠는데.”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알지?”

한천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다시금 잔을 내민 단엽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글쎄. 한 잔 더 주면 생각해 보지.”

“쯧, 하여튼 욕심하고는. 옜다.”

허나 말과는 다르게 한천은 웃는 얼굴로 단엽의 빈 잔을 채워 줬다.

다시금 자신의 잔에 찬 적명주를 마시는 단엽의 모습을 살피던 한천 또한 마찬가지로 한 잔을 따라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적명주 특유의 감촉과,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줬다.

한천이 짧게 탄성을 토해 냈다.

“크, 이거 비싼 값을 하는 술이네.”

말과 함께 잔을 내려놓은 한천이 슬그머니 단엽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분은 좀 어때?”

“갑자기 웬 기분?”

“아니, 그냥 어떤가 해서.”

“좋은 술 마시는데 당연히 최고지 인마. 극락이 따로 없다.”

단엽이 실실 웃으며 유쾌하게 말을 받아칠 때였다.

한천이 흘리듯 말을 던졌다.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니까 천 공자님이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던데.”

“…….”

한천의 그 말에 단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전 천무진과 단엽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하고, 길었던 침묵.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것으로도 천무진의 말을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단엽을 바라보던 한천이 조용히 빈 잔에다가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르르.

다시금 차오른 술잔을 확 꺾어 마신 단엽이 소매로 입가를 닦아 냈다.

술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던 단엽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0